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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철학학교방송국

토마시우스 2회 강의 지면 보강

by Daechilyus Ambrosius Magnus 2020. 6. 27.

신, 중세인들에게 신은 무한한 존재입니다. 무한한 존재란 끝이 없다는 말입니다. 신에 대하여 무엇이라 말을 하면 항상 그것을 벗어서는 것이 더 있는 그러한 존재입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하는 선하다는 말이나 아름답다는 말, 이 모든 말이 그대로 신에게 적용될 수 있을까요? 그러기 힘들 것입니다. 당장 중세 흑사병으로 그렇게 많은 이들이 죽었습니다. 인구의 3분의 1이 죽었습니다. 그들에게 원인도 모르는 병을 만들어 내린 것도 당시 중세들의 생각에선 신이었을 것입니다. 그와 함께 멀고 먼 몽골에서 온 군대는 유럽에 엄청난 공포를 심어 주었고, 러시아는 오랜 시간 몽골의 통치를 받게 됩니다. 자신들이 믿는 신은 도대체 무엇을 했던 것일까요? 신을 그렇게 열심히 믿었지만, 신은 그 때 자신과 함께 하고 있지 않다고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 모든 것이 결국은 사람의 머리 속에서 일어난 말입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실망하고 절망하듯이 그렇게 신에게 실망하고 절망한다면 13세기 그리고 14세기 유럽의 힘겨움 앞에서 침묵한 신에게 실망하고 절망했겠지만, 중세 사람들에게 신은 무한한 존재, 이러한 사람들 사이 만들어진 일시적인 감정 등으로 만들어진 관념 속에서 들어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중세 철학자들이 생각한 신은 그렇게 무한한 존재입니다. 그렇기에 도저히 사람의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계시 진리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그것이 참인지 거짓인지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삼위일체는 삼위일체이고 그냥 그 삼위일체를 최대한 사람의 편에서 이해하려 노력하는 것이 사람들의 삼위일체론이다. 구체적인 과정을 강요하지 보다 결과를 부정하면 다투게 됩니다. 예를 들어 삼위일체를 부정한다면 말입니다. 삼위일체가 진리인 것은 중세 사람들에게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무한한 신이 사람에게 준 계시, 즉 아예 신을 이해할 수 없으니 신이 스스로 자신을 우리에게 살짝 보인 것이며, 그것은 무조건 참된 사실입니다. 종교적으로도 신은 결국 무한한 존재입니다. 철학적으로도 그렇구요.

무한한 존재인 신, 중세 후기 많은 신비주의는 그 무한한 존재인 신을 언어와 이성을 넘어선 방식으로 하나 되기 위해 노력합니다. 여기에서 언어와 이성을 넘어선다는 것은 무시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최대한 치열하게 사고하고 그 사고의 끝에서 모든 신에 대한 구속을 내려 놓으면 신을 유한한 것으로 잡으려던 그 무모한 도전의 실패에서 신을 만난다는 것입니다.

신이 무한하다는 것, 결국 그것은 신은 무엇인가에 대한 표현은 사람의 편에선 온전히 절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고, 신이 존재한다는 것도 결코 사람의 편에선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근대 사람들은 이 세상 모든 것을 '있다'고 서술하게 하는 바로 그 '있다', 가장 일반적인 '있다'를 연구하는 '일반 형이상학'과 그 '있다'로 서술되는 구체적인 종들, 즉 '신'이 있다. '사람'의 혼이 있다. '우주 만물'이 있다는 구체적인 있다들을 연구하는 '특수 형이상학'으로 '형이상학'을 구분합니다. 토마시우스의 글에서도 형이상학을 일반 형이상학과 특수 형이상학으로 나누어집니다. 그러나 이러한 근대 사람들의 이해가 가능하기 위해선 류 개념으로 있다와 종 개념으로 있다고 가능해야 합니다. 달팽이와 고양이라는 종은 동물이란 류에 속합니다. 동물이란 류개념은 달팽이와 고양이에게 같은 의미에서 같은 방식으로 서술됩니다. 일의적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있다'라는 말이 피조물(사람의 혼, 우주 만물)과 신에 대하여 같은 의미에서 같은 방식으로 서술될 수 있을까요? 안 됩니다. 신은 무한하고 피조물은 유한하니 말압니다. 토마스 아퀴나스와 같은 이는 그래서 유비론을 이야기합니다. 신과 피조물에 대하여 '있다'는 말을 사용하지만 일의적인 것이 아니라, 유비적이라 합니다. 유비적인 차원에서 서술되어지면 그것은 엄밀하게 같은 류 개념 아래 종 개념으로 볼 수 없습니다.

존재의 원인으로 신, 무한한 신... 결국 중세철학이 이야기할 수 있는 신은 이 정도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서술로도 신은 완전히 잡아낼 수 없습니다. 신은 말 그대로 무한하니 말입니다. 철학이 온전히 신을 대상으로 연구할 수 없다면, 신을 연구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요? 계시로 주어진 것을 이해하려는 노력과 신이 사람에게 준 성서를 열심히 이해하는 것입니다.

근대 형이상학은 앞서 말했듯이 있다라는 말로 서술되는 모든 것을 다루는 일반 형이상학과 있다는 말로 서술되는 구체적인 것들, 신, 사람의 혼, 우주 만물에 대한 특수 형이상학으로 나누어집니다. 특수 형이상학 가운데 철학적 신학이 들어갑니다. 이 신은 성서의 신이 아닌 철학자의 신이라 해도 신이 이제 형이상학의 연구 대상이 됩니다. 사람의 이성 속에서 다루어지는 신이 되어 버립니다. 근대 신학에서 보이는 '이신론'을 봅시다. 이신론은 신을 사람을 벗어난 초월적 존재라고 하지만, 동시에 사람의 이성으로 신의 존재와 우주의 법칙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신이 사람의 이성 속에서 이해되어 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중세 철학도 사람은 이성을 가지고 있지만, 신은 이성 속에서 이해되고 담겨질 수 없습니다. 무한하니 말입니다. 그러나 근대는 다릅니다. 이성 속에 신이 구속되어 이해됩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말입니다.

신은 결국 무지의 대상이며, 사람의 이성은 그 알 수 없는 절대 진리를 향하여 노력하는 존재, 바로 그것이 중세 철학에서의 사람입니다.

유대칠 2020 06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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