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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있음의존재론12

'이끔의 주체'와 '따름의 주체' (더불어 철학 시작하기 6) 철학으로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철학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경전이나 신의 가르침에 순응하며 산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순응은 나란 주체를 따름의 주체로 삼을 뿐 이끔의 주체로 살긴 못하게 합니다. 아니라고 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는 그렇게 확신합니다. 철학으로 사는 삶은 자기 이성으로 자기 본질을 이끌어가야 합니다. 물론 그 이끔에 자기 존재는 따라가야 합니다. 그러니 철학으로 사는 삶은 자기 삶에 있어 따름의 주체이며 동시에 이끔의 주체입니다. 이끔의 주체가 알아도 따름의 주체가 따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철학적으로 수많은 이론들이 나오고 그 이론들이 저마다 이상적인 사회를 이야기하고 완전한 자아를 설명하지만 제대로 이루어지긴 어렵습니다. 안다 하여 이끌리지 않습니다. 어느 것이 바른 .. 2021. 6. 14.
더불어 있음의 존재론: '누구임'과 '있음'에 대한 메모 나는 '있다'. 그 사실은 의심할 수 없는 내 있음의 '어쩔 수 없음'이다. 나는 '있다'. 그것도 여기에 있다. 이런저런 의심으로 지금 여기 나를 고민할 수 있지만 결국 나는 여기에 있다. 그런데 그 '있음'이 삶을 살지 않는다. 삶 속 나의 '있음'은 항상 '누군가와 있다'. 그 누군가가 경우에 따라선 사람이고 물건이고 사건이고 역사일 수 있다. 그러나 항상 '누군가와 있다'. 그 누군가와 있으며 동시에 나는 그 누군가에게 '누구'가 된다. 바로 철학의 순간이다. '누구'가 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저 '홀로' 있을 때 '나의 있음'은 '그저 있음'이지만 '더불어' 있을 때 '나의 있음'은 '누구로 있음'이다. 나는 항상 누군가에게 '누구'이다. 나의 '누구임'이 나의 '모두'는 아니다. 그러나.. 2020. 11. 9.
더불어 있음의 존재론 1. 참으로 무엇으로 있는 것에 대하여 이 세상 존재하는 모든 것의 가장 근원적인 바탕이 되는 것을 헬라 사람들은 우시아(Ousia)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을 흔히 일본과 한국에선 '실체'라고 번역합니다. 실체는 다르게 되지 않으며 다른 것에 그 존재를 의존하지 않는 그러한 존재입니다. 라틴어로는 숩스탄씨아(substantia)라고 합니다. 이것은 라틴어로 악치덴스(accidens)라고 불리는 것과 다릅니다. 악치덴스는 흔히 우연히 있다는 의미에서 '우유'라고 번역합니다. 유대칠의 머리 모양이나 유대칠이 사는 곳 그리고 유대칠의 소유하는 것 등은 유대칠의 본질을 다르게 하지 못합니다. 유대칠은 대구에 사는 사람이지만 대구에 사는 사람이란 장소에 대한 서술이 유대칠의 본질은 아입니다. 유대칠은 이 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이 .. 2020. 11. 8.
행복하여라 2 위로가 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복되어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으리니. (마태오 5장 4절) 벗어나기 힘든 무력감에 홀로 슬플 때가 있습니다. 이런저런 사회적 부조리에 무력하게 당하는 자신의 모습에 홀로 슬프기도 합니다. 아무도 자신의 손을 잡고 그 억울함에 더불어 함께 분노하지 않는 그 홀로 됨에 좌절의 슬픔을 느끼기도 합니다. 물론 이별과 같은 매우 개인적인 사정으로 홀로 슬프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개인적 사연의 슬픔도 더불어 옆에서 울어주는 이가 없다면 그 슬픔은 더욱더 깊어집니다. 가만히 생각하면 이 모든 슬픔은 슬프고 싶어 슬픈 것이 아닙니다. 슬퍼지게 된 것입니다. 자발적으로 스스로 손들고 나가서 슬픈 것이 아니라, 슬프고 싶지 않지만 그렇게 된 것입니다. 당한 것입니다. 사회적 부조리는 그것으로 누군가는.. 2020. 11.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