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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존재론

'한국'은 과연 '우리'인가?

by Daechilyus Ambrosius Magnus 2019. 9. 27.

나는 나를 문제삼을 수 있을까? 나는 나를 반성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을까? 쉽지 않다. 어느 순간 합리화 속에서 나를 쉽사리 용서한다. 나는 남들과 다르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런 저런 상황이니 어쩔 수 없었다고 생각한다. 결국 남의 탓이다. 남들이 나를 힘들게 하고 남들이 부족하고 남들이 잘못한 것이다. 나는 나를 문제 삼고 어느 순간 그렇게 나는 남의 탓으로 아파하는 이가 된다. 그런데 나 역시 남에게 남이다. 나도 남이다. 나라는 남으로 인하여 아파하고 상처받는 이들이 있다. 나를 탓하며 자신의 아픔을 이해하는 이들도 있다. 나는 모른다. 나는 남이 되어 있지 않기에 말이다. 나는 나라는 틀에서 나를 문제 삼을 수 없기에 말이다. 그렇게 나는 나를 문제 삼을 수 없다. 남을 변화시킬 수도 없다. 나는 한 없이 힘들고 남은 한 없이 사악해 보인다. 철저한 '홀로됨'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홀로 운다. 

 

나는 나를 문제 삼을 수 없지만, 너에게서 나를 발견해 볼 수 있다. 결국 너를 아프게 하고 울게 한 나, 너에게서 나를 본다. 그 나는 나가 마주한 나와 다르다. 때론 나의 생각 이상으로 착하고 때론 나의 생각 이상으로 사악하다. 그러나 그것이 너에게 나였다. 나는 나의 나와 다른 너의 나에게서 등을 돌리기도 한다. 그러나 어쩌면 너의 나가 너에겐 진실이다. 그 나를 마주하고 나를 다시 돌아본다. 나는 너의 그 아픈 눈물 앞에서 참 나빴다. 나는 나빴다. 어쩌면 그때, 나는 너와 진실 되게 우리로 더불어 있을 수 있다. 그 만남, 나와 너의 그 만남, 너에게서 너의 나를 만나고, 나에게 나의 너를 만나는 그 만남은 존재론적 행위다. 참된 나, 철저히 홀로 있는 나가 아닌 더불어 있는 나, 즉 나와 나, 너와 너, 우리가 존재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억울하게 죄인이 되어 힘겨운 시간을 보냈다. 아무런 죄도 없이 권력자들의 사악한 마음에 그냥 죄인이 되었다. 세월이 지나 그 오랜 고난의 시간이 잘못된 것임을 드러났지만, 그들의 지난 세월은 어찌하는가. 여전히 그들에게 진심으로 사죄하는 이는 없다. 그들의 그 힘겨운 아픔 가운데 자신들의 사악함을 마주하고 눈물 흘리는 이는 없다. 사악한 폭력이 온 존재가 무너졌지만, 그 폭력의 주체는 없는 듯이 있다. 사과하지 않는다. 자신의 현실 속 나와 마주하지 않는다. 그저 자기 속에서 홀로 이 세상은 원래 그렇다며 있을 뿐이다. 이 땅 많은 노동자들의 아픔 앞에서 자신의 사악함을 보는 이들도 없다. 결국 그 약하고 힘겨운 이들에게서 자신이 마주한 자신은 강자다. 그들을 울리고 힘들게 해도 절대 처벌받지 않는 강자로의 자신이다. 일제 강점기에도 그들은 처벌 받지 않았다. 해방이 되어도 독재시기가 되어도 그들은 항상 강자였다. 아픈 이의 눈물에서 그들은 자신의 강함을 보았다. 아무리 때려도 자신은 죄가 없다. 한국은 아직 우리가 아니다., 나와 너의 존재론적 만남, 나에게서 너를 보고 너에게서 나를 보는 존재론적 행위로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 땅 수많은 재판으로 아파한 이들이 있지만, 아픈 이만 아프다. 이 땅 사악한 위계가 있지만, 낮은 곳에서 살아가는 이만 아프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것이 일상이 되어간다. 아니 이미 일상이다. 정말 한국은 우리인가... 아닌 것 같다.

 

유대칠...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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