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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그' 고전

<형이상학> 읽기 1

by Daechilyus Ambrosius Magnus 2019. 10. 31.

유대칠의 바로 그 고전 - 형이상학 읽기 1

"모든 사람은 자연적으로 알기를 원한다. 그 증거로 사람은 감각을 즐긴다는 것이다. 그것의 쓸모를 떠나 감각 그 자체를 즐기며 그 가운데 다른 어떤 감각 보다 시각을 즐긴다. 실천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심지어 아무 것도 하려 하지 않아도 우리는 보는 것을 다른 어떤 것보다 더 좋아한다. 그 까닭은 모든 다른 감각 가운데 우리는 시각을 통하여 가장 많이 알게 되며 사물들 사이의 차이를 구분하기 때문이다." (980a21-27)

아리스토텔레스의 유명한 말이다. 사람은 원래 알기를 원한다는 말이다. 이것이 사람에게 주어진 가장 근본적인 욕구란 말이다. 물론 성욕도 있고 식욕도 있다. 이것을 부정하기는 쉽지 않다. 아니 부정할 수 없다. 수많은 이들이 이런 저런 길고 긴 이야기를 해 왔지만, 근본적으로 성욕과 식욕과 같은 생물학적인 욕구는 거부할 수 없는 사람이란 존재의 한 부분이다. 여기에 하나가 더 추가될 수 있다. 바로 알고자 하는 욕구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앎이란 전통이란 사회적 관습이나 학교 혹은 학원에서 익히는 그러한 앎 보다 더 근원적인 앎을 이야기한다. 사람이라면 원래 선생에게 무엇을 배우고 싶어 한다는 말은 아니란 말이다. 근원적으로 알고자 하는 그 욕구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시각이다. 봐서 알고 싶은 욕구가 있단 말이다. 무엇인가 새로운 시각 경험은 사실 그 자체로 우리에게 어떤 쓸모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보지 않았다고 해서 큰 삶의 불편이 있는 것도 아니다. 편의와 불편과 완전히 무관할 수도 있다. 그러나 굳이 보려 한다. 보고 싶어 한다. 그 봐서 알고 싶은 욕구는 어떤 실천이나 구체적인 이론의 구성 등을 목적으로 삼아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냥, 말 그대로 그냥 알고 싶은 욕구에서 이루어진다. 그런데 사람이란 바로 그런 어떤 구체적인 쓸모도 실천도 목적으로하지 않는 그것을 즐긴다. 그리고 욕구한다. 

결국 사람에게 가장 근원적인 앎에 대한 욕구의 시작, 그것은 '감각'에서 증거를 잡을 수 있단 말이다. 시각과 같은 감각 말이다. 감각, 헬라말로 aisthēsis, 아이스테시스다. 여기에서 '미학'이란 뜻의 영어 단어 aesthetics이 나온다. 물론 독일어 Aesthetik와 프랑스어  Esthhétique도 마찬가지다. 결국 감각 역시 우리가 무엇인가를 알아감에 있어서 무시할 수 없는 요소다. 어떤 식으로든 감각 경험한 것이 이성에 전달 될 때 허깨비같은 것이 아닌 정말 사실성에 근거한 합리적인 사고가 가능하다 우리는 상식적으로 그렇게 생각한다. 직접 보고자 하는 것을 여러 번 보고 그 사이 유사성을 파악하면서 어떤 원리를 추론해 내는 것이 사람이란 존재다. 신 조차도 눈으로 보고 싶어 하는 것이 사람이다. 설사 볼 수 없는 것이라도 보고 싶어 한다. 보고 싶어 한다. 그것이 사람이란 존재의 근원적인 욕구다.

유대칠 씀 2019년 10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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