더불어신학76 결국 사랑이어야 한다. (사랑학으로 신학을 생각하며...)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느님을 모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1 요한 4장 8절)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그분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1요한 4장 19절) 신에 대한 길고 긴 이야기를 합니다. 신은 어떤 존재이고 그 신을 향한 우리의 구원은 어떠한 것인지 참으로 길고 긴 시간 참으로 다양한 논리의 이야기를 만들어 그것으로 가지고 서로 다투고 어느 순간엔 서로를 이단이라며 비난하며 그렇게 신에 대한 길고 긴 이야기를 토대로 서로 다툽니다. 그런데 막상 속 그 신은 사랑이라 참으로 간단하게 정의되어 나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그 자체이십니다. 항상 사랑하고 있으십니다. 우리가 그분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던 그때에서 그분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2020. 11. 18. 십자가의 예수는 여전히 외로울지 모릅니다. 예수가 죽던 날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림은 예수가 못 박힌 십자가를 바로 세우는 장면입니다. 어둠 가운데 여러 사람들이 숨어 있으며 빛은 예수를 향합니다 그리고 예수의 발, 못 박힌 그 발 부근, 그 시대의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있습니다. 자세히 보면 매우 슬픈 얼굴로 그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베레모를 쓴 그 사람은 바로 이 그림의 화가 램브란트입니다. 그는 슬픈 얼굴로 이 비극의 장면에 한몫을 하고 있습니다. 그가 과거로 돌아가 그 장면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그의 삶에 예수의 십자가, 그 고난의 모습이 현실로 항상 그에게 머물고 있다는 의미일 수 있겠습니다. 위안부 할머니에게 과거의 그 아픔은 단순히 과거의 한 아픔이 아니라, 여전히 현실로 진행되는 아픔입니다. 육체의 아픔과 달리 영혼의 .. 2020. 11. 17. 감옥 속 힘 없는 노인 베드로를 보면서 램브란트의 그림 속 베드로를 봅니다. 기도를 위해 잡은 손은 바른 모양이 아닙니다. 과거 힘겨운 어부의 삶이 상한 손의 모양으로 남았습니다. 노동으로 상한 그 손을 부여잡고 기도 중인 그는 지금 감옥에 있습니다. 예수께서 주신 두 열쇠는 옆에 두고 있지만 막상 현실 속 그는 감옥에서 상한 손을 모아 기도하는 그리 강해 보이지 않는 노년의 그 누군가입니다. 감옥이란 상황을 초월한 듯 이 세상에 없는 모습으로 앉아 기도하는 것도 아니고, 성하지 않은 손으로 힘겨운 얼굴을 하고 감옥에서 기도 중입니다. 오직 그의 기도 중에 그를 감싸는 빛 만이 그와 더불어 그의 쉽지 않은 지난 삶을 안아주며 위로하는 하느님의 모습을 그린 듯합니다. 성스러움의 자리, 그리고 그 자리의 삶은 보이는 것과 달리 제법 힘들지 모릅니.. 2020. 11. 13. 이 시대의 세례자 요한은 분노하라 할지 모르겠습니다. 마르코에 따르면 ΚΑΤΑ ΜΑΡΚΟΝ 유대칠 암브로시오 옮기고 풀이함 1.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 (Ἀρχὴ τοῦ εὐαγγελίου Ἰησοῦ χριστοῦ. Initium evangelii Iesu Christi Filii Dei.) 2. 예언자 이사야의 글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보라! 나의 심부름꾼을 너희에게 보내니, 그가 너희의 길을 마련할 것이다. (Καθὼς γέγραπται ἐν τῷ Ἠσαΐᾳ τῷ προφήτῃ· Ἰδοὺ ἀποστέλλω τὸν ἄγγελόν μου πρὸ προσώπου σου, ὃς κατασκευάσει τὴν ὁδόν σου· Sicut scriptum est in Isaia propheta: “Ecce mitto angelu.. 2020. 11. 1. 이전 1 ··· 12 13 14 15 16 17 18 19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