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2 ‘있는 것의 유비성과 일의성’
‘있는 것’은 ‘있기’라는 점에서 모든 ‘있는 것’엔 서로간에 차이가 없다. 즉, ‘있는 것’이라는 개념은 ‘있는 것’이라는 말로 서술되는 모든 하위의 것에 일치한다. 차이가 없다. 내 눈앞에 잉크병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옆에 놓인 나의 에스프레소잔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모든 ‘있는 것’은 서로간에 어떤 차이도 없이 사용될 수 있는가라는 매우 형이상학적인 물음이 여기에서 던져진다. 이러한 생각은 고대 철학자인 ‘파르메니데스’(Parmenides)나 중세 철학자인 ‘둔스 스코투스’(Duns Scotus)의 사상엔 비슷하게 적용될 수 있다. [있는 것]의 ‘일의성’을 주장하기 때문이다.스스로 자존하며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하느님은 ‘있는 것’이다. 반면 변덕스러운 존재이며, 신으로 인하여 존재할 뿐이며, 유한한 존재인 인간도 ‘있는 것’이다. 과연 이 둘은 같은 차원에서 ‘있는 것’이라고 불리어 질 수 있는가? 둔스 스코투스와 같은 이는 어차피 인간 지성 가운데 언어의 차원에서 다루어지는 그 말로 ‘있는 것’엔 신에 대한 것이든 인간이에 대한 것이든 아니면 그이외 어떤 것에 대한 것이든 차이가 없는 일의적인 것일 수 밖에 없다 할 수 있다. 같은 의미를 가지기에 이 말을 듣고 말하고 사용하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리고 존재론적 신은 그 언어의 외부, 즉 ‘있는 것’이란 인간 언어의 외부에 있다. 인간 지성의 외부에 신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인간은 언어로 생각하고 언어 활동한다. 그러니 ‘있는 것’이란 말로 서로의 생각을 표현하고 전달 받아야 한다. 어쩔 수 없다. 그러나 ‘있는 것’은 우유적인 있는 것, 즉 우연히 있는 것 혹은 다른 것에 의존하여 있는 것과 스스로 자존하는 하느님과 같은 존재에 동일한 의미에서 ‘있는 것’이란 것을 사용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 등장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이런 이들은 ‘있는 것’의 일의 성이 아니라, ‘있는 것’의 유비성을 주장한다. 즉 하느님과 하느님의 피조물은 동일하게 ‘있는 것’이란 단어로 서술될 수 없다는 것이다. 존재론적 간격이 너무나 서로 멀어서 동일한 단어로 이 둘을 서술할 수 없으며 어쩔 수 없이 ‘유비적으로’ 서술할 뿐이라 한다. 물론 현대 개신교 사상가인 칼 바르트와 같은 이는 자립적으로 ‘있는 자’인 하느님과 다른 것에 의존하여 ‘있는 것’ 사이에 동일한 의미의 ‘있는 것’이 적용될 수 없다며 ‘다의성’을 주장하는 이가 있기도 하다. 이 둘 사이 어떤 공통점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토마스 아퀴나스는 하느님과 피조물은 모두 ‘있는 것’으로 서술되지만 이 둘 사이에 동일한 ‘있는 것’은 일의적인 것도 다의적인 것도 아닌 ‘유비적’인 것이라 한다. 앞으로 다루게 될 초월 범주의 ‘하나인 것’(unum), ‘좋은 것’(bonum), ‘참된 것’(verum) 등에 대한 논의에서도 이 논의는 다시 확인되어야 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 즉 ‘있는 것’ 전체는 모두 ‘있는 것’이며, ‘하나인 것’이고, ‘좋은 것’이고 ‘참된 것’이다. 이들 초월 범주도 사실 신과 피조물 사이에 유비적으로 서술되는 것이라 토마스 아퀴나스는 본다. 인간 유대칠이 ‘좋은 것’과 하느님이 ‘좋은 것’이 같은 차원에서 같은 의미로 다루어질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유대칠 씀
2020년 1월 11일
이 글의 원본은 22살때 완성한 것이다. 나에겐 추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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