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존재론94 주체와 주체의 만남 주체와 대상의 대립은 주체가 대상을 이해하는 조건이 된다. 나라는 주체가 남이란 대상과 마주할 때 나는 남을 인식하고 편단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주체와 대상의 대림은 흔히 주체 중심으로 대상을 배제하게 한다. 그러나 나라는 주체와 더불어 있는 대상은 항상 주체를 구성하는 조각을 만들어왔다. 즉 나는 수많은 너와의 만남으로 이루어진 더불어 있음의 터이다. 그리고 이 터는 점점 생동적으로 역동하고 있다. 만남의 더해짐은 존재의 풍성함으로 이어져갈 것이기 때문이다. 나라는 주체가 이와 같이 역동적이듯이 나 아닌 나, 즉 대상 역시 자신의 편에선 주체이며, 그 주체 역시 역동적으로 있음은 당연하다. 그렇다면 나와 너의 만남은 역동적인 두 존재의 더불어 있음의 마주함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 역동성의 역동들.. 2020. 8. 21. 가족도 우리가 되지 못했다. (부모철학 2020 07 20) 친구가 그렇게 친하던 어머니와 크게 싸우고 다시 보지 않는다. 친구는 수능도 잘 쳤지만, 가난한 집의 장녀라는 이유로 전문대를 갔다. 그리고 졸업을 하곤 홀로 있는 어머니에게 자신이 번 돈을 모두 드렸다. 나는 그때도 반대했지만 그는 불쌍한 어머니라고 자신이 도와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10년이 지났다. 주변에 돈놀이를 잘 하는 친구를 둔 어머니는 대출을 받고 이래 저래 아낀 아버지의 사망 보험금 등등 결국 집을 3채로 불렸다. 비싼 집은 없지만 말이다. 친구의 생각과 달리 아버지의 사망 보험금도 있었고, 그 이외 딸이 모르는 집의 돈이 어느 정도 은행에 있었던 모양이다. 친구는 약간의 배신감이 들었지만 참았다. 고생하며 살았으니 그 정도 누릴 수 있다고 말이다. 그냥 산술적 계산을 해도 3채 가운데 한.. 2020. 7. 20. 하게 되어지는 것, 함과 됨의 하나됨, 그 가운데 우리가 있다. 밀거나 밀리거나 이 둘로 세상을 그렸다. 행하거나 당하거나 말이다. 신은 행한다. 신은 당하지 않는다. 그래서 신의 당함, 라틴어로 passio, 즉 수난이란 말이 충격적이다. 신은 어떤 당함도 없이 순수하게 행하기만 해야 한다. ‘부동의 원동자’를 보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신은 스스로는 어떤 것으로 부터도 영향을 받지 않으며 오직 다른 것을 움직이게 할 뿐이다. 이런 존재가 철학에서 이야기하는 신이었다. 인간의 영혼 역시 이와 같다. 순수한 인간의 영혼은 육체에 당해서는 안 된다. 육체를 지배해야 사람은 사람다운 존재가 된다. 헬라의 철학에서도 동아시아의 철학에서도 중앙아시아의 철학에서도 대체로 이런 주장들이 강하였다. 마땅히 당해야하는 육체에 당하면 사람은 쾌락에 빠져들어 제대로 행복하지 못하고 사람다.. 2020. 7. 16. 나는 이론의 종이 아니다. 이론은 잠시 내 생각과 같아보이고 내 인생의 답으로 느껴지지만 그것이 유일한 하나의 답으로 생각하는 순간 이제 이론은 나의 주인이 된다. 이론은 나의 주인이 아닌 종이다. 우리의 봉사자다. 그 시절 나와 우리를 위해 쓰이다 사라지는 그런 고마운 종, 봉사자 말이다. 그래서 나는 무슨 주의도 아니다. 그 주의가 나를 지배하고 나의 시선을 이끄는 순간 나는 더 이상 철학노동자가 아니다. 쉼없이 이론을 고민하고 소개하고 살지만 이론의 종이 될수는 없다. 이론에 대한 아집은 쓸데없는 순결주의자, 이 세상에 없는 완벽주의자, 이론의 온전한 구현자를 상상하고 그 상상의 인물이 아닌 나를 낮춘다. 나를 부정한다. 상상보다 못한 존재가 되어 버린다. 이론의 온전한 구현자는 없고 이론은 항상 진화해야하면 이론의 이상향을.. 2020. 7. 12. 이전 1 ··· 7 8 9 10 11 12 13 ··· 24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