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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실 101호실

'스콜라철학은 왜?' 중세 스콜라 철학 강의 1 (2020.03.17)

by Daechilyus Ambrosius Magnus 2020. 3. 17.

유대칠 암브로시오의 '중세 스콜라 철학 강의'

 

1강 왜 ‘스콜라 철학’을 하는가?

 

스콜라철학은 흔히 가톨릭교회의 신학자 혹은 가톨릭교회를 옹호하는 전문철학자들의 것이라 하여, 한 동안 철학계(哲學界)에서도 제법 비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질송의 중세철학 관련 책을 읽으면서, 이것이 무신론자 혹은 가톨릭교회, 크게는 그리스도교회 밖에선 도대체 무슨 뜻을 가지고 다가오는지 혹은 있는지 의문을 가진 이들이 많았습니다. 어찌 보면 당연합니다. 신 존재 증명이라 것도 신 자체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 이들에겐 흥미로운 논리 싸움이나 배부른 신앙인의 사치스러운 언어유희 그 이상 어떤 의미도 없어 보였을 것입니다. 거기에 스콜라철학은 흔히 ‘신학의 시녀(Ancilla Theologiae)’라고 부르기도 하니, 주인에 대하여 고민하기도 바쁜데 시녀에 대하여 굳이 무슨 신경을 쓸 것인가 혹은 스콜라 철학 자체가 노예의 의지 이외 스스로 주인이 되어 이룬 것은 무엇인가? 이런 것을 의미하고 때론 부정하고 의심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이 역시 생각의 힘, 지력을 가진 사람의 당연한 태도입니다. 정말 스콜라 철학이 신학의 시녀라면, 스콜라 철학 자체는 무엇을 한 것일까요? 시녀는 시키는 일만 할 뿐입니다. 스스로 무엇을 결단하지 못합니다. 노예란 그러한 존재입니다. 노예는 주인에 의하여 그의 삶이 결정날 뿐입니다. 스스로는 그저 있을 뿐,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하지 못하며 읽는 그런 서글픈 있음입니다. 스콜라 철학이 정말 가톨릭교회의 어용 전문철학자의 철학이고, 그리스도교회 밖에선 쓸모 없으며, 신학의 시녀일 뿐이고, 신학이 주는 것만을 수행하는 노예일 뿐이라면, 어찌 스콜라 철학을 연구하겠습니까? 스스로 온전히 철학으로 독립하여 주체적으로 있지도 않은 철학인데 말입니다. 

 

학문(學問)이라 함은 그 본질로 보아 자유로운 것이어야 합니다. 자유롭다는 말은 다른 것에 종속되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학문이 돈에 종속되고 권려게 종속되니, 한때 거짓과 위선의 교과서를 쓰겠다는 학자들이 있었고, 거짓 정책을 지지한다는 학자들도 있었습니다. 돈과 권력이 그들의 지식을 지배한 것이지요. 사람이 가지는 고유한 생각하는 힘, 그것을 포기하고 그냥 그렇게 노예 짓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스콜라철학도 그러한 것일까요? 스콜라철학은 노예 짓이며, 저와 같이 스콜라철학을 연구하고 공부하고, 이를 한국어로 번역하는 이들은 하나 같이 노예의 노예 정도일까요? 이번 강의로 여러분에게 이러한 생각에 작은 변화라고 있을 수 있다면 참 좋겠다 싶습니다. 물론 가톨릭 신학, 크게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가진 분들의 철학의 토대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것은 더 할 것 없는 바람입니다. 

 

연구에서 벌써 자유를 상실하였는데, 자유 없는 철학이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가질까요? 우린 지금 왜 스콜라 철학을 공부해야하고, 우린 지금 왜 스콜라 철학이 궁금하여 이렇게 지금 저의 글을 읽고 있는 것일까요? 가톨릭교회의 관계는 사실 아주 큰 세계사적 흐름 속에서 다루어져야 할 부분이 있어 이후 차근히 다시 더 자세히 다룰 것입니다. 그 전에 본 강의가 시작되기 이전에 스콜라 철학에 대한 오해와 억울함에 대하여 몇 가지만 거론하고 시작하려 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지중해 연안 중세는 거의 1000년입니다. 오랜 시간 중세철학이라고 부르면 흔히 서유럽의 가톨릭교회만을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스콜라, 즉 학교에서 체계적으로 철학이 다루어지고 연구되어진 것은 지중해 일반의 기본적인 모습이었습니다. 최초의 대상이란 것도 사실 이슬람 지역에서 시작되었고, 대학 형석에 큰 영향을 준 철학의 기반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잘 다듬어 전한 것은 이슬람 철학자들입니다. 즉 이슬람 철학은 스콜라 철학의 외부에 있지 않습니다. 그 안에 있습니다. 그것도 아주 아주 깊은 곳에 핵심을 이루는 물음들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신앙’과 ‘이성’의 조화입니다. 믿는다는 것과 안다는 것의 조화입니다. 안다는 것은 따지고 들어 안다는 것입니다. 이해하기 위해 사람의 편에서 치열하게 고민하여 알게 된다는 말입니다. 사람의 주체성을 긍정하는 것이지요. 반면 믿는다는 것은 수동적입니다. 하느님을 향하는 마음, 하느님을 향한 이끌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앙의 사실 가운데 상당수는 이성으로 온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것들이 있습니다. 따지고 들어 이해하려 노력해도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지요. 그러나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계시와 그 계시 가운데 권위를 인정받은 경전을 통하여 그것을 수용합니다. 신앙의 영역으로 그것을 참된 것으로 받아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성은 온전히 무시하고 신앙만 내세우면 아주 독단적인 종교가 됩니다. 그런데 이성만 인정하고 신앙을 무시한다면, 그 신앙은 신앙이라기 사람의 독선적인 행위에 그치게 됩니다. 즉 어느 하나를 제외하면 독단과 독선에 빠진다는 것이지요. 조금 더 쉽게 이야기하면, 신앙만 앞서면 이 사회의 악도 그 종교의 좋음을 위해서는 선이 됩니다. 악한 이들의 종교가 그들에겐 신앙적으로 좋은 것이 된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면 사회 속에서 악세포와 같은 존재들이 스스로 거룩하다 여기며 지내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스콜라철학은 이러한 것을 막아 줍니다. 신앙이 홀로 자기 고집하면 이성적이지 못하고 욕심 가득한 자기 구원욕구에 머물게 됩니다. 이것을 스콜라철학은 오랜 시간 부정하고 제지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당장 배고파 죽어가는 이에겐 교육보다는 빵 한 조각을 주어야한다는 것이 토마스 아퀴나스였습니다. 현실을 모르지 않습니다. 이런 점에서 스콜라 철학은 가톨릭 신앙이나 그리스도교 신앙을 가진 이들에겐 유익한 것을 많이 전해 줍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 신앙이 아닌 이들의 철학에도 많은 것을 전해 줍니다. 예를 들어, 차후 강의할 때 다루겠지만, 국제법 등이 바로 그러한 것입니다. 그리고 철학사에 사용되는 많은 철학의 용어들은 하루 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중세 1000년 서유럽과 동유럽 그리고 이슬람과 유다의 철학자들이 고민하며 만들어진 협업의 결과, 더불어 있음의 결과입니다. 당장 우리는 신앙과 이성이라면 서유럽의 가톨릭 교회의 중세, 그 중세의 스콜라 철학에서 이루어진 것만을 생각하지만, 아닙니다. 이슬람의 중세 철학에서도 정말 치열하게 다루어졌고, 이는 서유럽의 중세철학에도 상당한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렇게 중세 스콜라 철학이란 이름으로 이들이 서로를 하나된 무엇으로 인식하지 않았지만, 지나온 뒤 지금 우리가 돌아보면 우리가 사용하는 많은 철학의 언어와 고민 등의 근거엔 그들이 종교와 지역을 초월하여 1000년 간 더불어 만들어간 그 철학이 있었습니다.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 그리고 데카르트의 사유에서 근대를 이야기하지만, 그들의 사유 깊은 곳에서 저와 같은 이는 중세를 읽어냅니다. 그들 스스로 어찌 생각하든지 상관없이 이미 그들은 중세 철학의 성과, 중세 스콜라 철학이란 토대를 온전히 무시할 순 없었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철학의 언어, 그리고 우리가 일상 속에서 경험하는 여러 철학의 성과들, 국제법이니 국민주권이니 등등등 여러 곳에 중세 스콜라 철학의 노력이 녹아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철학의 성과, 철학의 선배들이 이룰 그 성과를 그저 과거의 것이라거나 가톨릭교회 전문 철학이라며, 잘 알지 못하는 성급한 선입견 속에서 만들어진 책자나 글귀에 속아 돌아보지 않는다는 것도 슬픈 일입니다. 돌아보며 지금은 확인할 때 사실 더욱 더 단단하게 우린 지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설사 아무리 부정해도 그 부정하고 싶은 과거 역시 나를 구성하는 일부이니 말입니다. 정말 나를 구성하는 일부 말입니다. 실패한 첫 사랑의 설레임과 순수함은 과거이지만, 지금 나를 구성하는 소중한 한 부분이지 않은가 말입니다. 이런 저런 이유를 떠나 그런 의미에서도 스콜라 철학은 인류의 공통된 소중한 과거, 우리 선배들의 노력입니다. 지금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많은 것에 녹아든 그런 노력말입니다. 

 

스콜라철학은 추상적인 학문이라구요. 그것이 싫은 이유라구요. 사실 저는 요즘 유물론자의 철학자들도 매우 추상적인 학문으로 다가옵니다. 추상이란 구체적 현실에 대한 경험으로 사람의 생각에 머물게 된 생각의 조각이 되면서 만들어집니다. 구체적 현실에 대한 경험은 그때 그때 다양하고 다릅니다. 그러나 그 다양하고 다름 가운데 하나 된 어떤 공통된 것, 어떤 같은 것을 잡아내는 것이 추상입니다. ‘사람’이란 것도 저마다 다 다른 모양으로 생긴 것이 사람입니다. 누구는 키가 크고 누구는 키가 작습니다. 누구는 눈이 크고 누구는 눈이 작습니다. 누구는 다리가 길고 누구는 다리가 길지 않습니다. 정말 저마다 다릅니다. 그런데 그 다른 다양한 사람들을 경험하고 우린 ‘사람’이란 하나의 단어를 떠올립니다. 추상화한 것이지요. 그런데 이러한 추상화된 것으로 사용하는 철학이 어쩌면 철학입니다. 우린 ‘사람’이란 하나의 추상화된 개념을 이해함으로, 그리고 그 개념을 어떻게 정의하는가에 따라서, 구체적 현실 속 ‘사람들’에 대한 입장과 태도를 결정합니다. 스콜라 철학은 구체를 떠난 근거 없는 관념 싸움을 한 것이 아닙니다. 사실 그 관념들은 구체적 현실로부터 추상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추상된 관념에 대하여 고민하고 궁리하였습니다. 그리고 입장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이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철학의 갈래가 형이상학입니다. 형이상학은 모든 있는 것들, 다양한 있는 것들 가운데 가장 고유한 있음의 문제를 다루니 말입니다. 그런데 일상 속 있음 자체에 대한 어떤 고민도 쓸모없어 보이지만, 사실 그 문제가 사람의 있음과 동물의 있음 등에 대한 태도를 결정합니다. 그리고 그 결정이 윤리학과 정치철학에서의 행복과 질서 그리고 도덕적임에 대한 태도도 결정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린 바로 그러한 윤리학과 정치철학이 지배하는 세상을 삽니다. 그러니 당장 느껴지는 구체적인 바로 이것에 대한 학문은 아니지만, 추상적인 것에 대한 학문이란 것은 스콜라 철학에 대한 비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철학의 운명에 대한 어설픈 조롱은 아닌가 생각하기도 합니다.    

 

스콜라 철학은 우리 자신을 영혼론(De anima)이란 이름으로 혹은 윤리학(Ethica)이란 이름으로 다루었고, 우리 자신을 포함한 거대한 자연을 자연학(Metaphyscia)이란 이름으로 다루었으면, 우리 존재의 원인으로 그리고 존재하는 모든 것의 근거에 대한 고민을 신학(theologia)라는 이름으로 다루었습니다. 또 모든 있는 것에 대하여 형이상학(metaphysica)라는 이름으로 다루었습니다. 또 최대한 논리적으로 사유하고 토론하기 위하여 치열하게 논리학(logia)을 연마하고 궁리하였습니다. 우리 자신의 영혼, 우리의 생명에 대하여 관심 없어도, 윤리에 대하여 관심 없어도, 우주 자연에 대하여 관심이 없고, 모든 있음의 원인에 대하여 관심이 없어도, 심지어 있는 그 자체에 온전히 관심 없어도 돈 있으면 잘 살 수 있는 세상입니다. 그러니 돈 버는 일이 더 소중하고 더 고귀해 보입니다. 그것만이 유일한 쓸모로 보입니다. 그러나 스콜라 철학은 돈이 아닌 또 다른 것, 돈을 고민한다 해도, 그 돈이 사회 속에서, 즉 윤리적 가치 속에서 어떤 것인가를 고민하고 염려하였습니다. 사실 이미 13-14세기에서 돈에 대한 진지한 연구들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스콜라철학입니다. 그 가운데 신비주의도 있지만, 광신주의가 아입니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신비주의입니다. 그 가운데 물론 지금 우리의 눈엔 부족해 보이는 것도 있습니다. 그것은 이후 그것을 보강하여 지금 우리에게 뜻있는 것으로 만들 지금 우리 철학함의 숙제이지 지금 우리와 다른 시대를 산 그들에 대한 조롱이나 비판이 된다면 그것도 서글픈 조롱입니다. 

 

우리 자신(영혼-영혼론)과 우리를 포함한 우주 전체(자연-자연학)와 그 우주 전체의 근원(신-신학) 그리고 그 있음(있음-형이상학)을 궁리하는 것, 바로 그것이 스콜라 철학입니다. 

 

오늘 첫 강의였습니다. 모두의 삶에 당당한 행복이 가득하길.

 

2020.03.17 유대칠 암브로시오 (토마스철학학교 오캄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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