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존재론과 이응노5 이어지고 뭉치고 흩어지고 다시 이어지며 뭉치는 역사의 장.[ 숲 (이응노 2981년 작)] 한지에 잉크로 그려진 숲은 매우 역동적입니다. 중앙에 드러난 큰 몸짓이 두드러져 보이지만 그것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빈 공간에 강한 여백을 배경으로 그려진 획이 아닙니다. 공간의 배경인 듯이 그려진 듯 보이는 작은 몸짓들도 무엇인가 하나의 이상한 질서 속에서 혼돈의 외침을 지탱하고 있습니다. 결코 중앙의 큰 몸짓만이 주인공이 아니라는 듯이 그림의 경계 부분에서 강한 몸짓이 그림 밖 미쳐 이 그림에 담기지 못한 부분에서의 큰 몸짓을 눈이 아닌 마음으로 보이게 합니다. 숲은 1981년 작입니다. 박정희는 시대가 사렸지만 역시자 독재는 그대로 이어집니다. 전두환의 잔혹한 시대가 열렸습니다. 그리고 광주에선 많은 이들이 시대의 어둠에 항거하며 죽어갔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역사의 영웅으로 그 이름이 그 높이 .. 2020. 11. 9. 역사의 주인공은 더불어 있음의 거대한 흐름이었다. (이응노의 군상 1986년 작) 이응노라면 나에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작품은 1986년 작품인 이다. 심지어 나의 작은 휴대 아이패드의 화면이 바로 이 작품이라면 내가 얼마나 이 작품을 아끼고 가까이 두고 싶어 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상황이 그러하지 않지만, 복재 그림이라도 하나 나의 방에 걸어두고 싶다. 이응노의 삶에 대해선 굳이 이야기하지 않겠다. 그의 삶은 한국 현대사의 슬픈 비극의 한 모습이다. 독재로부터 거부당한 예술인으로 그의 삶은 쉽지 않았다. 그 쉽지 않은 고난의 시간들은 구세주를 찾게 된다. 그 고난은 비록 그가 직접 그 공간에 있지 않았지만 광주의 비극에서 극대화된다. 얼마나 아프고 힘들었을까... 그는 비록 그 공간과 그 시간에 더불어 있지 않았지만 그는 광주의 비극에 더불어 있었고 그 이후 그의 작품은.. 2020. 11. 6. 이응노의 풍경 1950 이응노의 1950년 작품 '풍경'이다. 풍경을 본다는 것은 객관적 사실을 본다는 것이 아니다. 주관적 사실을 본다는 것이다. 사실 오랜 시간 많은 이들은 철학사를 객관적 사실이라 보았다. 철학사의 주체가 가진 시선이 객관적이라 믿었다. 아니 그 정도의 고민도 없이 그냥 그것을 객관적 사실이라 확신했다. 그러나 사실 풍경이 주관적 사실이듯이 철학사 역시 주관적 사실이다. 주관적 사실이란 나에게 뜻으로 다가온 순간이 때론 그 크게 보이기도 한다. 어쩌면 이런 저런 것이 더 이상 보이지 않기도 한다. 그렇기에 그렇게 그려진 풍경화는 추상화가 되는 것이 당연하다. 추상은 주관의 자신감이다. 내가 나오 있을 때 나에게 뜻으로 다가온 것을 그려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아직 구체적 사물의 모습들이 살짝 보인다. 그러.. 2020. 8. 9. 서로 다른 몸짓이 우리를 이루고 있다. (2020 07 28) 누가 주인공인가? 보는 이들은 저마다 누구를 주인공으로 삼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주인공은 바로 옆의 한 몸짓과 완전히 떨어진 분리된 홀로 있음으로 주인공인가? 그렇지는 않아 보인다. 이게 주인공이구나 싶어 보면 그가 주인공이기 위해 옆의 몸짓이 필요하다. 홀로 주인공이 아닌 기대어 있는 주인공이다. 기대인 주인공은 제대로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가? 그런데 우린 대부분 기대어 있다. 온전히 홀로 행복하지도 못하고 제대로 살아가지만 못한다. 아무도 업는 곳에 가고 싶다는 말을 해도 결국 그를 품고 안아주는 곳은 그를 우리라 부르는 옆의 사람이다. 너를 죽이고 혹은 너의 아픔에 고개 돌리고 살아간다는 것은 부끄러워도 그냥 산다는 것이다. 그런데 말이다. 그런데 바로 이 때 "부끄러움이란 본질로 돌아가야 한다.. 2020. 7. 28. 이전 1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