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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고 가난한 이의 옆에 작은 빛이 되어라! 그것이 신앙이다.- 치쁘리아누스의 분노

by Daechilyus Ambrosius Magnus 2019. 9. 26.

아프고 가난한 이의 옆에 작은 빛이 되어라! 그것이 신앙이다.- 치쁘리아누스의 분노

 

"돈이면 다 해결된다." 참 슬픈 상식이다. 하지만 무시할 수 없는 현실의 모습이다. 이런 슬픈 세상에서 돈 없고 권력 없는 이는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법과 권력 앞에 작기만하고, 종교의 눈길에선 멀어져 버린 가난한 우리 이웃들은 어찌 살아야하는가? 

 

이미 오래 전부터 정의(正義)를 말하는 법은 돈과 권력을 가진 자의 논리를 대변할 뿐이었다. 가난한 이를 향한 사랑을 이야기하는 종교 역시 사리사욕(私利私慾)에 빠져 아픈 이의 울음을 듣지 않는다. 

 

어찌 보면 법도 종교도 스스로 많은 것을 가지고 누리는 자의 자리에 있을 뿐, 아프고 힘든 가난한 자의 눈물을 보지 않았다. 더 슬픈 것은 이것이 당연한 상식이 되어 가고 있다. 참 슬픈 상식이다.

 

세월호는 비극이다. 말로 표현할 수 없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의 비극 앞에서 우린 그저 무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눈앞에서 사랑하는 가족들이 하늘로 갔다. 수학여행을 가던 아름다운 꿈을 간직한 어린 아이들이 하늘로 갔다. 가족 여행을 가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어린 아들도 함께 하늘로 갔다. 제자를 구하겠다며 차디찬 바다로 되돌아간 선생님도 그렇게 하늘로 갔다. 

 

304명의 아름다운 꿈들, 그 많은 미래들이, 그렇게 하늘로 갔다. 남은 이들의 아픔, 그 헤아리기조차 힘든 아픔을 남기고 하늘로 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슬프고 아픈 질문들을 남겼다. 

 

국가는 무엇이며 무엇을 해야 하나? 법은 무엇이고 무엇을 해야 하나? 권력과 정치는 또 무엇이고 무엇을 해야 하다? 우리의 신앙과 양심은 무엇이고 무엇을 해야 하나? 

 

참 잔인했다. 딸의 죽음 앞에서 진실을 위해 단식(斷食)으로 울부짖던 아버지의 눈물을 누군가는 조롱했다. 그 아픔을 공유하기 위해 서명에 동참하는 이도 누군가는 조롱했다. 말로 담을 수 없는 아픈 울분을 안고 삭발하는 어머니의 눈물도 누군가는 조롱했다. 심지어 하늘로 간 그 아픈 영혼들조차 누군가는 조롱했다. 참으로 잔인했다. 그렇게 큰 아픔을 주고도 아직 부족했나 보다. 

 

이런 아픔 앞에서도 가장 먼저 들려오는 이야기는 ‘돈’이었다. 어느 누구도 가족의 죽음을 돈으로 계산하지 않는다. 그것은 슬픔과 아픔에 대한 가장 비열한 조롱이다. 하지만 그 잔혹한 폭력이 자연스럽다. 죽은 가족을 두고 더 많은 돈을 벌려는 광기어린 존재로 그 아픔을 조롱했다. 잔인한 세상이다. 이 사회가 그렇다. 잔인하다. 이것이 현실이다.

 

법도 마찬가지다. 숭고하고 슬픈 죽음 앞에서 잔혹하기만 했다. 법적 기준이라며, 그 숭고한 죽음을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나누었다. 제자를 구하기 위해 자신을 포기한 선생님의 그 숭고함 앞에 너무나 천박했다. 그런데 이것이 현실이다. 

 

종교 역시 잔인하기는 마찬가지다. 남겨진 이들의 눈물, 함께 싸우고 울어야할 그 자리에 종교는 약하기만 했다. 심지어 어느 종교인은 신의 이름을 함부로 거론하며, 아픔을 조롱하기도 했다. 정치를 한다는 이들도 다르지 않았다. 그 아픔을 ‘종북’이라며 모독 했다. 도대체 얼마나 더 아프게 해야겠는가! 잔인하고 잔인하다. 

 

단지 가만히 있으라는 말을 믿었다. 법을 믿고, 정치와 종교를 믿었다. 그리고 이 시대의 양심을 믿었다. 그러나 잔혹했다. 어느 하나도 함께 울지 않았다. 조롱하고, 고개 돌렸다. 참 잔인했다.

 

교부 치쁘리아누스(Cyprianus, 200년?-258년)의 분노가 아프게 다가온다. 그는 권력과 법 그리고 종교가 가난한 이들 앞에서 자신의 욕심만 채우는 광경에 격분했다. 그 격분은 그를 신앙인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그를 분노하게 한 그의 시대는 지금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거의 2000년 전의 일인지 놀랄 만큼 지금과 유사하다. 슬프게도 말이다.

 

 

“법이요. 정의란 이름을 내세워 죄를 저지르고 있지요. 보호 받아야할 죄 없는 이들은 보호받지도 못하고 있어요. 온갖 광기의 싸움 소리만 가득하지요... 이 상황에 누가 나약한 이들을 도울까요? 변호사말입니까? 그도 결국은 썩은 사기꾼일 뿐입니다. 판사요! 그는 판결을 흥정하려 할 뿐입니다. 잘못을 가려 판단하겠다고 그 자리에 앉아 있지만, 실상 그 역시도 가해자로 잘못을 저지르고 있을 뿐이지요. 심지어 판사란 자가 죄 없이 고발당한 사람을 파멸시키기 위해 죄까지 만들어 버리는 걸요.” (<도나뚜스에게>(Ad Donatum) n.10)

 

세월호의 아픔 앞에서 법은 잔혹했다. 기간제교사라며 순직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런 저런 복잡한 법의 논리 앞에서 세월호의 눈물을 바라보지 않았다. 현실의 아픔을 보지 않는 다른 세상의 법이었다. 이것이 진정 지금 이 곳의 법적 정의인가!

 

일제 강점기와 독재 시대, 법은 그저 가진 자의 논리였다. 약자의 자리는 없었다. 그 시대, 법이란 이름으로 아픔을 겪은 수많은 이들의 눈물을 보자. 법은 참으로 무섭다. 

 

어쩌면 치쁘리아누스의 분노처럼 법은 약자의 편이 아닐 수 있다. 가진 자에게 돈과 권력으로 매수되면, 그 법은 정의 앞에 침묵한다. 그러니 가진 자에게 법은 두려운 존재가 아니다. 그저 가난한 이만이 법이 두려울 뿐이다. 

 

“악한 범죄자들이 무죄로 판결되고 처벌을 받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이러니 벌을 무서워하는 이들이 없습니다. 검사나 판사에 대하여 두려움이 없습니다. 돈으로 매수할 수 있다면 어떤 것도 무섭지 않기 때문입니다. 범죄를 저지른 이들이 무죄라고 하는 것 그 자체가 하나의 잘못이지요. 그리고 나쁜 놈들이 자신을 따라하지 못하는 사람을 불쾌히 보고 있어요.”(<도나뚜스에게>, 10)

 

가진 자는 책임지지 않는다. 돈과 권력으로 매수하고 조정하면 책임지지 않을 수 있다. 책임자의 권리는 누리면서 처음부터 책임자의 의무는 없다며 당당하게 소리칠 수 있다. 심지어 이러한 무책임이 특권(特權)이라 착각하기도 한다. 가난한 이의 비판과 외침은 무시해 보인다. 

 

자신들을 따라하지 못하는 무능한 존재들의 듣기 싫은 투정 정도로 여겨버린다. 이러한 치쁘리아누스의 분노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아프게 다가온다. 여전히 많은 이들은 돈과 권력으로 매수하는 것을 큰 특권으로 여긴다. 심지어 그것을 삶의 목표로 삼기도 한다. 하지만 치쁘리아누스는 그리 생각하지 않는다.

 

“고관대작, 부자, 강한 군대를 가진 장수, 화려한 차림의 법관, 막강한 권력을 가진 지배자, 이들을 영광스러운 사람이라 여기지요. 하지만 그들에겐 악을 선동하는 독이 숨어있으며, 웃음 뒤 악한 미소의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재앙을 숨기고 있는 유혹의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마치 독을 간계(奸計)와 기만(欺瞞)으로 치장하여 달콤한 맛을 나게 하여 마시기 좋게 한 것과 같습니다.”(<도나뚜스에게>, 11.)

 

옛날이나 지금이나 많은 이들은 돈과 권력을 가진 자를 부러워한다. 하지만 치쁘리아누스는 부러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독을 숨기고 있는 자라 한다. 선한 웃음을 보이기도 하고, 자신의 아픔이라도 되는 듯이 거짓 눈물을 보이기도 하지만, 실상 그 얼굴 뒤에 독을 품고 있는 이라 한다. 

 

그 독은 독하다. 바로 소유욕이다. 당연히 그 독은 당하는 이에게 잔혹하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다. 이 독은 그 독을 머금은 이도 파괴시킨다. 그러면서 서서히 괴물이 되게 한다. 

 

“부자라는 인간들은 지금도 자기 토지를 쉬지 않고 늘이고 있습니다. 또 그 인간들은 가난한 이들을 쉬지도 않고 계속해서 밖으로 또 밖으로 몰아내며 계속 토지를 늘이고 있습니다. 이제 그렇게 부자가 되고 보니 은과 금이 큰 걱정거리가 되었습니다. 땅 속에 많은 재산을 묻어두지만 불안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도둑이 자신의 소유물을 가져가면 어쩔까 불안해합니다. 강도가 해치면 어쩔까 불안해합니다. 더 많은 토지를 가진 부자가 시기심을 품고 싸움을 걸어올까 걱정하고 불안해합니다. 이러니 이들은 편하게 먹지도 자지도 못합니다.”(<도나뚜스에게> 12.)

 

법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매수하면 그만이다. 가난한 이의 외침도 무시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이들 역시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 바로 다른 이의 소유욕이다. 가장 두려운 것은 더 강한 권력과 돈을 가진 이의 소유욕이다. 

 

자신의 것을 가지려 하면 어쩔지 두려워한다. 이러한 두려움이 커지면 커질수록 더욱 더 많은 것을 소유하려 한다. 더 강한 권력과 더 많은 돈을 가지려 한다. 그렇게 두려움을 이기려 한다. 슬픈 세상이다. 소유욕이란 독은 점점 더 무서운 괴물을 만들어 버린다. 

 

세월호와 용산 그리고 쌍용차 등 이 땅의 수많은 비극을 보자. 그 비극 가운데 가진 자는 혹시나 자신의 것이 빼앗기면 어쩔지 오직 그것만 두려워한다. 그리고 그 두려움이 더욱 더 사태를 심각하게 만든다. 사태는 점점 더 괴물이 된다. 

 

이런 세상에서 신앙은 무엇을 해야 할까? 법도 권력도 함께 하지 않은 가난한 이의 아픔에 함께 해야 한다. 눈치를 보거나 매수되지 않고 가난한 이의 아픔과 분노를 공유해야 한다. 신앙이란 그러한 것이다. 철저하게 현실적이고 철저하게 초월적이어야 한다. 

 

철저하게 현실 속 가난한 이의 아픔을 마주해야 한다. 하지만 현실 속 그 돈과 권력의 논리에서 초월해야 한다. 절대로 그 반대가 되어서는 안 된다. 철저하게 현실 속 돈과 권력의 논리를 마주하고, 철저하게 현실 속 가난한 이의 아픔을 초월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신앙이 아니다. 이것은 치쁘리아누스가 그토록 비판한 돈과 권력에 매수당한 이와 다르지 않다. 똑같다. 신앙은 어떤 식으로든 소유욕이란 독을 머금을 수 없다. 소유욕과 신앙은 한 배를 탈 수 없다. 그 근본이 다르다. 신앙은 우리의 본질에 충실하라하고, 소유욕은 우리의 본질에서 벗어나라하기 때문이다.

 

"우린 아무 것도 이 세상에 가지고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가지고 갈 수도 없습니다. 그저 먹을 것과 입을 것으로 만족하세요. 부자가 되려고 하지 애쓰는 사람은 유혹에 넘어가고 덧에 걸리고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사로잡혀 파멸에 빠지게 됩니다. 탐욕은 모든 악행의 근원입니다. 그 탐욕을 따라 다니면 신앙의 길에선 벗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는 결국 격심한 고통을 당하게 되어있습니다."(주의 기도문 19)

 

우린 원래 가난하다. 가난이 우리의 본질이다. 소유가 아닌 공유로 존재하는 것이 우리의 본질이다. 가난과 공유를 거부하는 소유욕, 그 탐욕이 파멸의 시작이다. 이 탐욕은 신앙과 함께 할 수 없다. 

 

공유, 즉 나누어가진 것에 만족하지 않고, 더욱 더 많은 것을 소유하려 하면, 공유의 질서는 무너진다. 소유욕은 공유물에 대한 도적질이다. 결국 누군가의 고통을 일으키게 된다. 그 고통이 당장 자신의 눈에 보이지 않아도 말이다. 

 

"사도들은 재물에 욕심을 내지 말라 가르치고 그 가운데 모든 악의 시작이 있기에 그것이 위험하다고 가르쳤습니다. 그 재물이란 놈은 우리 인간 정신의 눈을 멀게 하여 악에 빠지게 합니다. 자기 재산에 정신을 다 빼놓고 그 재산만 보고 즐거이 웃는 어리석은 이를 두고 하느님은 화를 내십니다.”(주의 기도문 20)

 

사도들은 우리에게 욕심을 버리라 한다. 소유물에 눈이 멀면 악이 시작된다. 그것은 신이 바라는 신앙이 아니다. 오히려 신은 그러한 삶에 진노(震怒)할 것이라 치쁘리아누스는 경고한다. 가난이란 현실적 아픔 앞에 초월하고 돈과 권력의 눈치를 보며 그들의 논리를 따르는 신앙으로 신을 기쁘게 할 수 없다. 그것은 절대 바른 신앙이 아니다. 

 

신은 돈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거대한 성전 건물이나 돈 그리고 권력에 매수당하지 않는다. 신은 소유욕이란 독으로 가득한 존재가 아니다. 그런 신을 따르는 것이 신앙이다. 신앙은 돈과 권력에 매수되지 않아야 한다. 그래야 한다. 돈과 권력 앞에 침묵해선 안 된다. 

 

세월호의 슬픔 앞에서 현실 속 그들의 아픔을 마주해야 한다. 그리고 함께해야 한다. 권력과 돈의 논리에 의하여 고개 돌리는 것은 신앙이 아니다. 이러한 침묵은 이미 신앙이 아니다. 아프고 가난한 이의 눈물을 보아야 한다. 그들의 울음을 들어야 한다. 그들의 분노에 함께 해야 한다. 

 

그것이 신앙이다. 돈에 눈이 멀고, 권력이 두려워 침묵해선 안 된다. 그것은 신앙이 아니라, 그저 소유욕일 뿐이며, 사업의 또 다른 형태일 뿐이다.

 

“가난한 이에게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하느님께 드리는 겁니다. 가장 작은 이에게 베푼 사랑도 하느님에게 드리는 겁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느님에게 영적으로 감미로운 향기가 있는 제물을 바치는 겁니다.”(주의 기도 33)

 

신이 원하는 것, 가장 아름다운 선물이라 여기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가난한 이과 함께 함이다. 법과 권력도 보지 않는 가난한 이의 아픔에 함께 함이다. 이것이 가장 아름다운 선물이다. 

 

참된 신앙이라면 세월호의 슬픔, 용산과 쌍용차를 비롯한 수많은 현실의 슬픔과 그 아픔과 슬픔을 공유해야 했다. 그들의 아픔이 외롭지 않게 해야 했다. 법도 정치도 권력도 함께 하지 않은 이의 옆에서 함께 울고 분노하는 것이 신앙이기 때문이다. 신앙이란 그러한 것이다. 

 

신앙이란 그저 기도문을 반복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아야 한다. 실천해야 한다. 그저 신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라고, 모두가 잘 살게 해 달라고 떼쓰는 것이 기도가 아니다. 그것이 바른 신앙이 아니다. 실천하고 그 실천의 힘이 되어달라고 하는 것이 신앙이다. 신앙은 복잡한 논리와 이론 그리고 지식이 아닌 실천이다.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라는 기도는 하느님이 원하시는 대로 그냥 그대로 하시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우리가 실천할 수 있게 도와달라는 뜻입니다."(주의 기도문 14)

 

실천! 그것이 기도이고 신앙이다. 그것이 가난하고 아픈 이들을 위하여 이 땅에 온 예수의 뜻을 이어가는 삶이다. 이것이 신앙이다. 두꺼운 이론서 속에 있는 것이 신앙이 아니다. 

 

예수의 삶은 예수가 유명 대학을 나오고 엄청난 정치적 권력을 가지고 막대한 돈을 가지고 있어 구현된 것이 아니다. 가난한 이를 향한 사랑과 그 사랑의 실천, 그것이 필요하다. 실천해야 한다. 실천하지 않은 신앙이란, 결실 없는 나무와 같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는 베어 불에 던져지듯이 실천의 결실이 없는 기도는 하느님께서 즐겨 받아주지 않습니다.”(주의 기도문 32)

 

하느님의 빛이 우리 안에 거하는 것이 신앙이다. 그 빛은 어둠의 시간에 더욱 더 빛난다. 소유욕으로 가득한 세상, 독을 품은 이들이 누가 더 독해지는지 경쟁하는 시대, 이러한 시대에 신앙을 가진 이는 하느님의 빛을 가지고 더욱 더 빛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신앙의 실천, 가난한 이와의 공유라는 실천이 밤을 더욱 더 환한 대낮으로 만든다. 이론이나 돈과 권력에 대한 논리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주님의 빛 가운데 머무는 우리는 은총을 받은 이후 항상 그 상태를 유지해야 합니다. 그리고 밤을 낮이라 생각합시다. 우리 안에 빛이 있음을 신앙으로 받아드리고, 우리가 피한 어둠에 또 다시 우리의 신앙이 방해 받지 않게 합시다... 밤에도 낮과 같이 깨어 있으세요.”(주의 기도문 36)

 

우리의 신앙이란 빛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세월호의 아픔을 생각해 보자. 1년도 더 지났다. 그러나 아픔은 더욱 더 깊어지고, 그 아픔은 이제 분노가 되어있다. 그 아픔과 분노가 외롭지 않게 하는 것, 홀로 외로운 밤에 울고 있는 것이 아니라, 손잡고 함께 울고 있는 ‘우리’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신앙이다. 

 

법과 정치도 권력도 이 세상의 무엇도 손잡지 않고 그들의 뜨거운 아픔 앞에 차가운 물세례를 준다 해도, 함께 그 차가움을 이겨내는 그 ‘함께’ 함이 신앙이다. 세월호 앞에 우리의 신앙은 무엇이었나? 그저 법과 권력 그리고 돈으로 돌아가는 세상의 잘못이라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나 그 아픔을 외롭게 한 것은 아닌가? 침묵하고 있던 것은 아닌가?

 

“빛의 자식에게 밤은 낮입니다. 마음에 빛을 품고 있는 이에게 빛이 없을 때가 언제일까요? 태양이며 대낮이신 그리스도를 품은 이에게 태양과 대낮이 아닌 때가 언제일까요?”(주의 기도문 35)

 

여전히 치쁘리아누스의 분노는 우리에게 화살로 다가온다. 세월호와 용산 그리고 쌍용차의 비극들... 그 이외 수많은 이 땅의 아픔 앞에서 신앙의 빛은 어둠 가운데 빛나고 있었나? 그들의 외로움 옆에 작은 빛이 되고 있었나? 오히려 보이지 않는 어둠의 저편에 숨어 있진 않았나? 

 

혹시 작은 빛이라도 어둠 속에 들킬까 숨기진 않았나? 돈과 권력으로 움직여지는 세상이라며 그냥 고개 돌리고 숨어 버리진 않았나? 그들의 돈과 권력에 두려워 숨진 않았나? 우리 신앙의 빛이 어둠 속 울고 있는 이에게 빛으로 다가서긴 하였나?

 

오늘 치쁘리아누스의 분노가 아프게 다가온다. 그리고 세월호가 남긴 그 질문 앞에서도 고개를 들 수 없다. 나의 신앙은 무엇일까? 무엇을 해야 했을까? 고개를 들 수 없을 정도로 아프게 다가온다. 매우 아프다. 나의 신앙은 너무 게으르고 부족했다. 슬프게도 말이다.

 

지금도 세월호의 아픔은 끝나지 않았다.

 

유대칠 암브로시오 씀

가톨릭프레스 연재 글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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