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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존재론

유대칠 암브로시오의 성경 읽기 5

by Daechilyus Ambrosius Magnus 2019. 9. 25.

2019년 9월 5일 목요일 오후 (200주년 신약성서를 봄)

 

“복되어라, 영으로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니.

복되어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으리니.

복되어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상속받으리니.

복되어라, 의로움에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배부르게 되리니.

복되어라, 자비를 베푸는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받으리니.

복되어라, 마음에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뵙게 되리니.

복되어라, 평화를 이룩하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들이라 일컬어지리니.

복되어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니.” 마태오 복음 5장 1-10절

 

영이 가난한 이들, 자신을 내세우며 자신의 욕심만으로 자기 결핍을 채우려는 이들은 하늘나라에 이르지 못한다. 하늘나라, 그 참된 행복은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의 것이다. 의로움이 없는 세상을 슬퍼하며 결핍, 그 굶주림에 아파하는 이들은 하느님이 응원하고 그들의 힘이 되어 배를 채워주실 것이다. 나 아닌 누군가의 아픔 앞에서 슬퍼하는 이들, 그 슬픔으로 너의 아픔을 외롭게 두지 않고 나와 너를 우리로 하나 되게 할 때 하느님은 그 가운데 더불어 있으시며 위로가 되실 것이다. 자기 이기심에 따라 살지 않고 자비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을 하느님은 그냥 두지 않으실 것이다. 욕심으로 가득한 사람, 마음에 온통 욕심으로 가득한 이와 달리 그런 욕심 없이 깨끗한 마음으로 타인의 아픔과 타인과 더불어 있을 수 있는 사람을 하느님은 하느님을 보게 되는 사람이다. 결국 나의 옆, 나와 더불어 있는 하느님을 보지 못하는 것은 나의 욕심으로 가득한 더러운 나의 마음 때문이다. 나의 욕심, 누군가를 이기고 더 많이 가지려는 욕심을 내어 놓으면 나의 옆, 나와 더불어 있는 하느님을 보게 될 것이다. 

 

복 있는 사람은 이기적인 사람이 아니다. 누군가를 이기려는 사람도 아니다. 더 많이 가지려는 이들도 아니다. 자기를 내어 놓은 영으로 가난한 사람, 즉 겸손한 이들이며, 나 아닌 너의 아픔 앞에서 더불어 슬퍼하는 이들이며, 자기를 과시하지 않은 온유한 이들이며, 의로움이 이루어지지 않은 세상에 괴로워하는 이들이다. 자비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며, 무엇에 대한 욕심으로 마음이 어지럽고 오직 자기 욕심과 관련된 것만을 보는 그런 이들이 아니다. 그런데 이런 이들은 하나 같이 이 땅에서 힘든 이들이다. 바보라고 불리며 뒤쳐질지 모른다. 더 많이 가지고 더 많이 이기고 더 많이 욕심내고 더 많이 싸우려는 이들이 이기고 웃고 살아가는 이 세상이니 말이다. 그러나 바로 그런 세상이 지옥이다. 불행한 이들의 공간이다. 항상 싸우는 사람은 얼마나 불안하겠는가? 항상 더 많이 가지려는 이도 마찬가지다. 덜 가지게 될까 빼앗기게 될까 얼마나 걱정이 많겠는가! 그 마음에 거짓도 하고 악행도 하는 것이 불행한 이들의 운명이다. 

 

행복한 이들, 복된 이들은 그냥 더 많이 이기고 소유해서 웃는 이들이 아니라, 나와 상관없는 너의 아픔 앞에서 더불어 울어지고 슬퍼하고 안아주는 이들이며, 의로움으로 인하여 기꺼이 고난을 당하는 이들이다. 아파하고 슬퍼하는 이들이 복된 이들이다. 참된 복은 편한 웃음이 아니다. 괘락의 웃음도 아니다. 오히려 더불어 아파하고 분노하고 슬퍼하는 마음, 그 힘든 복이다. 

 

하늘나라는 고급 주택과 가구로 가득한 공간이 아니다. 부자들의 특별구역이 아니다. 더불어 아파하고 분노하고 슬퍼한 이들이 여전히 자신과 무관한 누군가의 아픔을 위하여 기도하고 응원하고 아파하며 눈물 흘리는 사랑의 공간이다. <주님의 기도>처럼 하느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게 해 달라는 그 기도를 단지 말이 아닌 자신의 삶으로 살아낸 이들의 복이다. 말씀은 삶이 되게 한 이들의 봇이다. 그리고 그 복은 결코 쉽지 않다. 힘들고 고통스럽고 눈물겨운 복이다. 절대 쾌락의 복이 아니다. 

 

유대칠 암브로시오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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