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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강학회

행복하여라 2 위로가 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by Daechilyus Ambrosius Magnus 2020. 11. 6.

복되어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으리니. (마태오 5장 4절)

 

벗어나기 힘든 무력감에 홀로 슬플 때가 있습니다. 이런저런 사회적 부조리에 무력하게 당하는 자신의 모습에 홀로 슬프기도 합니다. 아무도 자신의 손을 잡고 그 억울함에 더불어 함께 분노하지 않는 그 홀로 됨에 좌절의 슬픔을 느끼기도 합니다. 물론 이별과 같은 매우 개인적인 사정으로 홀로 슬프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개인적 사연의 슬픔도 더불어 옆에서 울어주는 이가 없다면 그 슬픔은 더욱더 깊어집니다. 가만히 생각하면 이 모든 슬픔은 슬프고 싶어 슬픈 것이 아닙니다. 슬퍼지게 된 것입니다. 자발적으로 스스로 손들고 나가서 슬픈 것이 아니라, 슬프고 싶지 않지만 그렇게 된 것입니다. 당한 것입니다. 

사회적 부조리는 그것으로 누군가는 사회의 성과를 누리고 누군가는 그 성과로 아파하는 사회의 두 나누어짐에서 난 사회적 상처입니다. 그 상처를 거름으로 누리고 살아가는 이들은 점점 부조리가 깊어지고 깊어지면 더 많은 것들을 누리고 더 많은 것을 소유하게 됩니다. 그러면 어느 순간 그들의 눈치를 보며 그들로 인하여 아픈 이들의 옆엔 아무도 없게 됩니다. 억울하면 너도 강자가 되면 그만이라는 잔인한 논리 속에서 강자의 눈치를 보면서 그 사회의 가장 낮은 자리 , 그 아픔의 자리엔 너무도 더불어 있지 않습니다. 그렇게 그들에겐 슬픔이 강요됩니다. 

전태일의 그 깊은 상처의 옆에 누가 있었나요. 자신도 가난하지만 가난한 여공에게 따뜻한 붕어빵을 나누던 그 따스한 전태일의 그 깊은 외로운 홀로 있음의 아픔에 당시 지식인들 가운데 누가 그의 옆에 그와 더불어 있었나요. 그저 지식인일 뿐, 지혜인은 아니었나 봅니다. 그저 지식으로 시험을 잘 치는 사람이지 더불어 아파하고 웃는 그러한 사람들은 아니었나 봅니다. 전태일의 그 슬픔도 참 외로운 슬픔이었습니다.

종교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그 아프고 힘겨운 외로움을 달래어주는 하느님을 그저 기다리고 있는 것이 교회의 일일까요? 그것이 신앙을 가진 이들의 일일까요? 어쩌면 그 슬퍼하는 이, 외롭게 슬퍼하는 이의 그 아픔 당함의 옆에 하느님의 손과 발이 되어 위로가 되고 힘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요? 그 슬픔의 옆에 더불어 슬퍼하는 하느님의 손과 발이 되는 것보다 이 세상 부조리의 어지러움으로부터 떨어져 그저 벽이나 보면서 기도하고 사는 이기적 신앙이 더 하느님을 향한 신앙일까요?

슬프고 아파하는 이에게 하느님 위로의 손과 발이 되어야 하는 것은 바로 우리이어야 합니다. 그렇게 누군가에게 하느님의 기적으로 다가가야 하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어야합니다. 자본주의 사회, 모든 것이 돈으로 계산되는 사회 속에서 돈으로 어떤 것도 계산하지 않고 그저 아프고 힘든 이의 옆으로 다가가 그들과 더불어 있을 때, 바로 그 더불어 있음의 자리에 하느님이 더불어 있으시고 더불어 있는 그 모두가 하느님의 품에서 행복으로 누릴 것이라 믿어 봅니다. 

오늘도 다짐을 합니다. 슬퍼하는 이들, 그 외로운 슬픔에 나의 존재가 하느님의 손과 발이 되어 다가가자. 다짐해봅니다. 가만히 그들을 위해 기도할 것이 아니라 나의 존재가 그 기도의 응답이 되도록 노력하자.  다짐해봅니다.

 

2020 10 05 

유대칠 암브로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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