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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강학회

주님의 기도 4 - 아버지의 나라

by Daechilyus Ambrosius Magnus 2020. 10. 10.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아멘.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는 곳, 저마다 아버지의 빛이 되어 이웃에서 길이 되어 서로가 서로에게 희망이 되고 의지가 되는 곳이라면 바로 그런 곳이라면 바로 그런 것이 아버지의 나라가 아닐까요. 조선 땅에 서학이 들어왔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조선 땅에 들어온 것입니다. 그 복음은 죽어서 가는 천국을 이야기하기보다 당장 이 땅에서 하느님 나라가 어떠한 것이지 당시 민중에게 알려주었습니다. 양반이 백정과 형제가 되는 것이 복음이었습니다. 평생 동안 사람이지만 사람으로 있지 못하던 백정들이 양반과 더불어 있을 수 있다는 것, 모두가 고기를 먹고 심지어 고기를 맛 좋은 것이라 즐기면서 막상 그 고기를 자신에게 내어주는 백정은 제대로 된 사람이라 보지 않던 그런 세상에서, 그리고 그것이 너무나 당연한 신분제 사회에서, 복음은 양반과 백정을 한 자리에 더불어 있게 하였습니다. 복음이란 이러한 것입니다. 당시 복음을 받아들이고 복음으로 살아가는 양반의 환대를 받으며 백정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정말 제대로 다시 살게 되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사람으로 다시 살게 된 것이지요. 살아도 사람대접받지 못하다 정말 제대로 사람으로 대접받게 된 것이니 말입니다. 복음이란 이러한 것이고 복음이 주는 복은 바로 이러한 것입니다. 이러한 복이 가득한 곳이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당시 백정 황일광은 평생 처음으로 고개 들어 얼굴 조차 제대로 보지 못하던 양반들에게 예대와 환대를 받았다. 그 환대에서 그는 죽어 가는 하늘의 하느님 나라에 앞서 이 땅에서 하느님 나라를 마주하게 됩니다. 

"두 개의 하늘이 있습니다. 하나는 이미 이 세상에 또 하나는 후세에 이렇게 해서 두 곳입니다."

황일광은 그렇게 순교의 고통을 고통으로 여기지 않고 이 땅의 하느님 나라에서 저곳의 하느님 나라로 가는 문 정도로 생각하고 기꺼이 더불어 순교하였습니다. 

황금빛 빛나며 화려하 옷을 입고 사치를 즐기며 쾌락에 빠져 지내는 곳이 하느님의 나라가 아닙니다. 마음대로 살아가는 곳이 하느님 나라가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는 서로가 서로에게 희망이 되고 서로가 서로에게 빛이 되어 주는 곳, 이런저런 이론으로 하느님 계심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네 삶, 그 모습이 그대로 하느님 계심을 증명하는 그런 곳입니다. 아집이 무너지고 나의 삶에 찾아온 너를 우리라는 이름으로 안아주며 더불어 있는 곳이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복음은 더불어 살라는 흩어지고 나누어지지 말라는 서로가 서로에게 희망이 되고 빛이 되라는 하느님의 말씀이며, 우리 삶의 지혜입니다. 그 자신이 복음인 예수가 우리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내어 주며 우리와 더불어 우리를 이루셨듯이 말입니다. 

우리는 지금, 나는 지금, 하느님의 빛이 되어 더불어 살아가는 이웃에 빛이 되고 있을까요? 더불어 살라는 예수의 복음을 그저 앎이 아닌 삶으로 살아가며, 하느님 계심을 증명하는 빛이 되고 있을까요? 나의 삶이 하느님 아니 계심을 외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아직도 이 세상엔 조선 사회의 고난자인 백정과 같이 부조리 속에서 아파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들에게 우리는 그리고 나는 복음의 삶아있음을 보이며 이곳에서의 하느님 나라를 보려 주고 있을까요?

하느님의 나라를 이 곳에 내려달라 그저 청하기 보다 그 청함의 간절함 만큼 우리의 삶도 하느님의 나라를 드러내야겠습니다. 

기도란 하느님에게 때스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그리 살겠다는 나와 우리의 다짐이 되기도 하니 말입니다. 

오늘도 나를 돌아봅니다. 남 탓으로 우리가 되지 못한다고 포기 말고 나를 돌아봅니다. 나는 하느님 나라를 얼마나 이 땅에 이루고 있는지... 나로 인하여 얼마나 하느님 나라가 드러났는지 돌아보고 돌아봅니다. 복음의 행복은 쉽지 않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향한 걸음은 소유로 채워지는 여정이 아닌 버리고 버리고 나아가는 더불어 우리 됨입니다. 양반이 신분제의 기득권을 버리고 백정에게 다가섰듯이 그렇게 다가선 만큼 하느님 나라에 다가섰듯이 그렇게 버리고 버리고 나아가는 길입니다. 그냥 버리는 것이 아니라, 나누며 나누며, 나아가는 길입니다. 오늘도 <주님의 기도>는 나를 돌아보게 합니다.

2020 10 10

유대칠 암브로시오

[앞으로 주님의 기도를 연재하려 합니다. 오캄연구소의 길이 홀로 감이 아닌 더불어감이 되도록 후원해주길 분들은 카카오 뱅크 3333-16-5216149 (유대칠)로 함께 해주시면 됩니다. 그리고 대구에서 '교부 문헌 강좌'와 '더불어 신학' 그리고 철학 강좌를 준비합니다. 함께 하실 분들은 summalogicae@kakao.com으로 문의해 주시면 됩니다. 서로에게 고마운 만남을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유대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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