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 내밀자. 가진 것도 아픈 것도 분노도 나누자. 그것이 신앙이다.
: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무스의 분노
‘나의 것’이 아니면, 돌아보지 않는다. ‘나의 분노’가 아니면, 그저 잡음일 뿐이다. ‘나의 아픔’이 아니면, 그저 남의 아픔일 뿐이다. 그냥 나 ‘아닌’ 남의 분노이고, 남의 아픔이다. 그토록 쓰라린 세월호의 아픔도 마찬가지다. 그저 남의 아픔이다. 슬픈 이야기지만, 크게 움직이지 않는다.
그 아픔에서 나온 분노도 그저 남의 분노일 뿐이기 때문이다. 병마(病魔)를 이기지 못한 노부부가 함께 자살한 소식을 접한다. 누구도 손 내밀지 않았다. 그냥 남의 아픔이다. 남편이 죽고, 힘든 몸으로 폐지를 수집하며 생활하다 병마는 더 깊어지고, 자식도 연락을 끊어 버린 할머니가 생존을 위해 성매매의 길에 들어서고 있단 기사를 읽었다.
평생 그런 삶은 생각도 하지 않은 할머니가 병든 몸으로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 하지만 손 내밀지 않는다. 그냥 그것도 남의 아픔일 뿐이다. 한 남성은 할머니에게 성매매로 신고하겠다며 협박해 만원씩 꾸준히 갈취하다 잡히기도 했다.
하지만 그저 남의 아픔이다. 나의 아픔이 아니다. 그래서 손 내밀지 않는다. 얼마 전, 빚을 해결하지 못해 가족 모두가 자살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이것도 그냥 남의 아픔이다. 나의 아픔이 아니다. 심지어 종교조차 자신의 것만 본다.
더 큰 교회가 되고 더 큰 절이 되는 것만 보고 있다. 그것뿐이다. 그것만 생각한다. 자신의 꿈을 보느라, 남의 아픔은 보지 않는다. 종교 역시 남의 아픔은 자신의 아픔이 아니다. 그냥 남의 것이다.
지진으로 수많은 이들을 죽은 곳에서 힌두교를 믿어 이러 되었다 독설 한다. 죄책감도 없다. 무엇이 잘못인지도 모른다. 그냥 남의 아픔은 내가 아파해야할 나의 아픔이 아니다. 막말을 해도 그만이다. 오직 자신의 것만을 생각한다. 그것뿐이다.
교부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무스’(Ιωάννης ο Χρυσόστομος 349경 – 407)는 분노했다. 아픔을 공유하지 않는 신앙에 분노했고, 소유에 미쳐버린 인간 삶에 분노했다. 자신의 것만을 바라보며 남의 아픔은 돌보지 않는 그런 삶에 분노했다. 그리고 그 아픔에서 터져나오는 그 분노를 가난하고 아픈 이들과 공유했다. 스스로 자신의 소유물이라고 하지만, 결국은 스스로가 그 소유물의 소유물이 되어 버린 삶에 분노했다.
“소유물은 우리가 소유하는 것입니다. 소유물이 우리를 소유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그대는 종을 주인으로 생각하는 것입니까! 왜 그대는 질서에 역행하는 것입니까!” (PG.51:69)
돈이 우리를 지배한다. 우리가 돈을 가지는 것이 아니다, 돈이 우리를 지배한다. 즉 우리가 소유물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소유물이 우리를 소유하는 꼴이 되어버린 삶이다. 우리가 ‘나의 것’만을 추구하고, 마치 그것이 모든 것을 이루어줄 것처럼 생각할 때, 소유물은 신이 되어 버린다.
그것을 향한 맘은 가장 사악한 우상숭배가 되어 버린다. 오직 '나의 것'만을 생각하고 욕구하는 영혼은 남의 것도 탐욕한다. 그것이 나의 것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렇게 어떻게 하면 그것을 빼앗을까 생각한다. 결국 ‘나의 것’만을 바라보고, ‘남의 것’을 빼앗으려는 그 마음에서 싸움이 일어난다.
“이 세상에 전쟁을 일으킨 바로 그 말 ‘나의 것’과 ‘남의 것’이란 말이 거룩한 교회에선 없어져야 합니다. 가난한 이는 부자를 부러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곳엔 부자가 없습니다. 부자는 가난한 자를 조롱하고 무시해서도 안 됩니다. 그곳엔 가난한 자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은 공유물입니다.” (<바울로의 말>(In dictum Pauli) 2)
이 세상은 누구의 것이 아니다. 신은 누구의 것을 만들기 위해 이 세상을 창조한 것이 아니다. 즉 신은 누군가의 소유물을 만든 것이 아니다. 공유물을 창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공유물을 독차지하고, 그것을 나누지 않는 것은 그야말로 강도짓이다.
“자신의 것을 공유하지 않는 것은 강도짓입니다! 나의 이런 말에 그대는 놀랐을 겁니다. 그러나 놀라지 마세요. 직접 <성서>의 근거를 제시하겠습니다. <성서>는 남의 것을 빼앗는 것뿐 아니라, 그대의 소유물을 다른 이와 공유하지 않는 것도 강도짓이며 탐욕스런 도둑질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라자로>(De Lazaro) 2, 4)
누군가의 소유물을 빼앗아가는 것도 강도짓이다. 하지만 자신의 소유물을 나누지 않는 것도 강도짓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 만물은 모두의 것으로 창조된 것이지, 누군가의 창고에 들어가 그만의 행복을 위해 창조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부자가 가난한 이보다 더 많은 햇빛을 즐긴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부자가 가난한 이보다 더 많은 공기를 가진다고 말하는 것도 잘못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모든 이들에게 동등하게 주어진 공유물이기 때문이기 때문입니다.” (<안티오키아인들에게>(Ad populum Antiochenum) 2. 6-7)
햇빛도 공기도 모두 공유물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공유물이다. 토지 역시 공유물이다. 하느님이 "땅이 있으라"하러 땅을 창조하신 것은 누군가의 땅으로 창조하신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이것을 앗아가 독차지 하는 것은 강도짓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마치 자비를 베푸는 듯이 스스로를 내어 놓으며 선행을 한다고 자랑하는 것도 잘못이다. 그저 강도짓해서 가져간 것을 원래 자리에 두는 일이다.
“나는 당신에게 강도짓 한 것을 자비롭게 돌려주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까지 사기 친 것을 끝내라는 겁니다! 당신이 강도짓을 끝내지 않는다면, 진정 자비를 베푼다 할 수 없습니다, 당신이 가난한 이들에게 엄청나게 많은 돈을 준다고 해도, 당신의 사기와 강도짓거리가 끝나지 않으면, 하느님은 당신을 살인자 가운데 한 명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사도의 말씀에 대하여>(De verbis Apostoli), 3.11)
크리소스토무스의 분노는 단호하다. 부자가 남들 보기 좋으라도 얼마를 기부한다고 그것이 근본적인 사회악을 해결하는 것은 아니다. 진정! 참다운 선행은 원래 있던 것에 두는 것이다. 즉 소유물을 공유물로 인정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가난한 이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살인자와 같다.
지금도 생계 문제로 자살하는 많은 노동자가 있다. 정당한 노동에 대한 대가를 받지 못하고 죽게 되는 노동자가 많다. 오염된 위험한 공간에서 노동하다 죽어간 노동자가 많다. 그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은 바로 부자다.
강도짓과 사기를 멈추지 않고 이루어지는 부자의 기부는 그저 위선일 뿐이다. 그러한 위선으로 하느님을 속일 수 없다. 오히려 하느님은 그를 살인자의 한 명으로 판단할 것이라 크리소스토무스는 분노했다.
크리소스토무스에게 노동 없이 많은 소유물을 유지하는 ‘부자’는 '강도'이며 '사기꾼'이고 '살인자'다. 노동! 오직 노동만이 공유물로 주어진 것을 정당하게 사용할 수 있는 조건이다.
노동 없이 하느님이 창조하신 공유물을 독점하고, 자신의 창고에 쌓아두는 것은 그 자체로 강도짓이다. 크리소스토무스에게 노동은 매우 고귀하다. 그는 묻는다. 그의 분노 앞에서 억울하다 하는 부자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
“당신이 당신의 소유물을 어떻게 모았는지 생각해보세요! 과연 당신은 노동으로 그것을 모았나요! 아니면 강탈과 탐욕으로 모았나요! 그것도 아니면, 당신 아비의 재산을 그저 상속 받았나요! 그것도 아니면 집 없이 쫓겨난 고아들의 것을 강탈한 한 것 인가요! 그것도 아니면 그냥 강도짓을 한 것 인가요!” (<창세기 15장 주해>(In capitolum XV Genesis) 37, 5)
크리소스토무스는 노동 없이 이루어진 어떠한 소유물도 정당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엄밀하게 노동하는 노동자만이 하느님이 창조한 공유물을 정당하게 사용할 수 있다. 노동자는 그냥 노예나 노비가 아니다.
정당한 노동으로 하느님이 창조한 공유물을 정당하게 분양받을 수 있을 자격을 가진 사람이다. 부자보다 노동자는 고귀하다. 노동! 게으르지 않아야 한다. 가난한 이도 노동하지 않거나 노동에 있어 게으르지 않아야 한다. 열심히 노동해야 한다.
그런데, 만일 부자 가운데 누군가가 가난한 이의 아픔은 그저 게으름의 탓이라고만 한다면, 크리소스토무스는 그러한 부자에게 다음과 같이 분노한다.
“가난한 이의 게으름은 비난해야 합니다. 이러한 게으름은 비난 받아 마땅합니다. 우리 역시 게으름에 대해 죄악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나는 나의 부모 재산이 있어’라고 말하는 당신은 대답해봅시다. 그가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고 죽어 마땅합니까?”(<자선에 대하여>(De eleemosyna) 6)
노동 없이 그저 상속으로 부유함을 물려받은 이에게 그는 독한 분노를 드러낸다. 진정 가난한 이에게서 태어나 열심히 노력해도 사회적 구조 속에서 가난을 벗어날 수 없다면, 그는 죽어야 하는가! 오히려 노동 없이 강도짓으로 부자가 된 이가 스스로의 부유함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그는 분노한다.
그의 분노는 구체적인 대안도 말한다. 부자가 진정 참된 신앙을 가지고 하느님이 그에게 허락한 것을 공유하는 삶을 살고 싶다면, 혹은 노동으로 정당하게 공유물을 분양받아 지금 어느 정도 넉넉하다면, 지금 당장 자신의 돈으로 노예시장에서 노예를 사와야 한다.
그리고 그를 교육해서 스스로 독립해 살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런 후, 그에게 자유를 주어야 한다. 이것이 실천하는 신앙이다. 그리고 이와 같이 타인을 위하여 사용하라고 그에게 소유물을 허락한 것이다.
“진정 노예라는 것이 필연적으로 생긴 것은 아닙니다. 이는 죄에 대한 처벌로 그리고 불순종에 대한 계도로 인간에게 주어진 겁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계서 이 땅에 오셔서 이 모든 것을 제거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노예도 자유인도 없습니다. 진정 당신이 노예가 걱정된다면 더 이상 노예를 두지 마세요. 그리고 그들을 시장에서 사와서 스스로 독립할 수 있게 교육을 하고 더 이상 구걸하는 이가 되지 않게 한 다음, 자유롭게 보내주세요.” (코린토 전서 설교 40, 1)
크리소스토무스에게 노예와 귀족, 가난한 이와 부자도 원래는 없다. 그리스도에 의하여 모두 자유민이다. 노예란 없다. 단지 그러한 것을 실천하지 않을 뿐이다. 신분제 뿐 아니라, '나의 것'이라 하는 것도 그저 허상이다. 진정 참된 신앙을 가진 이라면, 이러한 것을 부셔야 한다.
“‘나의 것’과 ‘남의 것’이라 불리는 모든 것은 말장난이다. 실제로 그러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코린토 전서 설교 10, 3)
모든 것은 본질적으로 공유물이다. 그렇기에 그것을 이해하고,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 신앙이다. 사람을 소유하고 노예로 삼아도 안 되고, 나의 것이라며 공유물로 주어진 것을 소유물로 독점해도 안 된다. 모든 것은 본질적으로 공유물이다. 아래의 글을 읽으며 그의 분노를 다시 생각해보자.
“우리 다시 <성서>를 읽어봅시다. ‘애야. 가난한 이의 살길을 막지마라’(집회서 4:1) 남의 것을 가지는 자가 곧 강도짓 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남의 것을 소유하고 있을 때, 그것이 강도짓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선을 행하지 않으면 강도짓 하는 자와 마찬가지로 벌을 받을 것입니다. 하느님이 그대에게 소유물을 허락한 것은 여자와 술에 취하고 폭식을 하며 비싼 옷을 입고 편안한 삶을 위해 허락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난한 이와 공유하라고 허락한 것입니다. 필요이상의 것들을 소유한 자가 가난한 이와 공유하지 않고 자신만을 위하여 사용한다면, 그런 사람은 하느님의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대가 소유하고 있는 것은 그대 혼자만의 소유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라자로> 2, 4)
살 길을 막지 않는 것이 신앙이다. 강도짓 하지 않는 것이 신앙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나의 것'이 나만을 위한 소유물이 아니라 원래 모두를 위한 공유물임을 인정하는 것이 신앙이다. 노예의 아픔을 공유하는 것이 신앙이다. 노동자의 삶을 사는 것이 신앙이다. 그것이 신앙이다.
마지막으로 크리소스토무스는 자신의 삶으로 우리에게 설교했다. 가난한 이의 분노도 공유해야 한다. 그는 그 시대의 약자인 과부, 고아, 노예, 가난한 이의 아픔과 분노를 함께 공유했다. 그것이 교회와 소명이라 믿었다. 주교라는 자리가 그런 자리라 믿었다.
당시 주교와 사제의 호사스러움을 격멸했다. 가난한 이의 아픔도 분노도 공유하지 않는 사치스런 삶에 분노했다. 이러한 분노는 그를 힘들게 했다. 결국 콘스탄티노플 대주교는 그를 해임한다. 당시 교회도 소유욕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민중의 아픔을 공유하고 그들과 소유를 공유한 크리소스토무스는 민중의 덕으로 다시 복귀한다. 그러나 한 번의 아픈 경험도 그의 황금 입을 닫게 할 수 없었다. 그 시대 가난한 이들의 분노를 공유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분노를 토하던 그의 황금 입으로 인하여 다시 추방된다. 그리고 407년 9월 14일에 죽음을 맞이한다.
우리는 나의 것만을 보고 있다. 죽어가는 가난한 이의 죽음 앞에서 우린 손 내밀지 않았다. 그들의 아픔을 공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많은 노동자의 분노에 손 내밀지 않았다. 그들의 분노를 공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월호라는 참혹한 비극의 아픔에도 그 분노에도 공유하지 않았다. 분노도 아픔도 소유도 공유하지 않았다. 크리소스토무스의 황금 입의 그 분노가 아직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부끄럽게도 말이다.
소유를 공유하고, 아픔을 공유하고, 분노를 공유하는 삶, 그 삶이 신앙이라던 크리소스토무스의 분노가 여전히 유효하다. 참으로 부끄럽게 말이다. 손 내밀자. 그리고 나누자. 그것이 신앙이다.
유대칠 암브로시오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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