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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실 101호실

어떤 대가도 없이 가장 나답게 살기, 그것이 신앙이다.- 스웨덴의 비르지타(Birgitta de Suecia, 1303-1373)

by Daechilyus Ambrosius Magnus 2020. 1. 5.

어떤 대가도 없이 가장 나답게 살기, 그것이 신앙이다.

- 스웨덴의 비르지타(Birgitta de Suecia, 1303-1373)

 

외로운 아픔이 있다. 그 외로움이 얼마나 깊은지 헤아릴 길이 없다. 아프다 마라. 아프다 말하지도 마라. 모진 소리 앞에서 그 외로움은 더욱 더 깊어진다. 얼마나 깊을까 막연히 상상한다. 눈물이 난다. 언어로 담을 수 없는 그 아픔을 그저 눈물로 담아낼 뿐이다. 일제 강점기, 가난한 이의 딸이었다. 오직 그 이유로 잔혹한 시간을 보냈다. 해방 뒤, 돌아온 조국조차 그들을 위한 자리는 없었다. 외로운 아픔이었다. 일본군 성폭력 피해 할머님을 생각하면 그냥 눈물뿐이다. 다른 어떤 것으로도 그 아픔을 담아 낼 길이 없다. 국민을 위한다는 국가권력도 안아주지 않았다. 아프고 힘든 이를 위해 있다는 종교도 안아주지 않았다. 어디에도 있을 곳이 없는 아픔이었다. 외로운 아픔이다. 지금도 말이다.

 

유럽 14세기가 생각난다. 교황과 황제, 종교권력과 국가권력 사이 논쟁이 뜨거웠다. 실재론(realismus)과 유명론(nominalismus)의 논쟁도 대단했다. 하지만 정말 이 시대를 몸으로 살아간 민중에게 14세기는 그저 고통의 시기일 뿐이었다. 대기근과 흑사병이 있었다. 가난한 이의 아픔을 온 힘으로 안아주어야 할 교회는 오히려 모든 악행의 근원이란 말을 들었다. 국가권력 역시 민중은 없었다. 잔혹한 백년전쟁이 있을 뿐이었다. 종교도 정치도 민중의 아픔을 보지 않았다. 공감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 돌리고 앉아, 자신들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14세기 유럽인구의 삼분의 일이 죽어나간 흑사병과 대기근 그리고 전쟁의 고통은 오로지 민중들만의 몫이었다. 어디에도 있을 곳 없는 민중의 아픔은 그저 외로웠다. 가난 속에 죽고 돌림병으로 죽고 전쟁으로 잔혹하게 죽어가도 민중의 아픔은 그저 외로웠다. 종교도 국가도 민중의 아픔을 위한 자리를 두지 않았다. 민중의 아픔이란 어디에도 있을 곳이 없는 아픔이었다. 외로운 아픔이었다. 그때도 말이다.

 

달라진 것이 많지 않다. 여전히 우리네 아픔은 외롭다. 종교도 국가도 안아주지 않는다. 참된 종교는 타인의 고통으로부터 고개 돌리지 않는다. 기꺼이 타인의 아픔을 위하여 함께 아파한다. 아픔을 덜기 위하여 힘든 고난을 기꺼이 선택하는 것이 종교다. 신자들의 힘든 정성으로 세워진 높은 성전에 앉아 좋은 옷을 입고 현실의 고통에 눈감고 하늘만을 향해 기도하는 것이 참 종교가 아니다. 참된 종교는 타인의 아픔을 그저 남의 아픔이 아닌 우리의 아픔으로 기꺼이 나눈다. 그것을 당연함으로 받아들인다. 

 

고통을 나눈다. 그러한 고통의 나눔으로 힘겨운 삶이 온다 해도 기꺼이 기쁨으로 여기는 것이 종교다. 자신의 기쁨을 위해 아픈 이의 외로운 아픔을 더 힘들게 하는 것이 종교가 아니다. 참된 종교가 아니다. 이윤만을 추구하는 기업조차 그리해선 안 된다. 하지만 현실 속 이러한 슬픈 모습을 찾기란 어렵지 않다. 신자조차 종교의 타락을 인간 사는 세상의 일이라며 당연하다는 듯이 이야기한다. 좋은 성직자가 있으면 나쁜 성직자도 있단 식으로 눈감아 버린다. 당연시한다. 슬프다. 이것이 상식이 되어 버렸다. 

 

종교는 아픔이 쉬는 곳, 아픔이 외롭지 않게 하는 곳이어야 한다. 더 외롭게 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 세상의 어떤 참된 종교도 그리하라 하지 않는다, 하지만 14세기도 21세기도 여전히 우리네 아픔은 외롭기만 하다. 쉴 자리도 울 자리도 없다. 

 

14세기 수녀 철학자 ‘스웨덴의 비르지타’(Bisgitta Suecica, 1302-1373)가 떠오른다. 그녀는 국가도 종교도 무시해버린 민중의 아픔을 안아주었다. 외롭게 두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가난을 삶으로 살아온 이가 아니었다. 부유했다. 아버지는 스웨덴 우플란드 지방의 총독이었다. 이것만 보아도 그녀의 어린 시절을 짐작할 수 있다. 가난하지 않았다. 14살의 어린 나이에 18살 청년 울프 구드마르손(Ulf Gudmarsson)과 결혼했다. 네 명의 아들과 네 명의 딸을 두었다. 

 

스웨덴의 비르지타

 

남편은 그녀의 든든한 신앙 동반자였다. 그녀의 딸 중엔 스웨덴의 성녀 가타리나(Catharina)도 있다. 비르지타는 1344년 남편을 여읜 후, 시토회 수녀원에 들어갔다. 그리고 1346년 스웨덴 왕 마뉴스 2세가 바드스테너(Vadstena)에 수도원을 지어 기증하자, 곧 ‘지극히 거룩한 구세주 수도회’를 세웠다. 그녀는 자신의 재산을 정리하여 수도원과 성당을 세워 운영하였다. 또 수도회의 수입 상당수를 가난하고 아픈 이를 위해 사용하였다. 그저 수도원의 공간 속에 머물기보다 현실의 공간 속 아픈 이들의 아픔을 외롭지 않게 하였다. 

 

그녀는 분명 가진 자였다. 가난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그녀의 부유함은 스스로의 기쁨을 위해 사용하지 않았다. 더 많은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이득을 위해 투자하지 않았다. 자신의 기쁨을 위해 타인의 아픔에 눈감지 않았다. 오히려 가진 것을 아프고 가난한 이들의 그 슬픈 아픔을 덜어주기 위해 사용하였다. 기꺼이 그들의 아픔을 위해 스스로의 힘겨움을 받아들였다. 그녀는 그것을 신앙이라 믿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그러한 삶, 대가 없는 사랑의 실천이란 주어진 삶을 살아가는 것이 신앙이라 믿었다.

 

자신을 비우며, 그 비워짐 만큼 가난한 이의 필요가 충족되길 원했다. 그녀는 여러 곳에 병원(hospitalia)을 세웠다. 그리고 직접 아픈 이들을 간호하였다. 아픈 이를 위한 간호를 절대 천하고 힘든 일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고귀한 것이라 믿었다. 아픈 이와 함께 한다는 것, 그것은 참으로 가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가난은 ‘버리는 가난’이 아니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가난과 같다. ‘버림의 가난’이 아닌, ‘공유의 가난’이다. ‘나눔의 가난’이다. 나눔으로 모두의 영혼이 풍성해지는 가난이다. 사실 그녀의 남편 구드마르손은 프란치스코회의 수사가 되길 바랬다. 남편이 이루지 못한 꿈을 이루려는 것일까. 비르지타는 성 프란치스코와 마찬가지로 ‘버림의 가난’이 아닌 ‘나눔의 가난’을 실천했다. 즉, 어떤 대가도 없는 나눔의 삶을 살았다.

 

이러한 삶은 바로 그녀의 철학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만의 신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의 생각은 당대 많은 여성 신비가들에게 영향을 준 엑하르트(Eckhart)와도 달랐다. 고유한 그녀의 것이다. 그녀에게 창조는 피조물을 향한 신의 위대한 사랑, 그 사랑의 실현이다. 우리 모두는 신이 내린 사랑의 결실이다. 엑하르트는 신과 피조물의 존재론적 상호 의존성을 이야기하지만 그녀는 그렇지 않다. 

 

신은 피조물에게 의존되어 있지 않다. 그녀에게 신은 어떤 경우에도 피조물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피조물 없이도 존재할 수 있다. 이런 신의 피조물에 대한 사랑은 신의 필요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신은 어떤 대가도 조건 없이 피조물인 우리를 사랑했다. 그 사랑의 결실이 창조다. 신의 무조건적 사랑의 결실이 바로 우리다. 이처럼 그녀는 독자적인 신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삼위일체에 대한 독자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아우구스티누스를 비롯한 많은 당대 철학자들은 성자에게 지혜를 연결시키고, 성부에게 권능을 연결시키면서 각각의 위격에 하나의 무엇인가를 대입하여 서로 구분하여 이해하려 하였다. 한 분이신 하느님이시지만, 세 분, 즉 서로 다른 세 분을 강조하였다. 하지만 그녀는 달랐다. 한 분이심을 강조했다. 즉, 단일성을 강조했다. 

 

“세 위격이 있으시고, 그 가운데 단 하나의 완전한 신성함이 있습니다. 이 세 위격은 동등하시며, 그 가운데 셋 모두는 그리 있으십니다. 그 셋 가운데는 하나의 의지와 하나의 지혜와 하나의 권능 그리고 하나의 덕과 하나의 자비와 하나의 기쁨이 있을 뿐이십니다.”(Sermo I, 1)

 

삼위의 단일성을 강조하며, 하나의 지혜와 하나의 권능이 있다고 한다. 이 삼위는 어느 하나가 먼저가 아니다. 하나인 이 세 위격은 영원하며, 성부가 성자가 앞서는 것도 성부와 성자가 성령을 앞서는 것도 아니다. 모두가 하나인 모습으로 영원하다. 바로 이러한 하나인 모습으로 완전하며 영원한 하느님 가운데 우주와 인간 존재의 본 모습이 있다. 즉 원형이 있다. 영원한 하느님 가운데 우리 각각의 원형이 있다. 우리 각자가 무엇이고 어찌 살아야하는가에 대한 원형이 있다. 

 

즉 우리 삶의 답이 이다. 이것은 많은 것을 의미한다. 바로 우리가 어찌 살아야할 것인지 그 모범이 영원한 하느님, 한 분이신 하느님 가운데 있단 말이다. 우린 그 한 분 하느님에게 있는 그 본모습에 따라서, 그 주어진 길, 이미 영원 전부터 우리에게 주어진 그 길을 충실히 가야 한다. 나의 본모습이 하느님에게 있다. 가장 ‘나’다운 모습이 하느님 가운데 있다. 가장 ‘나’답게 산다는 것은 바로 그 본모습을 따라 충실히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분의 사랑과 같이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고 자신의 본모습에 충실히 살아감이다.

 

하느님은 오직 우리를 사랑함으로 창조했다. 다른 이유도 다른 목적도 없다. 하느님 가운데 우리의 본모습도 그러한 존재일 것이다. 우리 역시 하느님의 사랑과 같이 그렇게 사랑해야 한다. 아픈 사람이 있다. 가난한 이가 있다. 그들의 아픔을 덜어줌으로 나에게 무엇이 오는 가 계산하지 않는 사랑이어야 한다. 대가 없는 사랑이어야 한다. 그것이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바로 그 모습, 하느님 가운데 있는 우리의 본모습에 따른 사랑이다. 가난한 이의 아픔을 덜어주고 그의 아픔을 외롭지 않게 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우리의 본모습에 따라 가장 우리답게 사랑하는 길이다. 이미 영원 전부터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나’답고 가장 ‘우리’답게 사랑하며 살아가는 존재의 방식이다. 어떤 대가도 없이 자가 우리답게 살아가는 존재의 방식이다.

 

그녀에게 병원을 세우고 가난하고 아픈 이들을 돌보는 것은 하느님 가운데 있는 그녀의 가장 참된 본모습에 따른 가장 그녀다운 삶을 살기 위한 모습일지 모른다. 가장 비르지타다운 삶을 살아가기 위해 그리 살아가는 것인지 모른다. 아니 그럴 것이다. 그것이 그의 철학이니 말이다. 수도자의 원형은 그저 수도원 속에 있지 않다. 가장 수도자다운 수도자는 물리적 침묵만을 강요받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불의에 대하여 분노하는 것이 가장 수도자다운 수도자라 그녀는 믿었다. 그것이 하느님 가운데 존재하는 그분이 원하시는 수도자의 본모습이라 믿었다. 그렇기에 부패한 교회권력을 향하여 소리 높였는지 모른다. 

 

이런 분노는 국가권력 역시 차이를 두지 않았다. 비록 자신을 지원하던 권력자라도 그른 행동을 하면 지원을 거절했다. 라트비아(Latvia)와 에스토니아(Estonia)의 이교도에 대항하여 십자군을 모으던 마뉴스 국왕의 지원을 실제로 거절했다. 이것이 그녀다운 삶이며, 수도자다운 삶임과 동시에 가장 신앙인다운 삶이라 믿었다. 신앙인이라면서 권력자가 주는 지원금 때문에 아픈 이들의 아픔을 보지 않고 그릇된 일에 분노하지 않는다면, 신앙인으로 참된 본모습에 충실하지 않음이니 말이다. 신앙인답지 않은 것이니 말이다. 

 

그녀는 교회의 수장으로 있는 교황에게도 하느님이 영원 전부터 계획한 그 본연의 역할을 강조하며, 주어진 그 길에 충실하라 조언하였다. 14세기 성직자와 수도자 사이 만연한 부패와 윤리적 문제들에 대해서도 스스로에게 주어진 신앙의 삶에 충실하라 조언하였다. 대가만을 바라지 말고 말이다. 오직 자신의 참된 본모습에 충실하라 분노하였다.

 

신앙인이라면 하느님 가운데 자신의 참된 본모습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자기 인식’이 중요하다. 삼위일체 하느님이 영원 전부터 하나의 모습으로 사랑하고, 하나의 모습으로 창조한 우리 현실 삶의 모습이 그분 가운데 있는 우리 삶의 참된 본모습에 충실한지 돌아보아야 한다. 우리의 신앙은 그녀에게 가장 우리답게 존재하는 것이다. 가장 충실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수도자는 수도자답게, 성직자는 성직자답게, 정치권력자는 정치권력자답게 살아감이다. 어떤 대가를 바라지 않고 그렇게 우리답게 살아감이다. 그렇게 존재함이다. 그것이 신앙이다. 가장 자기답게 살아가는 것, 그것이 신앙이다.

 

일본국 성폭력 피해 할머님이 생각난다. 종교인과 정치인이 그들의 참된 본모습에 가장 충실했다면,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고 자신의 본모습에 충실했다면, 그분들의 아픔은 지금처럼 외롭지 않았다. 그럴 수 없다. 용산참사가 생각난다. 종교인과 정치인 그리고 우리 각자가 하느님 가운데 있는 우리의 참된 본모습에 충실했다면, 그분의 아픔은 그렇게 외롭지 않았다. 세월호가 생각난다. 우리들이 가장 우리답게 살았다면, 그런 대참사는 없었다. 아무도 없이 홀로 마지막을 보낸 고독사(孤獨死)와 무연사(無緣死)가 생각난다. 이분들의 아픔도 우리가 우리의 참된 본모습에 충실하였다면 그렇게 외롭지 않았다. 

 

14세기 비르지타의 분노는 여전하다. 과연 우린 하느님이 마련한 그 참된 우리의 본모습에 충실할까? 우린 가장 우리다울까? 자신 없다. 하느님이 우릴 사랑하듯 우리는 타인을 사랑할까? 자신 없다. 부끄럽다. 여전히 많은 아픔은 외롭기만 하다.

 

유대칠 암브로시오 씀

(가톨릭프레스 2016년 1월 연재물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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