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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존재론

결국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그것이 내 자유의 시작이다. (더불어있음의철학)

by Daechilyus Ambrosius Magnus 2023. 5. 14.

觀自在菩薩 行 深般若波羅密多時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관자재보살 행 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관세음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수행할 때, 오온(五蘊)이 모두 비어 있음을 깨우치곤 모든 고통에서 벗어났다.”

<반야심경>의 첫 이야기다. 많은 이들은 자기가 생각하는 무엇이 유일의 진리라고 한다. 바로 그것을 사로잡으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 생각한다. 그리고 바로 그것을 유일의 진리라 외친다. 그런데 바로 그것이 우리 삶을 힘들게 한다. 돈이 유일의 진리라고 외치는 이들은 바로 그 돈 때문에 힘들다. 만족을 모르고 채우고 채우며 지쳐가는 게 돈이다. 권력 역시 마찬가지다. 누군가는 권력으로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이도 결국 권력으로 세워지고 무너진다. 신 역시 마찬가지다. 결국 자기 신만이 정답이고 오직 그 신에게 가는 자신의 길만 정답이다. 그렇게 신을 향해 사랑이나 자비니 외치지만 참 외롭게 독불장군이 되어간다. 결국 도시에 살아도 아무도 없는 산에 사는 사람처럼 그렇게 살아가게 되어간단 말이다. 그런데 관세음보살의 깨우침은 이 세상 어느 것도 우리를 해방시킬 수 없단 거다. 모든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비어 있다는 것, 바로 그것을 깨우치고 바로 그 순간 자유를 얻었다는 거다. 돈도, 권력도, 신도 이 세상 어느 철학도 그것이 아집이 되고 나의 존재를 지배하는 순간 독이 된다. 그 독은 자기 자신을 죽이고 다른 이도 죽이는 독이다.

살아가며 만난 가장 독선적인 이들은 대체로 종교인이었다. 그들의 독선은 선의 이름으로 치장하고 있지만, 참으로 차가웠다. 결국 자기 밖엔 답이 없고, 이 세상 아픔은 별것 아니며, 그 아픔 따위 잊고 신을 향한 길로 고개를 돌리는 라는 말을 돌려가며 이야기하곤 했다. 진짜 우리가 구원받아야 하는 곳은 바로 이곳의 아픔인데, 그들은 이곳을 모른다. 아는 듯 말하지만 알지 못했다. 철학자 역시 그러했다. 아픔을 아는 듯하지만, 그 아픔은 책 속 아픔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지금 여기 나의 아픔은 알지 못하거나 무시했다. 결국 종교도 철학도 여기 아픈 나와 더불어 있지 않았다. 나는 결국 홀로 이 아픔을 이겨야 했던 거다.

비우고 보면 보인다. 아픈 이들이 보이고 구원받아야 할 이 현실의 잔혹한 차가움이 보인다. 돈으르도 구원도 해탈도 이루지 못하는 이 차가운 현실에 나 역시 일조하고 있음을 본다. 나도 아픈 누군가에게 차가운 독이었던 거다. 돈에 눈에 멀어서, 권력에 눈에 멀어서, 사상과 종교에 눈에 멀어서 말이다. 너를 보지 못하는 눈감은 나는 나의 욕심으로만 나를 느낀다. 나의 존재는 곧 나의 욕심이고 아집이다. 비우고 보면 그런 나의 차가운 아둔함을 마주하게 된다. 비우고 보면, 모든 게 비어 있는 바로 그곳에서 비어 있어야 할 내가 가득 채우고 살아가는 걸 보게 된다. 아집으로 살아가는 그런 나를 보게 된다. 그런 나를 보고 깨우치는 순간, 바로 그 순간, 내 자유가 시작된다. 내 해탈이 시작된다. 내 구원이 시작된다. 채워진 나를 보는 순간, 덜어내고 덜어내는 나의 걸음을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덜어낼수록 나는 자유롭다. 자유란 나란 존재의 비어 있음, 그 빈 공간에 대한 이름이기에 말이다.

유대칠

[대구에서 온라인에서 철학과 독서 강좌 혹은 개인과외를 이어갑니다. 함께 하고 싶은 분은 0i0-44i4-o262로 문의 문자 주시면 전화 드리겠습니다. 꼭 문자로 통화 가능한 시간을 남겨주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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