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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존재론

유대칠 암브로시오의 성경 읽기 7

by Daechilyus Ambrosius Magnus 2019. 9. 25.

2019년 9월 7일 토요일 새벽 

 

허무로다, 허무! 코헬렛이 말한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태양 아래에서 애쓰는 모든 노고가 사람에게 무슨 보람이 있으랴? 한 세대가 가고 또 한 세대가 오지만 땅은 영원히 그대로다. 태양은 뜨고 지지만 떠올랐던 그곳으로 서둘러 간다. 남쪽으로 불다 북쪽으로 도는 바람은 돌고 돌며 가지만 제자리로 되돌아온다.” 코헬렛 1장 2-6절

 

히브리말로 ‘허무’라는 말은 ‘입김’과 ‘실바람’을 뜻한다. 참 적절한 말이다. 입김은 금세 사라진다. 우리네 호흡이란 것도 결국 입김이다. 아무리 길다 해도 금세 사라진다. 죽는다. 지금 치열한 모든 것은 어느 순간 찾아온 죽음 앞에서 그저 허무할 것이다. 그러니 입김이나 실바람이 추상적으론 허무라는 의미를 가지게 된다. 히브리말의 그 흐름을 이렇게 이해할 수 있겠다. 당시 이 세상을 ‘태양 아래’라고 표현하곤 했다. 구약만의 경우가 아니다. 이집트와 그리스에서도 보이는 말이다. 그래, 태양 아래 이 세상, 태양과 같은 높은 곳에서 보면 참으로 허무한 곳일지 모른다. 죽으라 노력해도 결국은 100년을 살지 못하고 죽는다. 과거 없었던 사람이 치열하게 살다가 다시 처음처럼 없어진다. 아무리 노력해도 달라지지 않는다. 없어진다. 죽는다. 그런데 태양이 뜨고 지듯이 그렇게 없는 것에서 시작하여 없는 것으로 돌아갈 뿐이다. 저 위의 세상에서 보면 우리네 사람 사는 모습이 그럴지 모른다. 6절의 ‘제자리로’라는 말은 자기 회전이란 말이다. 돌고 돌아 다시 제자리다. 없다가 있다가 다시 없어진다. 

 

너무 당연하지만 쉽게 잊고 사는 진리다. 우린 사라진다. 죽는다. 아무리 대단한 부자라 해도 벗어날 수 없다. 아무리 큰 무덤을 화려하게 만들어도 죽음 앞에선 헛일이다. 어찌 생각하면 벌레나 짐승의 죽음이나 우리 사람의 죽음이나 죽음 앞에선 동일하다. 허무하다. 죽으라 다투며 치열하게 살다가 정말 죽는다. 아무 것도 가져가지 못한다. 얼마나 허무한가? 치열하게 누군가를 이기기 위해 거짓말한다. 거짓말까지 하면서 얻은 것도 어느 하나 가져가지 못한다. 더 높은 권력을 위해 누군가를 배신하기도 하고, 이용하기도 한다. 매 순간 어떻게 앞으로 나아갈까 쉼 없이 잔머리를 굴린다. 그 잔머리에 누군가가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도 신경 쓰지 않고 자기 생각만 한다. 그런데 그렇게 나쁘게 얻은 권력도 가져 갈 수 없다. 너무 당연하다. 이것이 가장 확실한 진실이다. 종교를 떠나서 너무나 확실한 진실이다. 그리고 우리가 너무나 쉽게 잊는 진실이다. 결국 사라져 없어질 이들이 서로 거짓말을 하고 서로 배신하며 살아가고 있다. 곧 사라질 이들이 말이다. 

 

‘타타타’라는 노래가 있다. 대중가요의 제목으로 알고 있지만, ‘타타타’는 원래 산스크리트어다. तथाता(tathātā, 타타타)는 ‘있는 그대로의 것’이란 뜻을 가진 말이다. ‘있는 그대로의 것’은 사실 그대로 생각해 보자는 말이다. 더도 덜도 없이 진실 그대로 생각하면, 우린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다. 무엇으로 있다고 금세 또 다른 무엇으로 있게 된다. 우리의 생각과 욕심도 무엇으로 있다고 금세 사라지거나 변화한다. 그것도 고정되어 있지도 않다. 변화하고 변화한다. 그러나 그 모든 변화의 끝에 사라진다. 죽는다. 어제 그토록 중하다는 것이 사라지기도 하고, 죽으라 고집하던 것이 한낱 기억이 되어 버리기도 한다. 허무하다. 고집해서 이룬 것도 결국 죽음 앞에선 아무 것도 아니고, 누군가의 무엇으로 존재하며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던 것도 죽음 앞에서 아무 것도 아니다. 우리네 어떤 노력도 허무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런데 이게 사실 그대로의 우리다. 우리가 보려는 모습으로의 우리가 아닌 사실 그대로의 우리말이다. 우리가 보려는 모습으로 우리는 죽지 않고 이 땅의 기쁨을 누리며 살 것 같지만, 이승만과 박정희도 죽었고, 죽음 이후 아무 것도 가져가지 못했다. 아무리 대단한 권력을 가지고 누군가의 생명을 지배하는 자리에 있다 해도 우리 발길에 죽어버리는 개미와 죽음 앞에서 다를 것이 없다. 

 

참 허무하다. 그러나 이 세상이 이리 허무하니 자유로울 수 있다. 무엇인가에 구속되어 있을 필요가 없다. 죽음 앞에서 허무하다는 그 진실 앞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그 구속이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우리의 어떤 노력도 죽음 앞 허무를 이기지 못한다는 그 구속으로 인하여 우린 자유로울 수 있다. 누군가를 괴롭히면서 권력을 누린다고 부러운가? 허무하다. 그것으로 무엇을 얻겠는가? 자유를 누리자. 허무한 권력에 흔들리지 말자. 누군가와 다투며 승자의 기쁨을 누리고 싶은가? 그것이 부러운가? 허무하다. 그것으로 진정 무엇을 얻겠는가? 그것으로 부터도 자유를 누리자. 허무한 승리 앞에서 무엇을 그리고 나빠지려 하는가! 자유는 주인의 모습이다. 다르게 될 수 있는 선택의 주체가 되는 것이 자유라는 조건이다. 죽음 앞에서 우린 허무하다. 모두가 하나 같이 허무하다. 그 허무 앞에서 우린 자유롭지 않다. 노예다. 그러나 죽음 앞에서 우리의 참 모습을 보게 된다면, 굳이 사라지고 없어지고 말 것들, 아무리 노력해도 결국은 아무 것도 아닌 그 허무하고 허망한 것에 노예가 될 필요는 없다. 자유로울 수 있다. 우리의 허무를 깨우치는 순간, 우리의 진실 그대로를 보는 순간, 우린 그 진실 앞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우리 삶의 주인이 될 수 있단 말이다. 

 

허무로다, 허무! 그렇다. 그러니 부디 그것에 노예가 되지 말자. 자유의 시작은 바로 거기에 있다. 

 

유대칠 암브로시오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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