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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강학회

주님의 기도 6 - 한끼가 되는 삶

by Daechilyus Ambrosius Magnus 2020. 10. 15.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아멘.

"오늘도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한때 한 끼 식사가 힘겨운 세상이 있었습니다. 하루 한 끼도 힘겨운 이들이 살아가던 세상이었습니다. 일본의 오랜 잔혹한 폭력의 지배 동안 가난한 여인들은 전쟁터로 끌려가 일본군의 그 역겨운 야욕에 희생되었습니다. 그리고 가난한 남성들은 남의 전쟁에 끌려가 제대로 살아보지 못하고 죽어갔습니다. 그 일본의 가혹한 시간이 끝나고도 평화의 시간은 멀기만 했습니다. 이 땅은 다시 전쟁으로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비극이었습니다. 남이 우리를 죽이다, 그 남이 사라진 자리에서 우린 서로가 서로를 죽이며 전쟁을 했으니 말입니다. 그 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아이들과 하루 한 끼를 위해, 그 지독한 가난을 이겨내기 위해 부당한 크기의 노동을 그저 묵묵히 하던 이들이 있었습니다. 죽도록 노동을 시키고 얻은 그 잔혹한 이득으로 누군가는 부자가 되고 누군가는 한 없이 착취의 대상이 되어만 갔습니다. 노동법이 있어도 노동자를 지켜주지 못했습니다. 그 와중에 결국 이 땅 가난한 노동자의 그 아픔을 온몸에 담고 전태일은 스스로의 몸에 불을 지릅니다. 그리고 그 시대의 그 잔혹한 탐욕과 그 탐욕으로 죽어가는 이들의 아픔을 위해, 스스로 이 시대의 십자가가 되어 사라집니다. 그리고 지금도 사라지지 않고 그의 마음은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남아 지금도 살아있습니다. 

한 끼 식사가 힘든 가난, 그 가난의 앞에서 누군가는 한 끼 줄 테니 죽도록 노동하라 합니다. 너무 힘들다 하면, 그러면 너도 부자가 되거나 힘을 가지라 합니다. 그것은 조롱이나 다름없습니다. 결국 다시 참고 그 한 끼 식사를 위해,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위한 한 끼 식사를 위해 누군가는 죽도록 일하고 한 끼 식사를 합니다. 그리고 그의 노동으로 이루어진 그 큰 결실들로 누군가는 더더더 큰 부자가 되어갑니다. 가난한 노동자는 과거 '라면 한 끼 식사'에서 이젠 '돼지고기 들어간 된장 한 끼 식사'가 되었다 해도, 결국은 여전히 그 한 끼 식사를 위해 착취의 삶을 살아갑니다.

예수께서는 하느님에게 일용할 양식을 청하라 일러주십니다. 그런데 하느님에게 그렇게 매일 기도를 드려도 우리 앞에 한 끼 식사는 여전히 힘든 상황입니다. 한 끼 식사, 그것은 그저 한 끼 식사가 아니라, 우리가 우리의 삶을 우리 존재의 권위에 맞게 살아갈 의식주이며 권리입니다. 그 한 끼의 불안 속에서 살아갑니다. 조금 더 좋은 한 끼를 위해 공부하고, 일을 하고, 누군가는 그 한 끼의 걱정이라곤 하나도 없이 그저 한 끼로 고생하는 이들을 천한 사람이라고 되는 듯이 내려보며, 심지어 개돼지라는 막말을 하며, 그렇게 스스로 귀한 사람이란 듯이 살아갑니다. 그 한 끼로 인하여 하느님의 모습을 따라 만들어진 이 귀하고 귀하며 신성한 우리의 존재는 천한 존재가 되고, 기계가 되고, 마음대로 무시해도 좋은 존재가 되어 버립니다. 하느님에게 청한다고 하느님이 초자연적인 힘으로 우리 앞에 한 끼를 내려다 주지도 않으십니다. 그런데 하느님에게 청하라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일려 주십니다. 

저는 기도란 그저 청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청하고만 있는 것, 어찌 보면 간절히 간절히 떼쓰고 있는 것이 기도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기도란 우리 삶으로 드러내야 할 가치의 다짐이기도 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각자는 이 땅에서 하느님의 손이고 발이 되어야 할 존재들입니다. 하느님 계심은 대단한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와 안셀무스의 하느님 계심의 증명을 통하여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각자의 삶으로 증명되어 우리 이웃에게 느껴지게 해야 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기도가 삶이 되는 우리 각자의 삶, 바로 그 삶이 하느님 계심의 증명이 되어 이웃에서 희망으로 다가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 각자가 하느님의 손과 발, 하느님의 모습으로 이 땅을 살아가야 한다면, 그 일용할 양식으로 아파할 일이 없도록 노력해야 하는 이들도 바로 우리 자신들입니다. 

예수께 더 큰 잔치상을 차려 드리기 위하여 이웃에게 나눌 것을 아껴 내어 놓으면 예수께서는 기뻐하실까요. 예수께서는,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복을 받기 위해 자신을 드높이며, 막상 이 세상에선 차가운 부자를 두고 절대로 기뻐하지 않는 분이라 확신합니다. 한 끼가 힘겨운 이웃에게 한 끼가 되어주는 삶, 돈 가진 자는 먹을 한 끼로 이웃을 안아주며, 자신의 소유를 자랑하지 않고 이웃의 기쁨 속에 지워지는 것, 바로 <주님의 기도> 이 구절은 이런 삶을 이 땅에 살라는 다짐이라 생각합니다. 돈을 가지지 못한 이는 외로움에 아프고 힘든 이의 그 아픔을 들어주며 안아주고 외롭게 홀로 울지 않게 하는 것, 바로 그렇게 영혼의 한 끼를 내어 나누는 것, 바로 이러한 삶을 이 땅에서 살라는 다짐으로 생각합니다. 

2020년 코로나 19로 1억 명의 새로운 극빈층이 생길지 모른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우리 주변에도 힘겨운 이웃들을 너무나 많이 봅니다. 더불어 살아감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한 끼가 되어주는 세상이라면, 어쩌면 1억 명의 아픔은 줄어들지 모릅니다. 

우리 역사 속 그 많은 비극들 한 끼가 없어 힘든 이들을 기계처럼 이용해 누군가는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우리 사회의 많은 부조리들도 바로 이러한 우리 사회의 비극적 구조와 무관하지 않아 보입니다. 지금이라도 한 끼 없어 힘든 이들의 벗으로 그들에게 한 끼가 되어 사라져야 할 때가 온 듯합니다. 성체를 떠올립니다, 빵이 되신 그리스도의 몸은 우리에게 한 끼 빵이 되어 우리 삶의 '희망'이 되고 '열심'이 되고 우리 자신이 되었습니다. 그와 같이 이웃에게 한 끼가 되는 삶... 오늘도 <주님의 기도> 한 줄 기도가 스스로를 반성하며 또 다짐해 봅니다. 

2020 10 15 

유대칠 암브로시오

[앞으로 주님의 기도를 연재하려 합니다. 오캄연구소의 길이 홀로 감이 아닌 더불어감이 되도록 후원해주길 분들은 카카오 뱅크 3333-16-5216149 (유대칠)로 함께 해주시면 됩니다. 그리고 대구에서 '교부 문헌 강좌'와 '더불어 신학' 그리고 철학 강좌를 준비합니다. 함께 하실 분들은 summalogicae@kakao.com으로 문의해 주시면 됩니다. 서로에게 고마운 만남을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유대칠.]

서재 금호강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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