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울게 하지 않는 것, 그것이 신앙이다.
- 시에나의 가타리나의 '또 다른 그리스도'(alter Christus) 되기
그저 철저하게 혼자다. 옆엔 아무도 없다. 누군가와 함께 하고 싶다는 것이 간절한 마지막 희망이 된다. 그 사실이 아프다.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을 희망한다는 것이 잔혹한 절망의 이유다. 이렇게 마지막을 마주한다. 혼자 세상을 떠난다. 너무나 아픈 마지막이다. 14세기 유럽의 흑사병 이야기다. 병에 걸렸다는 것은 단순하게 신체의 한 곳이 아프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아픔이나 고통이란 단어로 담기 힘든 절망을 의미한다. 치유의 방법도 없다. 고통을 덜어낼 길도 없다. 그냥 아파해야 한다. 그리고 죽어가야한다.
흑사병은 돌림병이다. 타인에게 전염 된다. 피해야할 그 무엇이 되어 버린다. 누군가에겐 더러운 존재, 거북스런 존재, 피해야 할 존재가 된다. 가족과 이웃이 떠나간다. 혼자가 당연이 된다. 그렇게 철저하게 혼자가 된다. 엄청난 고통 속에 누구도 함께 하지 않는 죽음을 맞이한다.
흑사병에 걸린다는 것은 바로 그러한 외로운 절망 가운데 죽어감이다. 어쩌면 생의 마지막 순간, 그들의 곁을 떠나간 이들이 그리울지 모른다. 가족이 그립고 벗이 그리울지 모른다. 그러면서 이것이 죽는 것이구나 생각할지 모른다. 함께 하는 마지막을 희망할지 모른다. 그 희망이 너무나 아픈 절망의 이유가 된다. 흑사병에 걸린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
21세기다. 지금 우리에게 흑사병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 아니다. 그 병은 이제 우리를 죽이지 못한다. 하지만 그 혼자됨의 아픔은 흑사병이 아닌 또 다른 병으로 우리에게 찾아왔다. 여전히 공포스럽다. 따돌림 당하는 아이를 보자. 그의 옆에 있다 혹시나 자신도 따돌림을 받을까 두려워한다. 그 두려움이 아이를 더욱 더 외롭게 한다. 누구도 손내밀지 못한 상황에 자살이란 이름의 살해를 당한다. 그 마지막을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그 마지막, 그의 머리 속에 이 세상은 무엇일까? 벗도 없고, 손내미는 이도 없는 잔혹한 아픔의 공간이다. 누군가 옆에 있었다면 좋겠다. 그 아이의 마지막 아픈 희망이 절망이 되는 순간, 자살이란 이름으로 죽임을 당한다. 슬프다. 누구도 옆에 있지 않았다. 그냥 고개 돌리고 살아가는 것이 더 편하니까 그리 산다. 따돌림이란 병이 자신에게도 전염될까 두려워하며, 소극적 가해자가 되는 길을 선택한다.
참 아픈 세상이다. 해고 노동자의 고통 역시 다르지 않다. 그 아픔에 공감하며 연대한다면, 혹시 그 해고의 고통이 자신에게도 찾아올까 두려워한다. 전염될까 두려워한다. 더 열심히 가진 자의 편에 선다. 혹시라도 차고 넘친 가진 자의 포도주가 자신의 입가에 떨어질까 하는 기대감과 그 잔혹한 해고의 고통이 전염될까 하는 두려움 사이를 오가며 말이다. 그렇게 소극적 가해자가 되어 고개 돌리고 산다.
따돌림을 받는 아이에게 다가가 말을 건넨다고 무엇이 달라질까 의심해 버린다. 자신의 행동으로 변하는 것은 없다 생각해 버린다. 당연한 일을 했다 믿어 버린다. 해고 노동자와 연대한다고 과연 이 세상이 바뀔 것인가 의심해 버린다. 자신의 고개 돌림으로 달라지는 것은 없다 생각해 버린다. 결국은 바뀌지 않을 세상이라 믿어 버린다. 이미 이렇게 되어 버린 세상이라 믿어 버린다. 모든 것이 결정난 세상이라 믿어 버린다. 그렇게 살아 버린다.
달라지지 않는 세상에서 그저 돈 버는 기계가 되어 살아 버리면 그만이라 믿어 버린다. 나만 아프지 않으면 그만이라 생각해 버린다. 따돌림 당한 아이와 해고 노동자의 자살이란 이름으로 강요된 죽음 앞에서도 그냥 불쌍하다 생각할 뿐 움직이지 않는다. 원래 세상은 그런 곳이라 생각하는 편이 편하기 때문이다. 그냥 순응하고 살아가는 것이 편하기 때문이다. 그게 편하기 때문이다. 참 아픈 세상이다.
예수는 어떠했을까? 예수는 이 잔혹한 전염병 앞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전염될까 두려운 마음에 피했을까? 홀로 외로이 죽어가는 이의 죽음 앞에서 고개 돌렸을까? 14세기 흑사병으로 죽어가는 이들의 앞에 예수가 있다면, 무엇을 했을까? 더럽다 멀리했을까? 21세기 따돌림으로 죽어가는 이들과 해고 노동자로 살아가는 이들의 아픔 앞에서 예수는 무엇을 했을까? 전염이 두려워 피했을까? 신앙이란 ‘또 다른 예수’가 됨이다. 모두가 알 듯 예수는 피하지 않았다. 창녀의 앞에서도 병든 자의 앞에서도 피하지 않았다. 다른 이들의 시선보다 아픈 이의 고통이 먼저였다. 그것이 예수다. 신앙이란 바로 그런 예수의 삶을 따름이다.
시에나의 가타리나(Sancta Catharina Senensis 1347-1380)는 ‘또 다른 그리스도’(alter Christus)가 되려했다. 되자 했다. 14세기 잔혹한 흑사병 앞에서도 그녀는 피하지 않았다. 그들의 마지막을 함께 했다. 그들의 옆에서 기도했다. 흔히 접하는 그녀에 대한 수 많은 글들은 비범한 신비에 집중한다. 흔히 경험하기 힘든 신비스러움과 금욕에 집중한다. 하지만 정말 보아야 하는 것 그리고 들어야 하는 것은 ‘또 다른 그리스도’의 삶에 대한 그녀의 외침이다.
14세기, 1370년의 대기근과 1374년 무서운 흑사병이 수많은 이들을 죽였다. 유럽은 아픔으로 가득했다. 죽음이 일상이 되어 버렸다. 먹지 못해 죽고, 돌림병에 죽고 마지막해 살아 남는 것이 축복으로 생각할 지경이었다. 이때 가타리나는 그 아픔을 떠나지 않았다. 민중의 아픔에 고개 돌리지 않았다. 마음의 아픔도 몸의 아픔도 온 힘을 다해 치유하려 애쓰며 기도했다.
그녀에겐 아픈 이들을 향한 사랑이 곧 신을 향한 사랑이었다. 신의 모상으로 인간이 행해야할 가장 신앙적인 행위였다. 그녀에게 삶의 목표는 하느님을 향한 사랑이었다. 그녀에게 하느님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 등장하는 신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당시 나돌던 마이스터 엑하르트의 신비철학에서 이야기하는 신도 아니었다.
그에게 신은 사랑이다. 신이 우주를 창조한 것은 사랑하기 때문이다. 창조는 사랑의 행위다. 사랑하기 때문이다. 신이 우리를 향한 사랑은 신의 모상인 우리 가운데 있는 이웃을 향한 사랑에서 확인해 볼 수 있다. 사랑을 강제적이지 않다. 신과 이웃을 강제로 사랑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참된 사랑은 자유라는 조건에서 가능하다.
그렇기에 인간은 자신의 이성으로 자유로이 사고하고, 그 가운데 결단해야 한다. 즉 자유결단의 능력을 가져야 한다. 자유는 사랑의 전제 조건이며, 구원의 전제 조건이다. 자유로워야 한다. 그리고 하느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은 우리 가운데 이웃을 향한 사랑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우리 안에 하느님의 모습이 사랑이다. 우리 사랑의 원형이 바로 신의 사랑이다. 그녀의 철학에서 아픈 이를 향한 사랑은 신의 모상으로 인간의 하느님 닮기의 시작이다.
하느님 닮아가기, 즉 또 다른 그리스도로 살기는 ‘신과 하나됨’에 대한 그녀의 생각에서도 읽을 수 있다. 이는 현실을 벗어난 초현실적 신비가 아니다. 어떻게 보면 현실의 고통에 동감하는 철저하게 현실적인 신비다. 가타리나는 신을 남으로 두길 원하지 않았다. '신과 하나됨'을 진리를 향한 길로 믿었다. 그 진리를 향한 첫걸음은 그리스도의 고통이다.
더 정확하게는 고통에 대한 사랑이다. 그리스도의 고통은 영적 삶의 가장 좋은 지침이라 판단했다. 이 세상의 어떤 책보다 더 가치있는 것이라 믿었다. 그리스도의 고통은 철저하게 타자를 위한 것이다. 병이 들어 아픈 것이 아니다. 철저하게 타인을 향한 희생의 고통이다. 신앙이란 바로 이를 따르는 것이다. 신앙은 신을 따름이며, 이는 신과 같이 높은 곳이 가는 것이 아니라, 아픈 이들의 그 아픔을 위한 봉사하고 기도함이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따름이다.
이러한 따름은 ‘또 다른 그리스도’(alter Christus)로 있게 한다. 이렇게 ‘신과 하나됨’은 철저히 타자를 위한 사랑이다. 우리는 예수 십자가의 고통으로 존재한다. 우리도 우리의 헌신으로 타인을 위해 살아가는 것, 그것이 신앙이다. 예수의 사랑이 그러했듯이 우리도 우리의 사랑으로 그러해야 한다.
시에나의 가타리나는 나 자신에 대한 생각, 즉 자기 인식에서 신앙의 삶이 시작된다고 한다. 그 자기 인식은 자기 가운데 하느님을 인식한다는 것이다. 우리 자신이 우리 자신에 의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존재한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다. 신의 모상으로 존재함을 자각하는 것이며, 예수 사랑의 덕으로 존재함을 자각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자기 인식은 무지의 지이며, 데카르트의 자기 인식은 인식 주체의 확신이다. 하지만 시에나의 가타리나의 자기 인식은 자기 가운데 신의 사랑을 자각함이다. 하느님을 인식하는 것이다. 누군가를 이기기 위한 욕망의 주체가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을 자각하고, 그리스도가 그러하였듯이 자기 헌신을 통하여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해야함을 자각함이다. 하느님이 그러하듯이 말이다.
이제 알겠다. 왜 그녀가 그 무서운 돌림병 앞에서 아파하는 이의 마지막을 함께 했는지 알겠다. 그녀의 신비가 무엇인지 알겠다. 홀로 울지 않게 하는 것, 그것이 신앙이다. 철저하게 홀로 아파하며 죽어가지 않게 옆에 서서 그 고통의 벗이 되는 것, 그것이 신앙이다. 그것이 또 다른 그리스도가 되는 길이다.
잔혹한 자본주의와 독한 권력의 앞에 쓰러진 이의 옆에 서는 것, 그 아픔이 전염될까 두려워 고개 돌리는 것이 아니라, 그 외로운 아픔에 다가가 벗이 되는 것, 그것이 신앙이다. 14세기 잔혹함 대기근과 흑사병 앞에 벗이 되어 33년 길지 않은 삶을 살아간 그녀의 참된 신비는 바로 이러한 그녀의 신앙이라 생각한다. 초현실적이지 않은 현실 속 고통 앞에 벗이 되는 신앙, 그 신비가 아닐까 생각한다.
과연 우리의 신앙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시에나의 가타리나의 슬픈 분노 앞에서 우린 고개를 들 수 있을까? 부끄러운 마음에 고개를 숙인다.
유대칠 암브로시오 씀
(가톨릭프레스 2016년 1월 연재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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