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4 ‘있는 것’의 존재론적 구조
유대칠 (토마스철학학교 오캄연구소) 강의
‘있는 것’은 ‘있기’와 ‘이기’, 즉 ‘존재’와 ‘본질’로 구성된다. ‘있기’는 무엇으로 구성되지 않는다. 그 자체로 순수한 존재론적 행위다. ‘이기’ 혹은 ‘본질’은 ‘실체적 본질’과 ‘우유적 본질’이 있다. ‘실체적 본질’은 다른 것에 의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존재하는 것을 하는 말이다. ‘유대칠’의 실체는 ‘유대칠임’이다. 엄밀하게 ‘유대칠’이라는 그의 이름도 아니다.‘유대칠’이라는 몸도 아니다. 교통사고로 얼굴이 조금 달라져도 ‘유대칠’은 ‘유대칠’이다. ‘유대칠’의 머리 모양도 아니다. ‘유대칠’이 ‘현아’의 머리 모양을 한다 하여도 ‘유대칠’은 ‘유대칠’일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유대칠’의 실체적 본질, 즉 실체는 감각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감각을 넘어서 있다. 감각의 대상이 아니지만 ‘유대칠’을 ‘유대칠’로 만드는 존재론적 힘이 바로 ‘실체’ 혹은 ‘실체적 본질’이다. ‘실체’와 달리 ‘유대칠’에서 의존되어 존재하는 것들이 있다. 유대칠‘의 성격’, 유대칠‘의 몸무게’, 유대칠‘의 키’, 유대칠‘의 피부색’ 등은 변화한다. 그러한 이러한 변화가 ‘유대칠’이란 존재를 ‘유대칠’이 아니게 할 수 없다. 실체적 본질에 영향을 주지 않지만, ‘유대칠임’이라는 실체적 본질 없이 독립적으로 유대칠‘의 성격’, 유대칠‘의 몸무게’ 등은 존재할 수 없다. 이러한 것을 ‘우유적 본질’이라 한다. 우유적 본질은 실체적 본질에 의존한다. 실체적 본질은 우유적 본질이 단지 말로 존재하는 것을 넘어 현실적으로 존재하게 위한 존재론적 ‘의지처’가 된다. 그러나 실체적 본질은 이와 다르다. 그 스스로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고 독립된 존재로 하나의 존재는 무엇으로 존재하게 하는 ‘있는 것’의 중심이며 근본이다.
‘실체’(substantia)와 ‘우유’(accidens)에서 ‘우유’는 감각의 대상이다.그러나 실체는 감각의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전혀 감각되지 않는 바로 그것이 ‘있는 하나의 것’을 참으로 ‘무엇으로 있게 하는 힘’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론적 사유는 바로 이 ‘실체’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어찌 보면 ‘참으로 무엇으로 있는 것’인 ‘실체’는 우선 시간 고대와 중세 스콜라 형이상학의 가장 무거운 고민거리이고, 일종의 과제였다.그러면 이러한 고민은 우리에 일상과 무관한 그러한 고민인가? 그렇지 않다. 예를 들어보자. 유대칠을 사랑한 사람 있었다. 유대칠은 그렇게 잘 생긴 얼굴이 아니다. 머리 모양도 그렇게 세련되지 못했다. 키는 크지만 근육질의 잘 난 몸을 가지지도 않았고, 교통 사고 이후 목발에 심한 상처가 남아 간혹 다리를 절기도 한다. 그렇게 큰 부자도 아니다. 거기에 엄청나게 뛰어난 지능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 유대칠을 사랑하는 한 사람을 가정해보자. 그 사람의 사랑은 유대칠의 우유, 즉 유대칠에게 잠시 존재하다가 사라지거나 유대칠의 실체적 본질이 아닌 우유적 본질을 향한 사랑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그의 사랑은 신비다. 유대칠을 유대칠로 있게 하는 바로 그 실체적 본질을 향한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실체’와 ‘우유’ 혹은 ‘실체적 본질’과 ‘우유적 본질’에 대한 고민은 그저 추상적일 뿐이며, 우리의 삶과 완전히 무관한 그러한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 삶의 가치와 깊은 관련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론을 따르는 이들은 실체, 즉 실체적 본질은 ‘형상’(forma)과 ‘질료’(materia)로 이루어져있다고 생각했다. ‘형상’은 ‘무엇임’을 주는 요소다. ‘질료’는 형상이 이루려는 ‘그 무엇임’을 가능하게 해주는 가능성의 총체다. 예를 들어보자. ‘유대칠’이란 ‘참으로 무엇으로 있는 것’, ‘실체’는 ‘유대칠’이란 ‘형상’과 ‘유대칠’이란 ‘형상’을 현실적으로 존재하게 하는 많은 가능성으로 이루어져있다. ‘유대칠’을 존재하게 하는 그의 몸도 질료이고, 그가 자라며 만나고 살아온 모든 조건들도 ‘유대칠’을 ‘유대칠’로 존재하게 하는 질료가 될 수 있다. 쉽게 ‘초코렛 케익’의 예를 들어보자. ‘초코렛 케익’을 ‘초코렛 케익’으로 만들기 위해서 밀가루와 초코렛과 같은 ‘초코렛 케익’이 되기 위한 ‘질료’는 그냥 모아 둔다고 ‘초코렛 케익’이 되지 않는다. 이것을 ‘초코렛 케익’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그 가능성을 종합하여 ‘초코렛 케익’으로 존재하게하는 ‘무엇을 현실적으로 무엇으로 존재하게 하는 힘’이 필요하다. 바로 ‘형상’이다. 나의 눈 앞에 두 권의 같은 책이 있다. 같은 무엇임을 가졌다는 점에서 이 둘은 같은 ‘형상’을 가졌다. 그러나 같은 ‘형상’이 서로 다른 종이와 잉크를 통하여 현실화되어 서로 다른 존재로 존재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는 같은 형상 아래 서로 다른 다양한 개체가 가능한 원리는 바로 ‘질료’ 때문이라 하였다. 이러한 원리를 ‘개체화의 원리’(principium individuationis)라고 한다.그러나 유명론자인 오캄은 이러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는다. 수용하지 않는다. 오캄은 존재하는 모든 것은 서로 다른 자체적인 무엇임으로 존재하기에 같은 형상 아래 서로 다른 존재가 되기 위해 질료의 도움이 필요하다 생각하지 않았다. 원래부터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서로 다른 존재로 존재하고 있으며, 각자 자신의 무엇임으로 존재한다. 두 권의 책이 같은 형상으로 ‘동일성’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유사성’을 유지하며 서로 다른 존재이기에 서로 다른 존재로 존재하기 위한 다른 요소는 필요 없다고 하였다.
정리해보자. ‘있는 것’(ens)은 ‘있기’(esse 혹은 existentia)와 ‘이기’(essentia)로 구분된다. 그리고 ‘이기’, 즉 ‘본질’ 혹은 ‘무엇임’은 ‘실체’와 ‘우유’로 구성된다. 또, ‘실체’는 ‘형상’과 ‘질료’로 이루어진다.
[보론 – 라틴어 esse와 existentia의 구분]
라틴어 esse는 ‘있기’와 ‘이기’ 모두 다 의미할 수 있다. 영어의 be 동사를 생각하면 쉽다. I am a boy라고 할 때 am, 즉 be 동사는 실존이나 존재를 나타내지 않으며, 한국어 형용사 ‘있다’의 의미와 같지도 않다. 오히려 주어와 보어를 연결하는 연계사(copula)의 역할을 할 뿐이다. 즉 무엇임을 이야기하는 수단으로 사용될 것이며, 존재를 나타내지 않는다. 하지만 I am in my room이라고 할 때 같은 영어 be 동사는 한국어 형용사 ‘있다’라는 실존과 존재의 의미를 가진다. 이와 같이 인도유럽어족에선 esse와 be 동사와 같은 동사들은 흔히 ‘있다’와 ‘이다’가 모두 다 가능하다. 이에 존재론적으로 이를 구분하기 위해 ‘있기’의 의미로 사용될 때에는 existentia라도 사용한다. 이를 ‘있기’, ‘존재하기’, ‘존재’, ‘있음’ 등으로 사용하게 번역되어 사용되는데, 어느 것으로 고집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단지 실존하고 있음 혹은 존재하고 있음, 즉 존재의 유무에 대한 표현으로 서로 헛갈릴 수 있는 표현의 정리 차원에서 등장한다. 그러나 ‘있는 것’(ens)은 ‘있기’(esse)와 ‘이기’(essentia)로 이루어졌다해도 되고 ‘실존’(existentia)과 ‘본질’(essentia)도 있다 해도 되겠다.
유대칠 (토마스철학학교 오캄연구소) 강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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