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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존재론

유대칠 암브로시오의 성경 읽기 6

by Daechilyus Ambrosius Magnus 2019. 9. 25.

2019년 9월 5일 금요일 새벽

 

“‘예수의 시신을 찾지 못하고 와서 하는 말이, 천사들의 발현을 보았는데 이들이 그분은 살아 계시다고 일러 주더랍니다. 그래서 우리 동료 가운데 몇 사람이 무덤에 가 보았더니 과연 여자들이 말한 대로였고, 그분은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참, 아둔하구려,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마음이 그렇게도 굼뜬 사람들 같으니. 그리스도는 이런 고난을 겪고 자기 영광을 누리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모세와 모든 예언자들의 기록에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서 당신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 그들에게 설명해 주셨다. 그들이 찾아가던 마을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더 멀리 가시려는 척하자 그들이 말리며 ‘이미 날도 저물어 저녁이 되었으니 우리와 함께 머뭅시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그들과 함께 머물려고 들어가셨다. 예수께서는 그들과 함께 식탁에 자리 잡으시자 빵을 드시고 찬양하신 다음 떼어서 그들에게 주셨다. 그제 서야 그들은 눈이 열리어 예수를 알아보았다. 그러자 예수계서는 그들 앞에서 사라지셨다.” 루가 복음 24장 23-31절

 

누군가의 말을 전해 듣는다. 누군가 천사를 보았고, 천사가 한 말을 전해 듣는다. 사실 이 들은 부활에 대한 지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있어야 할 곳이 아닌 있고 자하는 곳으로, 있어야 할 곳이 아닌 있었던 곳으로 돌아가는 중이다. 그렇게 그들의 발길은 멀어지고 있다. 부활에 대하여 알지만 믿지는 않은 모양이다. <성경>을 많이 공부하면 참으로 고마운 이야기들을 많이 듣게 된다. 알게 된다. 그리고 그 이야기로 인해 삶이 변화되었다 생각하기도 한다. 그렇게 자신은 변화된 사람이라 생각하기도 한다. 그게 참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말을 듣고, 그 진기한 이야기를 읽어도 어쩌면 멀어져 가고 있을지 모른다. 바로 옆에 지혜가 다가와 이야기해도 믿지 않고 이미 이런 저런 사실을 알고 있다고 이야기하며 그냥 가던 길을 갈지 모른다. 예수가 옆에 있어도 대화를 나누고 있어도 예수에 대하여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어도 예수를 보지 못하는 것과 같이 말이다.

 

그리스도교의 잔혹함을 보자. 과거 잔혹한 유럽의 제국주의 시대, 많은 신앙인들은 <성경>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성경>에 대한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참으로 많이 연구했다. 성서학이 과거와 달리 더욱 더 체계적인 학문적 모습을 정립해 갔다. 참으로 오묘하게도 제국주의의 시대는 ‘성서학’이나 ‘성서고고학’이 체계를 다져가면서 많은 연구 결실을 내던 시디다. 아랍 지방을 찾아다니며 <성경> 속 구약의 사건들이 ‘전설’이 아닌 ‘역사적 사실’임을 확인하고자 했다. 눈으로 봐야 믿겠다는 생각에서 일까? 그러나 제대로 확인된 것은 거의 없다. 1967년 5월 전쟁으로 이스라엘은 과거 솔로몬 성전의 자리를 포함하여 예루살렘 유적지를 차지하게 된다. 유대인은 자신의 눈으로 자신이 믿는 <성경> 속 역사적 사실을 확인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대부분 실패했다. 그토록 찾고자 하던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1978년부터 다윗과 관련된 발굴 조사가 시작되었다. 다양한 고고학적 성과를 이루었지만, 막상 다윗과 솔로몬 시대를 증명할 건축물의 흔적도 그 이외 유물로 나오지 않았다. ‘역사적 사실’로 확증한 무엇이 나오지 않았다. 1990년부터 ‘역사적 다윗’의 존재에 대한 학계에선 서서히 의문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처음엔 무시되었지만 지금은 이스라엘의 고고학자들이 가세하며 무시 못할 의견이 되고 있다. 쉽게 말해서 <성경>의 이야기들이 있는 그대로의 ‘역사적 사실’이 아닐 수 있다는 말이다. 어제 내가 누군가를 만나서 같이 국밥을 먹었다는 식의 사실과 같은 ‘객관적 사실’이 아닐 수 있다는 말이다. 눈으로 하느님의 흔적을 확인하겠다고 참으로 다양한 노력을 했다. 노아의 방주를 찾겠다는 노력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아직 무엇 하나 보이지 않는다. 

 

하느님이 <성경>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하는 것은 어쩌면 ‘지식’이 아닐지 모른다. <성경>은 ‘객관적 사실’을 적은 역사책이 아닐지 모른다. 에덴동산이 그와 같은 모양으로 지구 어딘가 있지 않았을 수도 있으며, 구약의 화려한 왕의 공간도 실상은 작디작은 마을 정도이며, 지금은 그 흔적도 사라져 없을지 모른다. 하느님의 직접적인 계시가 아닌 주변 여러 문명의 이런 저런 전설과 설화 속 지혜로운 이야기들이 모이고 다져지고 변하며 구약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구약보다 더 이전 쐐기문자의 기록 속 이미 제법 그런 흔적들이 보인다. 즉 다른 종교의 설화가 유대교의 <성경>에 영향을 주며 녹아들어갔단 말이다. 그러면 구약은 순수한 유대인의 이야기도 아닐 수 있다. 과장이거나 현실 역사와 다를 수 있다. 그렇다면 <성경>은 거짓말을 적은 꾸며낸 이야기인가? 정말 <성경>이 우리에게 전하는 것은 무엇인가? 

 

<성경>은 ‘지식’을 담은 책이 아니라, ‘지혜’를 담은 책이다. <성경>의 이야기들은 우리의 감각 기관으로 느껴지는 어떤 현실에 대한 기록이 아닌 우리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을 던지고 있는 책, 우리에게 지혜로운 사람, 슬기로운 사람이 되라는 책, 사람의 완전성보다 사람이 가진 온갖 모순적인 부조리를 보이며 그 가운데 과연 무엇이 하느님의 뜻대로 있는 사람됨인지 고민하게 하는 문제집일지 모른다. 객관적 답을 강요하는 책이 아니라, 고민하고 고민하여 하느님이 주신 물음에 응답해야하는 시작이 되는 책일지 모른다. 눈앞에 민들레꽃이 있다는 사실, 그 지식을 담은 책이 아니라, 민들레 꽃 하나를 위하여 녹아든 그 수많은 희생을 보면서 그 민들레꽃의 뜻을 보라는 책일지 모른다. 보이지 않는 길가에 흙이 자신을 내어주고 물이 자신을 내어주고 바람과 햇빛이 자신의 내어주며 강아지똥 마저 거름으로 기꺼이 자신을 내어주는 민들레꽃, 그 하나 속 가득한 자기 내어줌의 뜻을 생각할 수 있듯이, 그냥 민들레꼿의 생물학적 지식이 아닌 지혜를 보라는 것이 <성경>일지 모른다.  

 

<성경>으로부터 지식을 구하고자, 객관적 지식을 구하고자 많은 이들이 노력했다. 그리고 역사적 사실이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이 누군가를 실망하고 돌아선다. 거짓말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정말 <성경>은 지식이 아닌 지혜를 전달하려 한다. 그것은 고고학적 작업으로 확인해야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지혜로 살아가는 우리의 삶에서 확인해야하는 것이다. 우리 삶이 <성경>의 진실을 증명해야 하는 것이다.   

 

예수가 무덤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을 본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이 전하는 말을 들었다. 지식이 있지만, 발길은 멀어지고 있다. 뇌의 한 부분 지식으로 있지만, 그 지식이 그의 삶이 되진 못했다. 그냥 ‘지식’이지 ‘지혜’가 아니다. 삽자가 수난을 들었고 모두들 안다. 그리스도교인이라면 하나 같이 모두 그 이야기를 한다. 참 슬픈 이야기다. 부활도 안다. 부활을 본 제자들이 있음도 안다. 그들이 전하는 이야기도 읽고 들어 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지식으로 있을 분, 멀어진다. <성경>의 내용이 그저 지식이지 우리의 삶을 변화하지 않는다. 그 사실 앞에서 치열하게 자신의 지금을 생각하지 않고 그냥 슬픈 이야기라 눈물을 흘릴 수 있고, 이런 저런 성서학책으로 분석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지식’이지 ‘지혜’가 아니다. 이들 제자는 예수가 옆에 있어도 알아보지 못한다. <성경> 이야기를 풀어주어도 알아보지 못한다. 이미 부활에 대하여 잘 알고 있고, 예수에 대하여 알고 있지만, 이들은 그저 지식으로 예수를 보려 할 뿐이다. 그러니 지혜의 예수, 우리 삶에 찾아와 우리에게 매순간 양심에 호소하며 분노하고 울며 소리치는 그 예수는 알아보지 못한다. 우리와 같이 말이다. 지식으로 부활을 아는 이의 삶에 예수의 부활은 없다. 있어도 보지 못한다. 지혜로 부활을 살아가는 이에게 부활은 그들의 현실이고, 그에게 예수의 부활은 진실이며, 자기 삶의 현장이다.   

 

<성경>은 아픔과 부조리의 공간에서 진실을 보라 한다. 민들레꽃이 식물이라는 것을 보라는 것이 아니다. 그 가운데 ‘뜻’ 있음을 보라는 것이다. 흙이 나기를 내어 주었지만 흙은 죽지 않고 민들레꽃이 되었다. 냄새나는 강아지똥도 향기 나는 민들레꽃이 되었다. 죽어도 죽지 않은 삶을 민들레꽃에서 보게 된다. 희생과 고난 그리고 부활의 역사를 그 꽃에게서 본다. 그 ‘뜻’을 본다. 자기 욕심과 자기 희망으로만 세상을 보라는 이에게 민들레꽃의 뜻은 보이지 않는다. 그냥 길거리를 어지럽게 하는 쓰레기 정도다. 없애 버려야하는 그 무엇이다. 그에게 민들레꽃의 뜻은 보이지 않는다. 자기 욕심과 생각만으로 세상을 보기 때문이다. 이들이 본 예수는 무력하게 죽었다. 부조리에 대항하여 싸우지 못했다. 하늘에서 군대를 이끌고 와서 무찔러 버리지 못했다. 그냥 죽었다. 그것을 보았다. 그리고 실망했다. 남들이 무덤이 비워지고 천사가 부활을 전했다 해도 이들은 자신의 본 예수만 생각한다. 부조리는 여전하고 부활해도 무력하기만 한 예수를 생각하면 부활이라도 부활이 아니라 믿었을지 모른다. 부활을 알지만 믿지는 않았을지 모른다. 적어고 그들의 삶에서 예수는 더 이상 힘이 없었다. 

 

예수가 바로 옆에 있어도 보지 못한다. 자기 생각으로 가득차면 보이지 않는다. 바로 옆에 있어도 말이다. 얼굴을 몰라서가 아니다. 마음에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설명해도 믿지 않는 그들은 남기고 예수가 늦은 밤 위험한 길을 떠나려 하자. 늦은 밤 위험한 길을 홀로 떠나려는 사람의 위험을 보게 된다. 비록 예수인지 알아보지 못했지만 위험한 길을 떠나려는 그에게 위험한 길을 홀로 가지 말고 이곳에 ‘더불어 있자’ 한다. 더불어 빵을 나누고, 더불어 같이 있자 한다. 그렇게 그들은 예수와 더불어 앉는다. 빵을 드시고 떼어 나눌 때, 위험한 길 떠나는 나그네를 붙잡아 ‘더불어 있자’ 말한 그들의 눈은 예수가 보였다.  

 

늦은 밤이니 ‘더불어 있자’는 그 말이 참 예쁘다. 타인의 위험을 나의 위험으로 바라보는 그 마음이 참 예쁘다. 그때 예수를 보게 된다. 빵을 떼어 나누는 예수가 그때서야 보인다. 자신들을 구원할 강력한 힘을 가진 왕을 보려는 마음이 아닌 위험한 길을 떠나려는 무력한 이웃의 위험이 보일 때, 자기 이기심이 아닌 그의 위험이 보일 때, 남의 위험과 남의 아픔이 보일 때, 그 때 예수가 보인 것일지 모른다. 복음은 타인의 위험을 보며 그와 기꺼이 더불어 있으려는 그 삶의 모습에서 구현되는 것이다. 

 

예수를 본 그들은 그길로 바로 다시 돌아간다. 지금 나의 옆에 예수가 있을지 모른다. <성경>의 수많은 이야기를 그저 지식으로 가진 나에게 예수는 보이지 않을지 모른다. 예수는 부활하여 지금 여기 나의 옆에서 있을지 모른다. 내가 눈을 감아 더 이상 보이지 않을지 모른다.

 

유대칠 암브로시오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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