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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프레스4

성 프란치스코의 오상 앞에서- 예수는 ‘가난한’ 이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다. 성 프란치스코의 오상 앞에서- 예수는 ‘가난한’ 이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다. 예수는 대단한 사람이 아니었다. 가난했다. 잔혹한 고문을 받았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 대단하지 않았다. 기적의 능력을 가졌다지만, 가난하고 아픈 이를 위한 치유의 기적을 행할 뿐, 스스로를 위해 사용하진 않았다. 자신에게 찾아온 잔혹한 죽음의 고통을 피하지 않았다. 부유함과 권력을 얻으려 애쓰지도 않았다. 높은 곳에 올라 지배하는 권세의 기적보다 낮은 곳의 아픔을 안아주는 치유의 기적을 보였다. 예수는 많이 배우지 않았다. 명문 학교를 나온 이도 아니다. 그리스나 로마로 유학을 다녀온 수재도 아니다. 모두가 인정하는 공간에서 체계적인 신학 교육을 받은 이도 아니다. 그는 가난하고 아픈 이들의 벗으로 있을 뿐이었다. 지상에.. 2019. 9. 26.
아픔 앞에 고개 돌리지마라! 다가가라! 그것이 참 회개의 시작이다.-헤르마스의 분노 아픔 앞에 고개 돌리지마라! 다가가라! 그것이 참 회개의 시작이다.-헤르마스의 분노 ‘아픔’은 책으로 알 수 없다. ‘아픔’이란 단어의 사전적 의미를 이해한다고, 참된 의미를 아는 것은 아니다. 아파봐야 안다. ‘아픔’이 되어봐야 안다. 책이 아닌 삶에서 알게 된다. 책에서 배울 순 없다. ‘번뇌시도량’(煩惱是道場)이란 말이 있다. 산스크리트어 불경을 한문으로 번역한 쿠마라지바의 말이다. 참된 깨우침은 번뇌로 가득한 이 현실의 공간에서 얻어진다는 말이다. 고통과 번뇌로 가득한 이 현실의 공간을 외면하곤 참다운 깨우침을 얻을 수 없다. 현실의 고통에서 고개 돌리고 앉아 그저 책 속에 얻은 깨우침은 살아 숨 쉬는 삶의 참된 깨우침이 아니다. 지금 눈앞에서 울고 있는 이 사람의 아픔 앞에 무력한 깨우침일 뿐이.. 2019. 9. 26.
가난한 이를 향한 조건 없는 사랑, 신앙의 첫 걸음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분노 가난한 이를 향한 조건 없는 사랑, 신앙의 첫 걸음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분노 “제가 여러분을 사랑하였듯이 여러분도 서로를 사랑하세요.” 예수의 부탁이다. 정말 어렵다. 우린 이유 없이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는다. 당연히 이유를 찾는다. 만족시킬 외모나 돈 아니면 권력이나 지식 어느 하나라도 마음에 드는 것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마음이 움직인다. 예수는 그러지 않았다. 그냥 이유 없이 사랑했다. 어떤 유익도 없지만, 대가를 바라지 않고 사랑했다. 우리도 우리를 예수와 같이 사랑할 수 있을까? 예수가 우릴 사랑하듯이 우리가 우리를 사랑한다는 것,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예수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죽음 앞에서 고개 돌리며 내 일이 아니라고 했을까? 가난한 장애인의 죽음 앞에서 내 일이 아니라 했을까? 세월호.. 2019. 9. 26.
아프고 가난한 이의 옆에 작은 빛이 되어라! 그것이 신앙이다.- 치쁘리아누스의 분노 아프고 가난한 이의 옆에 작은 빛이 되어라! 그것이 신앙이다.- 치쁘리아누스의 분노 "돈이면 다 해결된다." 참 슬픈 상식이다. 하지만 무시할 수 없는 현실의 모습이다. 이런 슬픈 세상에서 돈 없고 권력 없는 이는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법과 권력 앞에 작기만하고, 종교의 눈길에선 멀어져 버린 가난한 우리 이웃들은 어찌 살아야하는가? 이미 오래 전부터 정의(正義)를 말하는 법은 돈과 권력을 가진 자의 논리를 대변할 뿐이었다. 가난한 이를 향한 사랑을 이야기하는 종교 역시 사리사욕(私利私慾)에 빠져 아픈 이의 울음을 듣지 않는다. 어찌 보면 법도 종교도 스스로 많은 것을 가지고 누리는 자의 자리에 있을 뿐, 아프고 힘든 가난한 자의 눈물을 보지 않았다. 더 슬픈 것은 이것이 당연한 상식이 되어 가고 있다. .. 2019. 9.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