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3 ‘있는 것’의 초월 범주 혹은 초월적 특성
‘있는 것’은 ‘있다’는 차원에서 본다면 ‘있는 것 모두’는 ‘하나의 것’(unum)이다. 있는 것은 그 스스로 분할 될 수 없는 ‘하나의 것’이다. ‘있는 것 모두’는 ‘하나의 것 모두’라고 할 수 있다. ‘유대칠’은 ‘있는 것’이다. ‘있는 것’이란 차원에서 생각하면 나누어질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있는 것 모두’는 ‘하나로 있는 것 모두’이다. 동시에 ‘있는 것’은 ‘참인 것’(verum)이다. 가짜로 있는 것이나 거짓으로 있는 것은 참된 의미에서 있는 것이 아니다. 정말 ‘있는 것’은 ‘참된 것’이다(omne ens est verum). 그리고 ‘있는 것 모두’는 ‘좋은 것’(bonum)이다. 불상은 이 세상을 보면서 살며시 웃는다. 너무 과도한 웃음도 무표정도 아니다. 적당하게 웃는다. 미소를 보인다. 싯다르타의 눈에 보인 이 세상은 그렇게 좋은 것이다. 슬픔도 아픔도 결국은 우주 전체의 질서 속에선 나쁜 것이 아니다. 죽음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싯다르타의 웃음을 ‘아르케익 스마일’이라 한다. 플라톤의 세계관에 따르면 이 세상의 ‘있는 것 모두’는 그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모두 ‘좋은 것’이다. 나쁜 것이 없다. 즉, 이 세상의 ‘있는 것 모두’는 결국 ‘좋은 것 모두’라고 할 수 있다. 더 좋고 덜 좋은 것은 있을 수 있지만 근원적으로 나쁜 것은 없다. 그런 의미에서 ‘있는 것’ 모두는 ‘좋은 것’이다.(omne ens est bonum) 결국 ‘있는 것’이란 말은 ‘하나의 것’, ‘참된 것’, ‘좋은 것’과 서로 규환하여 사용될 수 있는 말이다. 이 세상에 ‘있는 것 모두’는 ‘하나로 있는 것’이고, ‘참된 모두’이고 ‘좋은 모두’이다.
“있는 것은 참된 것이다.”
‘참’, 즉 ‘진리’는 이성과 사물의 상응된 합치로 가능하다. ‘있는 모든 것’은 이성에게 인식될 수 있는 ‘가지적인 것’이다. ‘알려질 수 있는 것’이란 말이다. 경험으로 알 수 있는 것이든 경험이 아닌 다른 것으로 알려지는 것이든 하여간 ‘알려질 수 있는 것’이다. ‘알려질 수 있는 것’으로 ‘있는 것’만이 이성에 의하여 고밍과 궁리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이성의 고민과 궁리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을 두고 이성이 연구할 순 없다. 그렇기에 ‘있는 모든 것’은 이성과의 관계 속에서 논의된다. ‘있기’를 가짐이란 곧 이성과 관련계됨을 의미하기도 한다. ‘있는 것’의 모든 영역은 이성의 영역과 그 범위가 같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이런 뜻에서다. 이렇게 ‘있는 모든 것은 참된 것’이 된다.
“있는 것은 좋은 것이다.”
이성의 대상이 이와 같이 ‘참된 것’이라면,의지의 대상이란 측면에서는 ‘좋은 것’(bonum)이다. 좋음이란 의미할 만한 것을 두하는 하는 말이다. ‘있는 모든 것’은 어떤 현실태를 가진다. 이는 어떤 완전성을 지닌다는 뜻이다. 그리고 완전성을 의지할만한 것이 된다. ‘좋음’ 가운데는 ‘아름다움’도 있다. 그런데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어야 하지만,‘아름다운 것’은 ‘참된 것’이며, ‘좋은 것’이다. 눈 앞에 풍경이 아름다운 것은 참으로 인식 대상으로 주어져있어서 그런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감각할 만한 것, 시각으로 보려는 욕심이 생길 만한 것도 되기에 아름다운 것이다. 이렇게 ‘아름다움’은 ‘참’과 ‘좋음’의 일치에서 가능하다.
이렇게 보면, ‘있는 것’은 이성의 측면에서는 인식의 대상으로 ‘참된 것’이며 의지의 대상으론 ‘좋은 것’이고 이성과 의지 모두의 대상으로 ‘아름다운 것’이다.
또 ‘있는 것’은 다른 ‘있는 것’과 구별되는 ‘어떤 것’(aliquid)이다. 저기 무엇이 있다고하는 것은 ‘어떤 것’이있다는 말이 된다. ‘있는 모든 것’은 ‘어떤 것’이기도 하다. 또 ‘있는 것’은 ‘실재(의 것)’(res)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참된 것’, ‘좋은 것’, ‘하나의 것’, ‘어떤 것’, ‘실재의 것’은 모두가 ‘있는 것’와 바꾸어 사용할 수 있는 있ㄴㄴ 것의 초월 범주이며 초월적 특성이다. ‘있는 모든 것’은 ‘좋은모든 것’이고 ‘참된 모든 것’이며‘하나로 있는 모든 것’이다.dl와 같은 초월 범주의 것들은 서로 사고상으로 구별될 뿐이며 실재로 구별되는 것은 아니다.
전통 스콜라 철학에서 ‘있는 것’에 대한 이와 같은 초월 범주, 즉 어떤 개별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있는 것 모두’에 공통적으로 공통적으로 서술될 수 있는 초월 범주는 칸트(I.Kant)가 이야기하듯이 선험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있는 것’의 ‘초월적인 특성’이며, ‘객관적인 것’에 근거한다. 흔히 스콜라철학자들이 라틴어로 transcendentalis라고 하는 ‘초월(超越범주’라고 하는 것 혹은 ‘초월적 특성’이라 하는 것은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개별적인 상황과 차이를 초월하여 ‘있는 것 모두’에 적용되는 것으로 ‘참된 것’, ‘좋은 것’, ‘하나의 것’, ‘아른다운 것’ 등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칸트가 독일어로 transzendental라고 한 것은 중세 혹은 근대 스콜라 철학자들이 사용하는 transcendentalis와 다르다. 즉 객관적 존재의 초월적 속성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칸트는 이와 다르다. 칸트는 그의 [순서이성비판]에서 다음가 같이 적고 있다.
“나는 대상들이 아니라 대상들 일반에 대한 우리의 선험적(a priori) 개념들을 탐구하는 모든 인식을 선험론적(transzendental)이라고 부른다. 이런 개념들의 체계를 선험론-철학(Transzendental-Philosophie)이라 부를 수 있겠다.”([순수이성비판], A 11 아래)
칸트는 대상이 아니라, 대상들 일반에 대한 우리의 선험적(a priori) 개념들을 탐구하는 모든 인식을 transzendental이라 한다.바로 이러한 점에서 칸트는 스콜라 철학자들의 그것과 다르다. 한국어로 달라야 할 것이다. 스콜라철학자들은 ‘초월 범주’ 혹은 ‘초월적 특성’이라 하는 것이 바르다. 그러나 칸트는 이미 객관적 대상에 대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객관적 대상의 초월적 속성에 대한 것도 당연히 아니게 된다. 스콜라철학자들의 초월범주는 칸트와 다르다. 그것에 의식 외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인식 대상, 즉 존재론적으로 유의미하게 존재하는 바로 그 객관적 대상의 초월적 특성에 대한 것이다.
칸트는 자신의 관심사가 대상들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이 말은 자기 철학의 관심사가 아리스토텔레스와 중세 이슬람 철학자들 그리고 중세와 근대 스콜라 철학자들이 이야기한 ‘있는 것인 한에서 있는 것’(ens qua ens)가 아니라고 한다. 칸트가 스콜라철학에서의 ‘초월범주’를 모른 것이 아니다. 그의 [형이상학 강의]에 보면 과거 이론을 이야기하듯이 ‘있는 것’과 ‘선한 것’ 그리고 ‘참된 것’ 등에 대한 논의가 한 줄 지나가듯 나온다. 문제는 그것이 칸트에게 그것이 주된 관심이 아니다. 스콜라철학자들이 칸트의 철학이 다루는 것이 주된 관심사가 아니듯이 말이다. 스콜라철학자들은 대상으로 있는 ‘있는 것인 한에서 있는 것’이 처한 여러 가지 서로 다른 차이와 조건을 초월한 것, 즉 초월범주로 ‘있는 것’, ‘좋은 것’, ‘참된 것’... 등을 다루었다. 칸트는 바로 이러한 것에 관심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칸트는 스콜라철학자들이 초월범주라는 것에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다루는 것은 칸트의 철학이 아니라, 스콜라 형이상학임을 말해 둔다. 그 말은 우리가 다루는 것은 우리의 의식 외부에 존재하는 ‘있는 것으로 있는 것’의 차원에 모든 ‘있는 것’의 여러 가지 서로 다른 차이에도 서술되는 바로 그 초월범주를 다루고 있다.
[보론- 난해한 설명에 대한 혹시나 하는 보충]
아리스토텔레스는 10개의 범주를 제안한다. 10개의 범주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술어가 된다. ‘유대칠은 인간이다’라는 것은 유대칠이란 개별실체(제1실체)에 대한 보편실체(제2실체)가 술어가 된 경우다. 유사한 경우는 ‘나의 고양이는 동물이다’와 같은 경우다. 개별적 실체인 ‘나의 고양이’이에 보편적 실체인 ‘동물’이 술어로 경우다. 이런 식으로 실체, 양, 성질, 관계, 장소, 시간, 위치, 상태, 능동, 수동과 같은 술어가 가능하다고 했다.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10가지 범주는 존재하는 개별적인 존재들에 대한 술어로 기능했다. 그런데 모든 개별적인 존재들의 개별적 상황을 초월하여 적용되는 범주가 제안되었다. 바로 초월범주다. ‘유대칠은 대구에 있다’와 ‘현아는 서울에 있다’라는 명제에서 주어가 되는 개별실체인 ‘유대칠’과 ‘현아’는 각각 다른 장소의 범주로 서술되었다. ‘유대칠은 어제 대구에서 친구와 포도주를 마신다’라는 명제와 ‘오늘 현아는 서울에서 친구와 삼겹살을 먹는다’라는 명제를 보다. 이 두 명제는 각각 서로 다른 개별실체에 대하여 서로 다른 장소와 서로 다른 능동(행동)으로 서술한다. 그러나 이러한 개별적 상황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즉 개별적 차이를 초월하여 동일하게 서술되는 것이 있다. 바로 ‘초월범주’다. ‘유대칠’과 ‘현아’는 모두가 ‘있는 것’으로 서술된다. 이 서술은 시간과 공간의 차이 그리고 그 이외 어떤 차이를 초월하여 적용된다. ‘유대칠’과 ‘현아’가 각각 남성과 여성이지만 인간이란 존재의 차원에서 ‘하나의 것’이다. 그리고 ‘하나의 것’이란 점에서 각각의 개별 실체로 나누어도 ‘유대칠’과 ‘현아’는 각각 서로 ‘하나의 것’이다. 그렇기에 ‘하나의 것’이란 사실에서 보자면 인간이란 보편실체도 ‘하나의 것’이고 각각의 인간과 실체도 ‘하나의 것’이다.그리고 ‘유대칠’로 ‘있는 것’은 그 자체로 이성에 의하여 인식될 수 있는 대상이다. 그런 점에서 ‘유대칠’은 가지적이다. 이성에 의하여 인식되어지며, 유대칠로 ‘참된 것’이라 인식될 때 ‘유대칠’인 진정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쉽게 ‘가짜 유대칠’은 ‘진정 있는 것이 아니다’.‘가짜 유대칠’이 아닌 ‘진짜 유대칠’이 형이상학과 존재론의 대상이다. 또 ‘유대칠’이란 하나의 인간은 인간을 구성하는 질료(materia)와 그 질료를 유대칠이란 하나의 존재로 존재하게 하는 형상(forma)의 결합이다. 이 두 존재론적 요소가 결합하여 목적한 것이 ‘유대칠’이란 존재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의 ‘유대칠’은 ‘유대칠’이 될 가능성에 있는 것의 현실성이다. 그리고 완전하지 않은 미완의 유대칠의 완전성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유대칠’은 무엇인가의 목적, 즉 무엇인가가 추구하는 바의 것, 바로 ‘좋은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현실적인 것’ 은 어떤 가능태로 있던 것이 ‘현실화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세상 ‘현실적으로 있는 모든 것’은 무엇인가의 목적이다. 그리고 그 목적이 이루어진 좋아진 것, 즉 좋은 것이 바로 우리가 보는 현실적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있는 모든 것’은 ‘좋은 것’이다. 그리고 ‘있는 것’과 ‘좋은 것’은 모두 이성에게 인식되어질 때 유의미하다. 이성의 인식 외부에 있다면 그것은 있음과 없음의 여부 자체가 논의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형이상학과 존재론의 대상이 되기 위해서는 이성에게 부합되는 ‘참된 것’, ‘참ㅇ로 인식되는 것’ 이어야 한다. 정리하면 형이상학의 대상은 우리에게 ‘참으로’로 ‘있는 것’으로 여겨져야 하고 그 모든 것은 그 자체로 미완의 것이 현실화된 ‘좋은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있는 것’, ‘하나의 것’, ‘좋은 것 ’, ‘참인 것’은 그 자체로 ‘있는 모든 것’이 어떤 개별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차이를 초월하여 서술되는 초월범주이다. ‘유대칠은 미인이 아니다’, ‘현아는 미인이다’, ‘유대칠은 포도주를 좋아한다’, ‘설현은 은악을 좋아한다’, ‘유대칠은 대구 달성군에 산다’, ‘현아는 서울에 산다’와 같이 서로 다른 개별실체에 대한 서로 다른 범주로 서술된다 하여도 이런 모든 차이에도 불구하고 ‘유대칠’과 ‘현아’ 그리고 ‘설현’은 모두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있는 것’이고 ‘참된 것’이며‘좋은 것’이고 ‘하나의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모든 대상들에 대한 여러 차이들에도 불구하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초월적 범주로 사고 상으로 구분되는 초월범주이며 이에 대한 논의다.
유대칠 씀
(이 글의 원본은 22살에 쓴 글이다. 나에게 추억이다.)
2020.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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