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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존재론

너 없이 나, 나는 결국 너와 더불어 있음이다.

by Daechilyus Ambrosius Magnus 2020. 2. 26.

내 앞에 너를 이기고 구원을 얻으려 한다면, 참으로 나쁜 구원이다. 너의 아픔을 거름으로 얻는 구원이라면 참으로 나쁜 구원이다. 결국 나는 너와 싸워야 한다. 때론, 나만 구원되기 위해 침묵해야 한다. 그냥 그대로 너는 지옥에 가고 나는 천국에 가기 위해 말이다. 너와 싸우다 너가 아프면 그것은 신의 선택을 받지 못한 너의 운명이고, 너와 싸우다 내가 아프면 그것은 신을 향한 고난의 길이다. 신앙의 길이다. 그 신앙에 너는 없고 나만 있다.

사회에 무리를 일으키는 많은 종교가 그렇다. 악이라도 스스로는 선이라 한다. 아무리 사악해도 보지 못하고 생각하지 못한다. 보이고 생각하는 것은 그저 '나' 하나다. 예수천국 불신지옥! 결국 신도 나 한 사람의 사후 행복을 위한 수단이다. 그 이상한 이기심의 동지가 된다면 벗이지만, 아니라면 적이 되기도 한다. 사라져야할 그 무엇이되어 버린다. 없어져야할 악마말이다. 그래서 종교는 다툼의 이유가 되고, 도덕을 가장한 비도덕의 수단이 된다. 너를 힘들게하고 너의 아픔과 불행이 마땅히 이루어져야 할 그 무엇으로 믿어 버린다. 너는 신의 저주를 받은 존재이고 너 아닌 나는 신의 선택을 받은 존재이고, 너의 불행을 볼 때마다 말도 되지 않는 저주니 하는 독설로 나의 우월함을 드러내지만, 사실, 항상 불행해야 할 너가 있을 때만 우월한 참으로 못된 우월함이다.

이러한 사악한 종교들이 굳이 신생 종교만의 문제가 아니다. 오랜 종교도 거대 종교도 크게 다르지 않을 때가 많다. 다른 종교보다 무엇이라도 더 크고 더 높고 더 많은 것을 통하여 자기 우월감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것도 아니면 자기만 정답을 아는 종교라며 우월감 속에서 너의 아픔을 볼 시간이 없다. 그러니 사랑을 이야기하지만 막상 그 종교에 너는 없다. 나만 있다. 나만 있는 종교에 사랑은 무엇일까? 진짜 사랑은 그 종교에서 힘을 가질까? 

사회적 무리를 일으키고 많은 이들이 두려워할 전염병이 퍼지고 그 일 가운데 한 종교가 있어도 무엇보다 더 자기 종교를 생각한다. 자기 종교에 무엇이 이득일지 생각한다. 필요하다면 공개하지 않을 것은 비밀로 하고, 그저 지켜본다. 아무 것도 없이 그냥 본다. 자기들이 가장 억울하고 가장 큰 피해자라면서 말이다. 너가 없는 종교다. 이런 저런 봉사를 해도 그것은 정말 제대로 사랑이 아니다. 제대로 사랑은 온전한 남으로 너를 향한다. 너의 앞ㅇ서 이기심을 내려 놓고 너의 눈물이 나의 눈물이라는 것이 사랑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그저 나의 편만을 생각하고 우리편만을 생각한다. 그렇게 자기 종교의 이기심 속에서 오직 '나' 외치고 그 밖에서 아픈 너를 지나친다. 참 슬프다.

한 종교의 문제가 아니다. 어쩌면 우리 사회가 그렇다. 이기심 속에서 나에게 피해 없이 최대한 이 모든 부조리를 너의 탓으로 돌려버린다. 그러니 다시 재발하고 재발한다. 나의 몫만이 나의 노력으로 바뀌지만 모든 것의 너의 탓이라면 내 노력으로 달라질 것이 없다. 그냥 포기하고 강한 자의 눈에 들 생각이나 한다. 부끄러운 현실이다. 참 부끄러운 현실이다. 모든 것이 남의 탓이라면 나의 운명은 오직 남의 결정으로 움직이는 것일 뿐인가 말이다. 

하여간 참 슬프다. 슬프다.

유대칠 (오캄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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