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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그' 고전

<형이상학> 읽기 2

by Daechilyus Ambrosius Magnus 2019. 11. 1.

유대칠의 바로 그 고전 - 형이상학 읽기 2

“다른 동물들은 인상과 기억으로 살아가지만, 그들은 경험을 가지지 못하는 것에 비하여, 사람은 기술과 이성의 작용으로 살아간다. 사람은 기억으로 부터 경험이 일어난다. 동일한 것에 대한 여러 기억들이 하나의 경험을 만든다.” (980b25-981a1) 

한국말로 전달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여기에서 인상과 기억은 개별적인 지각에 가깝다고 생각하자. 나는 ‘이 자장면’과 ‘저 자장면’에 대한 감각 인간과 기억을 가지고 있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영화 우뢰매를 보기 전 동생과 나와 함께 대구 신도극장 옆 중국집에 간 적이 있다. 아버지는 자장면을 두 그릇 주문하셨다. 나와 동생은 남기지 않았고, 아버지는 그냥 마치 그것이 아무 것도 아닌 일상의 한 부분이라도 되는 듯이 보고 있으셨다. 그리고 영화도 같이 보지 않으셨다. 나는 동생의 손을 잡고 지정된 자리에 가서 영화를 보고 나왔다. 아버지는 극장의 밖에서 기다리셨다. 이유는 돈이 없어서였다. 자장면을 세 그릇 살 돈이 없고 영화표를 세 장 살 돈이 없었다. 과거 어느 날 나의 기억이다. 이 기억은 영화와 자장면에 대한 기억이라고 할 수 있지만, 사실 아주 구체적인 어느 자장면과 어느 영화에 대한 기억이다. 개별적인 사례(token)이지 이러한 인상과 기억에 자장면과 영화에 대한 어떤 유형(type)에 대한 것은 없다. 하지만 자장면이란 동일한 것에 대한 여러 기억은 하나의 경험, 즉 하나의 유형을 가지게 한다. 사람은 여러 개별적인 사례에서 하나의 유형을 이끌어낼 수 있다.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현대 생물학의 사실과 일치하는가 그렇지 않은가를 떠나 우리는 개별적인 지각으로 부터 하나의 유형의 가진 경험을 가진다는 것을 읽을 수 있다. 다른 동물은 잘 모르겠다. 여러 자장면에 대한 경험은 자장면에 대한 이런 저런 개별적인 사례들을 관통하는 하나의 어떤 경험을 전해준다.그리고 어쩌면 그 경험 속에서 그 대상을 지각하기도 전해 판단해 버릴지 모른다. 여러 자장면에 대한 경험이 아직 나의 혀에 다가오지 않은 자장면을 규정해 버릴지도 모른다. 그리 생각하면 경험은 앎의 뿌리내림이면서, 새로운 앎에 대한 거부가 될지도 모른다. 적당한 무지를 만들어버릴지도 모른다. 

많은 이성과의 연애는 이성에 대한 경험을 만든다. 그렇다고 과연 그 이성에 대한 경험이 앞으로 다가올 이성에 대한 최종적인 그 무엇일까? 어쩌면 경험 사실 속에서 새로운 모든 것들을 제거하고 과거의 그 경험 속에서만 대상을 마주하려 하는 것은 아닐지… 그 속에 일치하는 대상만을 찾으려 하는 것은 아닌지… 그것만으로 세상을 보려는 것은 아닌지… 그런 생각을 해 본다. 

 

유대칠 씀 

2019년 11월 1일 오전

대구가톨릭대학교 시간강사 시절 한 학생이 나에게 보내준 사실에 대한 개별적인 기억이다. 이러한 기억들이 모인 나의 경험 속 시간강사는 학생들과 고마운 시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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