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자리는 고난의 자리다. 철학은 자기 소리를 내는 것이다. ‘자기 무시’ 가 민중을 침묵하게 하는 힘이 있다면, 철학은 자기 소리를 내게 한다. <대한민국철학사> 368쪽
사악한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사람만 있다면, 마스크가 아니라, 방탄조끼를 입고 무장을 하며 살아도 불안했을 것이다. 살아가면서 나는 참으로 많은 무시와 조롱을 받았지만 또 나를 지금까지 있게 한 고마움 또한 너무나 많았다. 나란 존재는 어쩌면 그 고마움의 순간이란 조각들이 이른 그 무엇일지 모른다. 나의 존재 자체가 이미 너를 불러 있고 우리 속에서 있을 수 밖에 없는 그 무엇이란 말이다.
그러나 사악한 이들도 있다. 이 와중에도 돈 욕심에 타인의 불안이나 아픔은 보이지 않는 사람들도 있고, 이 불안을 무지하고 무식한 이의 어리석음 정도로 치부하며 나는 너와 다르다는 생각으로 또 다른 방식의 조롱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사람도 있다. 어쩌면 나도 그럴지 모른다. 어느 정도 선하며 어느 정도 악한 그 경계의 어딘가에서 열심히 나는 우리 속에서 나의 뜻을 찾으려 한다.
나는 온전히 너의 아픔을 다 품을 수 없다. 온전히 너의 아픔이 나의 아픔일 수도 없다. 그래서 너는 나에게 멀리 있는 그 무엇이지만, 동시에 우리 가운데 나에게 뜻으로 다가온 내 존재의 터다. 너의 아픔이 온전히 있는 그대로 나의 아픔이 아니기에 나는 너의 아픔을 향하여 더 안아준다. 그렇게 너의 아픔이 온전히 나의 아픔은 아니지만, 우리의 아픔에 품어지도록 말이다.
'나' 하나의 드러남의 크기 만큼 '나' 하나의 악은 쌓인다.
나는 생각보다 너에게 아픔을 주는 가해자다. 나쁨이다. 그 나쁨을 알 수록 나는 좋음의 터가 될 준비를 할 수 있다. 나의 좋음은 나의 이기심과 욕심으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너의 눈물과 아픔의 터가 될 때 가능함으로 말이다. 그때 너 역시 나와 더불어 웃고 나 역시 너의 더불어 웃게 된다.
나의 무지와 무식과 불안이 너에게 조롱의 대상이 되지 않아야 하듯이 너의 무지와 무식과 불안 역시 나에게 조롱의 대상이 아닌 안아주어야 할 그 무엇이다. 우리가 되어야할 그 자리에 드러난 우리 있음의 터다. 만남의 터다.
유대칠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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