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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읽기

드 샤르댕의 신학에 관하여 말하기 2 '드 샤르댕의 사상사적 위치'

by Daechilyus Ambrosius Magnus 2022. 5. 12.

1. 어디 그뿐이겠는가? 많은 철학자와 신학자의 글이 대중에게 읽히지만 그 참 의미를 따지며 읽기는 쉽지 않다. 굳이 왜 따지며 읽는가? 다시 따질 수 있다. 100명이 앉아서 한 권을 읽어도 어떤 경우엔 100가지 서로 다른 색으로 읽어갈 수 있다. 그리고 그 각자의 색은 그 각자의 삶 속에서 유의미하게 다가오는 그 무엇이기에 아예 오답이라 할 수 없다. 그러나 그렇게 100가지 서로 다른 색으로 읽는다고 해도 어느 정도 교집합이 되는 부분이 있을 거다. 그조차도 없다면, 과연 한 권을 읽었는지 알 수 없다.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도 드 샤르댕의 말이라면 그냥 진리라고 생각하며 읽는 이도 있다. 그는 따지지 않고 그냥 진리를 받을 생각으로 읽는다. 어려운 개념을 따져 읽기 힘들 때는 드 샤르댕의 글에 종종 드러나는 감성적인 문장에 큰 의미를 부여하며 애써 진리를 찾으려 할 수도 있다. 그것도 아니라면, 2022년 지금 최신의 자연과학 성과에 익숙한 어느 자연과학자가 드 샤르댕의 글을 읽는다면, 진리를 찾기 위해 사제 드 사르댕의 글을 읽으며, 큰 감동을 받은 이와 아주 많이 다른 색으로 드 샤르댕을 기억할 거다. 자연과학적으로 당장 동의하기 힘든 부분이 종종 있을 것이다. 포트르 크로포트킨(Pyotr Alexeyevich Kropotkin, 1842~1921)의 글과 사상에 익숙한 이라면 당장 ‘진화(進化)’의 개념에서 드 샤르댕과 서로 다른 길을 가고 있단 걸 알게 될 거다. 포르트 크로포트킨을 높이 평가하는 현대 생태철학자의 눈에도 드 샤르댕의 입장과 자신들의 입장이 같지 않다는 걸 알게 될 거다. 나 역시 그렇다. 나 역시 드 샤르댕의 입장과 나의 입장, 즉 나의 더불어 있음의 철학과 그의 신학은 제법 차이를 가진다는 것이 읽힌다.

 

하지만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의 신학사의 위치는 분명히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18세기 초까지 자연과학은 『성서』의 지배를 받았다. 그리스도교에서 학문이 완전한 자유를 누리지 못했다. 그러나 19세기, 자연과학의 여러 성과가 큰 혁명을 만들어 가고 있었고, 사회 이론에서도 자유주의와 공산주의 등의 다양한 정치철학이 새로운 세상을 대안으로 사람들에게 고민되고 있었지만, 그리스도교는 무력하게 그저 이런 이성의 고민 ‘밖’에 있었다. 다윈에 의하여 제안된 ‘진화론(進化論)’을 제대로 이해하기도 힘들었고, 더는 새로운 세상을 향한 사회 이론을 위해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354~430)의 글이나 스콜라 신학자의 신학 글을 읽지 않았다. 종교는 현실의 고난에 대한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고, 자연과학의 영역에선 그저 옛사람의 이야기에 지나지 않았다. 1992년, 359년이 지나서야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 1564~1642)는 가톨릭교회는 공식적으로 복권됐다. 19세기 이미 상식이 된 천동설(天動說)이 온전히 수용되는데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린 셈이다. 사실 이런 고집은 과거의 이야기이기만 한 것도 아니다. 아직도 일부 그리스도교 신자는 지구의 나이를 6,000년, 오래 보면 12,000년 정도로 보기도 한다. 그 근거는 『성서』다. 46억 년이란 자연과학의 결과보다 그들은 『성서』의 권위에 의지해 무시해 버린 거다. 그런데 이런 식의 무시가 18세기 초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사회 곳곳에 녹아들어 있었다. 이런 고집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일어난 이가 바로 찰스 로버트 다윈(Charles Robert Darwin, 1809~1882)이다.

 

다윈의 부친은 그가 성공회 신부(Episcopal Reverend)가 되길 원했다. 다윈은 부친의 뜻에 대하 케임브리지대학교 신학과에 입학한다. 하지만 그는 신학보다 자기 자신의 흥미에 따라 식물학자인 헨슬로(John Stevens Henslow, 1796~1861)와 지질학자인 애덤 세지윅(Adam Sedgwick, 1785~1873)의 지도를 받으며 1831년 졸업한다. 하여간 그는 신학교 출신이다. 사실 그리스도교가 그렇게 반대한 진화론을 제시한 이가 신학교 출신이란 것도 참 재미있다. 그는 성공회 신부이며 신학자인 윌리엄 페일리(William Paley, 1743~1805)의 『자연신학(Natural Theology)』을 읽었고 많은 영향을 받았다. 페일리는 시계를 처음 보는 사람이라도 그것이 그냥 스스로 생긴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듯이 우주도 복잡한 과학의 원리와 법칙으로 어떤 지적 존재에 의하여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이 지적 존재가 바로 그리스도교의 신이라 그는 믿었다. 요즘 흔히 이야기하는 ‘지적 설계론’을 주장한 것이다. 다윈도 이런 책을 읽으며 영향을 받기도 했었단 말이다. 1831년 최고 성적으로 케임브리지대학교를 졸업하고, 그는 세계 일주를 떠나려 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이를 반대했고, 그런 아버지를 다윈의 선생인 헨슬로는 설득하고 드디어 그는 세계 일주를 떠난다. 그렇게 그 유명한 비글호 항해를 하게 된 거다.

 

신은 ‘고양이’와 ‘사람’ 그리고 ‘지네’를 창조하였는가 그렇지 않으면 ‘고양이’와 ‘사람’ 그리고 ‘지네’는 진화의 산물인가? 다윈 등은 진화의 산물이라 보았다. 이는 곧 신이 사람을 창조하였다고 유럽의 오랜 신앙을 거부함을 의미했다. 하지만 이미 진화론은 여러 차례 제안되었고 더는 자연과학의 흐름을 거부하긴 힘들었다. 힘들었지만, 다윈이 제안한 진화론은 생물학의 상식이 되어갔다. 1859년, 다윈의 『종의 기원(On the Origin of Species)』은 그렇게 세상을 보는 시선을 다르게 만들었다. 19세기 공산주의의 역사에서 너무나 중요한 엥겔스(Friedrich Engels, 1820~1895)와 맑스(Karl Marx, 1818~1883)도 다윈을 모르지 않았다. 엥겔스는 맑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다윈의 사상이 신학의 초석을 흔들었다고 평했으며, 맑스 역시 답장에서 자신의 공산주의의 든든한 초석이 될 수 있다고 평했다. 맞는 말이다. 이제 신학이 사람의 생물학적 기원에 관하여 이야기하지 않은 시대가 열렸다. 그리고 신 없는 사회 진화 이론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가톨릭교회는 1950년 비오 12세 회칙 『인류(Humani Generis)』에서 진화론을 반대하지 않는다고 했다. 물론 반대하였다고 순수하게 자연과학자들이 만족할 만한 긍정은 아니다. 사실 그런 긍정을 종교에 기대하는 건 무리다. 요즘 현대 뇌과학자가 인정할 만한 종교의 영혼 이해가 불가능하듯 말이다. 이제 많은 이들은 ‘천지창조’와 ‘아담과 하와의 창조’에 관한 이야기를 과거와 같이 듣지 않았다. 물론 ‘노아의 홍수’를 과거와 같이 듣지도 않는다. 이제 그리스도교는 자연과학을 지배하지도 어떤 영향을 주지도 못했다. 마찬가지로 이제 사회 이론에서도 어떤 영향을 주지 못했다. 19세기와 20세기, 이제 그리스도교는 현재형 이론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드 샤르댕이 등장하고, 그는 이런 조건 속에서 진화론을 부정하지 않는 새로운 신학을 궁리하였다. 즉 그는 적어도 그 당시 과거형의 기억 속 그리스도교가 아닌 현재형 그리스도교 신학의 이론을 만들어내고 있었던 거다.

유대칠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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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왕산에서 찍은 다람쥐 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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