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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실 101호실

철학의 '여유' 스콜라 철학 강의 3 (2020.03.19)

by Daechilyus Ambrosius Magnus 2020. 3. 19.

3강 철학의 ‘여유(餘裕)’

 

‘철학(哲學)’이란 것에 ‘스콜라’ 철학이라며, ‘스콜라’라는 수식어로 수식될 때에는 그 ‘스콜라’라는 말의 의미가 매우 중요합니다. 헬라말 ‘σχολή(스콜레)’는 ‘여유’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말입니다. ‘여유’로운 사람은 고단한 삶으로부터 한 걸음 떨어져 그 삶을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육체적 노동에 있어 고통의 주체가 되어 버리면 자기 삶을 한 걸음 떨어져 볼 수 없습니다. 당장 그 고단함을 이기고 일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기원 전 1000년 전쯤, 유럽의 북쪽과 서쪽으로부터 서서히 철기 시대가 시작됩니다. 갑자기 완성된 것이 아니라, 서서히 거의 500년에 이어져 확대되어 갑니다. 농기구와 무기가 서서히 철기가 됩니다. 이 말은 더 많은 것을 생산할 수 있고, 더 강한 무기를 가지게 되었다는 말이 됩니다. 그 이전 사람들의 단순한 삶은 이제 조금 더 복잡해집니다. 채집이나 사냥 같은 것으로 살아가는 이들은 삶이 복잡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자신과 자신의 가족이 먹을 것을 구하면 특별히 큰 활동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더 많은 것을 생산하고, 그 생산한 것을 서로 사고 팔면서 사회는 더욱 더 복잡해집니다. 사고 파는 과정에서 사람들은 더 많이 가진 이와 덜 가진 이로 나누어지고, 이들 사이 정의에 대한 고민도 깊어집니다. 과거 그냥 자연의 이치에 따라서 사냥하고 채집하던 삶과 달라진 삶이 그들을 생각하게 하였습니다. 무엇이 행복이고 무엇이 잘 사는 것, 혹은 잘 있는 것인지 생각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도 삶의 여유가 있는 이에게서 시작됩니다. 당장 노동의 현장에선 그 노동의 고단함에 집중할 수밖에 없으니 보편적인 것에 집중하기보다, 개체적인 것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 배추 키우고 고추 키우고 소 키우는 일에 집중하기에 바쁘고 힘듭니다. 이런 개별적인 사례에 집중하기 바쁩니다. 행복 그 자체,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는 어떤 행복에 대하여 궁리하고 고민하기 힘듭니다. 싯다르타의 경우를 봅시다. 그는 권력자의 자식으로 노동의 고단함을 모르고 살았습니다. 그렇기에 보통의 사람들에겐 너무나 당연한 생노병사(生老病死)의 순간들이 고난의 순간으로 다가왔고, 그에 대하여 궁리하기를 다짐할 수 있었습니다. 여유란 이와 같이 한 걸음 떨어져 볼 수 있게 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플라톤도 삶의 고단함, 그 고단함의 공간이 궁리함의 공간이었지, 육체 노동의 현장에 있진 않았습니다. 어쩌면 이 점에 철학이 가지는 한계입니다. 철학은 오랜 시간 여유로운 이들이 해왔습니다. 삶의 치열한 구체적 고난의 공간에서 한 걸음 떨어진 곳에서 그 구체적 고난들을 싸잡아 바라보는 어떤 보편적 무엇인가를 고민했습니다. 그런데 말이죠. 그러니 잘못하면 그 보편이 개체적 혹은 구체적 고난으로부터 완전히 떨어져 고난의 주체인 민중의 편에서 보면 그저 가진 자들의 생각놀이 정도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니 종종 철학을 말장난이라며 조롱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철학은 더욱 더 열심히 구체적 고난의 공간으로 들어가 그곳의 문제를 고민하며 그 구체적 고난들을 싸잡아 바라는 보편적 희망의 디딤돌을 만들기를 포기할 순 없습니다. 각각의 고난, 그 고난의 공간들이 가지는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더불어 나아갈 어떤 보편적인 이상향을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인권과 같은 것이 그렇습니다. 누군가는 인권과 같은 보편적인 것을 궁리해야 합니다. 그리고 구체적 고난의 공간에서 억울하여 다투다보면 바로 그 보편적 가치들의 소중함을 더 절실하게 알 될 것입니다. 철학은 바로 그 보편적 고난에 대하여 고민하는 사람의 애씀입니다. 나쁜 여유가 아니라, 착한 여유 속에서 그 구체적 삶들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이들의 애씀입니다.

 

여유 있는 이들은 그저 유흥에 빠져 살기 보다는 학교 혹은 학원 혹은 더불어 같이 고민을 나누고 공유하는 공간에 보이게 됩니다. 그렇게 여유라는 말의 헬라말 ‘σχολή(스콜레)’는 학교라는 말의 라틴어 schola(스콜라)가 됩니다. 영어 school(스쿨) 등은 모두 이 말에서 나온 것입니다. 

 

과거 학교는 그냥 암기의 공간이 아닙니다. 권위 있는 사람이 앞에 서서 이게 답이라고 소리치면 따라서 암기하는 공간이 아닙니다. 의학 전문가라는 인간이 공공의 공간에서 미국 대통령들이 비타민을 먹으니 비타민은 건강에 좋다라는 말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런 사람의 말은 아예 귀에 담아두지 마세요. 비타민이 좋은지 아닌지 의학적으로 약학적으로 저는 잘 모르지만, 이 사람의 논리가 엉터리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의학 전문가라는 이가 미국 대통령이 먹어서 좋다는 이상한 근거 속에서 자기 논리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슬픈 것은 이런 이상한 의학 전문가의 말에 힘을 가지고 사람들 사이에 전해진다는 것입니다. 스콜라, 즉 학교는 이런 이상한 의학 전문가가 선생으로 있을 수 없습니다. 스콜라에서 자신의 주장을 하기 위해선 나름의 탄탄한 논리력, 즉 합리성을 가져야 합니다. 서로 다른 합리성이 만나면 논쟁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스콜라 철학의 역사에선 선생과 제자의 논쟁도 흔합니다. 선생이라고 자기 답이 유일한 정답이라 고집피우지 않습니다. 선생의 주장이라도 자신의 합리성 속에서 비판할 것이 있으면 바로 비판합니다. 비난이나 조롱이 아닙니다. 합리적 비판을 합니다. 비판과 그 비판에 대한 변론이 스콜라 철학을 가득 채우는 전통입니다. 그리고 스콜라 철학의 공간이 ‘학교’를 역동적이게 하는 교육의 방식입니다. 

 

요즘 우리의 경우를 봅시다. 지금은 종교에서 이야기하는 구원이 사람들을 이끌지 못합니다. 종교 인구는 점점 줄어듭니다. 사람들이 향하는 구체적 고난의 공간이 돈과 관련됩니다. 가장 보편적인 행복도 ‘부자’라고 생각하는 세상입니다. 부자가 되면 모든 것이 해결되고 참된 행복을 누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부자도 자살을 하는 세상입니다. 풍요로운 세상이지만, 외로움은 더 해갑니다. 자살 역시 이젠 드문 사회적 현상이 아닙니다. 모두가 부자가 되기 ㅟ한 마음의 조급함으로부터 한걸음 떨어진 여유, 그 여유 속에서 과연 돈이 정말 우리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지를 묻고 따져야하는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 속에서 스콜라 철학의 그 스콜라, 그 학교, 그 학교에서의 참된 여우는 바로 돈에 의한 조바심에서부터 자유로운 여유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이것이 21세기 새로운 의미에서 스콜라 철학이 우리에게 뜻 있는 사람의 역동성이 되는 길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돈만 보고 돈을 향하여 달리는 교육, 그 조바심과 조급함이 가득한 교육, 그 교육으로 움직이는 학교, 그런 학교는 참된 의미에서 여유로운 학교가 아닙니다. 

 

그냥 믿으면 그만입니다. 더 천국에 가고 싶은 마음에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란 구호를 외치며 살아도 그만입니다. 남들이 얼마나 힘든지 아닌지 신경 쓸 것 없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는지 아닌지 상관없습니다. 단지 내가 죽어서도 행복하게 더 큰 평수의 아파트에 살고 싶은 마음에 예수가 쓸모 있기에 믿습니다. 우리가 아닌 ‘나’! 바로 나에게 쓸모 있어서 예수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예수뿐인가요? 부처도 이용하고, 조상신도 이용합니다. 그 이기심을 나쁜 종교적 야심가들은 적절하게 이용합니다. 묻지 못하고 믿게 합니다. 욕심이 이루어지려면 묻지 말고 그냥 믿으라고 합니다. 이성, 그 생각의 힘은 정지되고 버려집니다. 이런 종교, 이런 삶의 방법, 이런 이기심에 철학은 무력합니다. 내가 더 보다 더 많은 교양이 있다는 자랑을 위한 수단 정도로 철학 요약집을 읽거나 철학에서의 여러 명제는 남을 이기고 앞장서는 자기 개발서 차원에서 읽습니다. 철학책을 읽는 이유도 남을 앞서는 리더가 되기 위해서라는 말이 무서운 힘을 가진 세상입니다. 사람들에게 여유가 없는 것입니다. 여유를 누릴 수 있지만, 종교 야심가들과 사람들의 욕심을 이용해서 돈을 벌려는 이들은 더 더 더 조바심나게 합니다. 지금 불행하게 살고 있으니 행복을 위해 남을 이겨야 한다고 부채질을 합니다. 이런 곳에 철학은 철학이 아닙니다. 철학은 묻고 따집니다. 페르루스 다미아니(1006-1072)는 “철학은 신학의 시녀다(Philosophia ancilla theologiae)”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시녀는 그냥 조용히 말을 잘 듣는 시녀가 아니라, 너가 왜 주인인지 따지고 드는 시녀입니다. 주인이라며 안주하는 신학에게 쉼 없이 스스로를 돌아보고 더 더 더 합리적으로 자신을 다듬어가라며 그들이 안주하는 바로 그 지점을 향하여 묻고 따집니다. 그렇게 따지고 따져기에 신학은 나의 답만 맞는 아집의 덩어리가 아닌 합리적이 틀을 마련해간 것입니다. 그냥 믿고 살면 그만이란 것이 아니라, 이성적 동물인 사람, 그 사람에게 적절한 이성적 신앙을 철학은 요구하라 외친 것입니다. 만일 철학이 신학에게 시녀의 위치에서 함께 했다면, 철학이란 시녀는 정말 성가시고 힘든 시녀, 말 듣지 않고 쉼없이 따지는 그런 시녀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에게도 철학이란 시녀는 그의 신학을 더욱 더 날카롭게 그리고 더욱 더 치열하게 궁리하게 하고, 합리적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따지고 따지다 더는 사람의 이성으로 오르지 못하는 그 끝을 경험할 때, 토마스 아퀴나스도 마이커스 에크하르트도 합리적 신비주의를 이야기하게 됩니다. 반이성적 신비주의가 아닙니다. 이성의 끝에서 경험하는 합리적 신비주의입니다. 

 

보에티우스(Boethius, 475?-525?)는 『철학의 위안(Consolatio Philosophiae)』에서 철학을 자신을 위로하는 존재로 마주합니다. 이런 저런 자기반성, 자기에 대한 질문에 철학이란 이름의 자기 이성을 자기 고난의 처지에 대하여 답을 내어 놓습니다. 철학은 이러한 것입니다. 사람의 이성으로 따지고 묻고 답하고 위로합니다. 신학에게 가서도 철학은 그렇게 빠지고 물으며 신학이 자기 답을 내게 묻는 벗입니다. 지금 우리의 자본주의는 철학이란 벗이 필요합니다. 지금 우리의 종교는 철학이란 시녀, 아님 벗이 필요합니다. 

 

오늘도 저의 강의를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모두의 삶에 당당한 행복이 가득하길.

 

2020.03.19 유대칠 암브로시오 (토마스철학학교 오캄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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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철학사

이 땅에서 우리말, 우리글로 역사의 주체인 우리가 우리의 삶과 고난에 대해 고민하고 사유한 결과물이 한국철학이다. 위계의 사회였던 조선을 제대로 뒷받침해준 성리학과 이후 사민평등 사상을 가진 양명학의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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