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아멘.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이 세상은 어둠으로 가득할까요? 그것이 원래 이 세상의 모습일까요? '창세기'를 돌아봅니다. 이 세상의 첫 모습을 보며 하느님은 이 세상을 보기 좋은 곳이라 하셨습니다. 이 세상은 원래 하느님 눈에 보기 좋은 곳입니다. 원래 이 세상은 서로 다투고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고 서로가 서로를 이기기 위해 이런저런 거짓을 일상으로 저지르는 그러한 곳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더 좋고 덜 좋은 것을 나누어 보게 하는 과일을 그만 먹어 버리고는 이 세상을 그렇게 나누어 보게 됩니다. 그리곤 더 좋은 것을 가지기 위해 때론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더 좋은 것을 거짓은 어렵지 않은 일이 되었습니다. 더 좋은 것이 되기 위해 남을 무시하는 것은 하나의 능력이 되어 버렸습니다. 남을 돕는다면서 스스로를 높이는 이들도 어렵지 않게 봅니다. 그렇게 이 세상은 흩어지고 나누어져 버렸습니다. 자신은 이 세상 모든 것을 다 안다는 거짓 지식인과 지혜인들은 저마다 사람들에게 더 많이 벌고 더 높이 올라서고 더 강력해지라며 욕심에 달콤한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합니다. 자기 자신도 개발의 대상이 되어 자기를 개발시키지 못한 불안감에 힘들어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남보다 더 높아지고 더 강해지는 것이 개발이라 생각하니 결국 이것도 더 좋아지려는 욕심과 그와 관련된 불안 때문인 듯 보입니다.
이 세상은 원래 하느님이 보시기에 좋은 곳이었습니다. 그런 곳이 아닙니다. 악마들이 마구니들이 가득한 그러한 곳이 아닙니다. 권정생 선생님의 강아지똥 같은 존재들이 죽음 앞에서도 초연하게 타인에게 자신을 내어주며 그렇게 내어주는 길을 천국 가는 길, 이곳 아름다운 세상에서 저것 아름다운 세상으로 그렇게 하느님의 품으로 가는 것이라 생각하고 살던 그러한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더 좋은 것만 생각하는 세상에선 아집만 커지고 아집이 커지는 세상에선 죽음은 공포이고 끝이며, 그 앞에서 더 즐기며 신나는 생각만 커져가거나 아니면 무력한 회의감만 커져갑니다.
이 세상은 원래 아름다운 곳입니다. 이 세상은 원래 하느님의 빛이 가득한 곳입니다. 이 세상은 하느님이 창조하신 곳입니다. 있어야 할 모습으로 우리가 잘 있다면, 하느님의 빛이 가려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이름은 당연히 거룩히 빛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할 것입니다. 어쩌면 하느님의 빛은 우리를 향하여 비추고 있지만, 우리가 더 좋은 것을 가지려는 아집에 눈을 감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감은 눈이니 이 세상은 빛없는 어둡기만 하고, 눈을 감으니 바로 앞에 스치는 이웃에게 길을 양보하지도 못하고 부딪치고 싸우고 그러는지도 모릅니다. 눈을 뜨고, 아집을 내려놓으며, 하느님의 빛으로 가득한 이 세상을 보게 될지 모릅니다. 이미 그 가운데 있다는 것을 알게 될지 모릅니다.
아집을 벗고 아집에서 눈을 뜨면 빛을 마주하게 될 것이고, 하느님의 빛을 따라간다면 우리 자신의 삶도 이 세상의 빛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그런 사람이 빛이 되어 이 세상을 밝히면 그 빛에 어두운 길 힘겨운 이들은 다시 길을 마주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굳이 이런저런 전도지로 전도하지 않아도 이 사회에 빛으로 자신을 태우는 이를 본다면, 우리로 더불어 있기 위해 자신을 내어 놓으면 타고 있는 이를 본다면, 그를 본 이도 더불어 함께 빛을 내게 될지 모릅니다. 그러면 우리 사회는 더욱더 빛으로 가득한 세상, 원래 있던 그 모습으로 있게 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이 거룩히 비추어주길 하느님에게 청하고만 있지 맙시다. 이미 우리를 향하여 비추어주신 그분을 향하여 우리도 눈으로 뜨고 우리 삶이 하느님의 빛이 되어 이웃을 향하여 빛을 내며 타들어갑시다. 어쩌면 바로 그것이 하느님의 이름으로 이 세상을 비추는 바로 그 빛이 정말 우리 가운데 거룩히 빛나는 것일지 모릅니다. 선악과 이후 아집으로 살아가는 우리, 아집의 밖으로 우리 삶이 하느님의 빛이 되어 거룩히 되길 우리 스스로 다짐해 봅시다.
하느님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그저 비추어주시길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의 빛으로 살아가는 나의 삶을 다짐해봅니다.
나의 개발은 우리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희생만을 강요하던 권위주의 시대의 거짓이 답이란 말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서로가 서로에서 자신을 내어주며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하며 서로가 서로에게 빛이 되는 그런 더불어 있음의 장에서 우린 정말 우리로 행복한 가운데 나로도 행복함을 누릴 수 있다 생각합니다. 자기개발서의 영어 이름은 a self-hep book입니다. 잘못되면 홀로 스스로 자신을 돕는다는 말이 됩니다. 나의 곁 나와 더불어 있는 이는 짐이며 홀로 앞서 가려는 말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외로운 미소는 슬픕니다. 정말 하느님의 거룩한 빛이 되는 삶, 그 빛은 홀로 있으면 뜻이 없습니다. 그 빛이 누군가의 길이 될 때 빛은 뜻을 품은 존재가 됩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빛이 되어 서로가 서로에게 길이 되고 벗이 되어질 때, 정말 제대로 우리 가운데 우리 모두가 더 행복해지며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거룩한 빛이 되어 서로가 서로를 비추리라 믿으며 하느님 역시 바로 그러한 것을 보시며 다시 말씀하실 것입니다. 참 좋다고 말입니다.
2020 10 09 한글날
유대칠 암브로시오
[앞으로 주님의 기도를 연재하려 합니다. 오캄연구소의 길이 홀로 감이 아닌 더불어감이 되도록 후원해주길 분들은 카카오 뱅크 3333-16-5216149 (유대칠)로 함께 해주시면 됩니다. 그리고 대구에서 '교부 문헌 강좌'와 '더불어 신학' 그리고 철학 강좌를 준비합니다. 함께 하실 분들은 summalogicae@kakao.com으로 문의해 주시면 됩니다. 서로에게 고마운 만남을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유대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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