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다'는 것과 '이해한다'는 것을 생각해 본다.
'신'을 안다. 정확하게 알지만 못해도 '신'을 아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신'을 이해하진 못한다. 무신론자도 신은 안다. 신을 모른다고 할 순 없다. 그러나 신을 이해하진 못한다. 신이란 것이 그저 사람들의 오랜 상상에 근거한 관념에 지나지 않는다면, 신은 처음부터 이해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신을 알 순 있다. '안다'와 '이해한다'라는 말이 큰 차이를 가지지 않고 사용하는 이도 있기에 여기에서 논의의 상황 속에서 구분한다면, 대상의 존재 유무를 떠나 대상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을 '안다'라고 한정하자. 하지만 이러한 것을 이해할 순 없다. 이해하기 위해선 대상을 경험해야 한다. '사랑'이란 말을 사전으로 안다면 아는 것이지만 이해한다고 보긴 힘들다. 이해하기 위해선 그 존재를 직접 마주해야 한다. '청룡'은 알지만 이해하진 못한다. '해태' 역시 알지만 이해하진 못한다. 아는 것은 엄밀하게 관념을 아는 것이다. 그 관념이 나의 의식 밖에 존재하는지 하지 않는지를 상관없다. 물리 현상을 연구하는 물리학과 같이 해태와 청룡을 연구하는 학문은 없다. 왜냐하면 물리 현상은 알기도 하고 이해하기도 한다. 적어도 직접 안드로메다 성운에 갈 수 없어도 여러 사실들이 그 상황을 간접 경험하게 해 준다. 그러나 해태와 청룡은 그러한 존재가 아니다. 그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객관적 대상으로 의식 밖에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알 수 있을 뿐, 그것 사이의 인과 관계를 따지고 들어갈 수 없다.
'떡국'을 안다는 것과 이해한다는 것은 같은 대상을 두고 일어 나는 의식의 행위이지만 엄밀하게 구분된다. 안다는 것은 엄밀하게 떡국이란 '말의 뜻' 혹은 '말의 정의'를 안다는 말이다. 떡국의 사진과 사전적 정의를 들은 떡국을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는 사람도 떡국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정말 그런 사람이 있다 한다면, 그는 떡국의 '진짜 뜻' 혹은 '사실의 정의'를 알 순 없다. 그가 마주한 '떡국'이 사실이 아닌 관념일 뿐이기 때문이다.
무엇인가를 인식한다는 것은 꼭 그것이 외부에 독립된 대상으로 있지 않아도 가능하다. 현존하지 않아도 그 존재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의식 밖 독립된 대상으로 무엇인가를 직관하지 않았다면, 적어도 그런 대상을 두고 이해했다는 말을 쓰기를 어렵겠다.
유대칠
2021 0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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