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결국 아무 것도 아니다.
- 유대칠의 불교 이야기
1. 불교가 등장하기 전
불교(佛敎) 이야기를 시작하려 한다. 내가 불교를 처음 접하게 된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다. 지금은 없어진 대구 수성 1가의 어느 작은 서점에서 책 한 권을 샀다. 바로 『금강경(金剛經)』이다. 지금 생각하면 뭐 하나 제대로 이해한 것 없지만, 야간자율 학습 시간, 나는 그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 책의 내용을 돌아보면서 한참 명상에 잠긴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더 궁금하기도 하고, 당시 수업 시간에 들은 기억이 나서 도서관에 가서 빌려 읽은 책은 신라의 고승 원효(元曉, 617-686)가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이다. 어려운 책이었다. 지금은 생각도 나지 않은 깨우침에 나름 상당히 흐뭇한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대학에 들어가서 인도철학 수업을 듣기도 했지만, 사실 그렇게 흥미 있지도 않고 재미나지도 않았다. 그래서 혼자서 불경을 하나씩 구해다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읽으면 메모하고 메모한 것이 어느 정도 양이 되면 정리하고, 그렇게 혼자 불교를 알아갔다. 지금 이 글은 바로 그 20대 초반 유대칠의 흔적이다.
불교 이야기를 시작하려면 불교가 등장한 인도 이야기를 해야 한다. 그런데 말이다. 인도라고 부르지만, 사실 지금의 지도로 따지자면, 인도가 아닌 네팔이다. 싯다르타는 네팔에서 삶을 시작한다.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낸 카필라 왕국 역시 인도가 아닌 네팔이다. 그러나 네팔 이야기로 시작하기보다 인도 이야기로 불교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은 인도라는 지금의 한 나라가 아닌 인도라는 하나의 문화권을 두고 지칭하는 것임을 미리 말해주려 한다. 즉 ‘인도’라고 부르겠지만 인도 중심의 문화권으로 생각하면 되겠다. 그 인도라는 문화권이 세계사에 첫 큰 몸짓을 한 것은 ‘인더스 문명(Indus Civilization)’ 때다. 세계사 시간에 한 번은 접했을 것으로 보인다. ‘인더스 문명’이라니 이름에서도 왠지 인도의 기운이 느껴진다. 그러나 ‘인더스 문명’은 지금 인도를 이끄는 이들에 의하여 일어난 문명이 아니다. 인더스 문명은 ‘드라비다 사람(Dravdian)’을 중심으로 대략 기원전 3300년에서 기원전 1700년에 있었던 문명이다. 그 가운데 기원전 2600년에서 기원전 1900년 사이 융성했던 문명이다. 무척 오랜 과거의 문명이다. 플라톤(Πλάτων, 전428?~전348)이란 철학자가 기원전 5세기 사람이다. 우리로부터 대략 2500년 전의 사람이다. 그런데 그런 플라톤이 태어나기 거의 3000년 전에 시작한 문명이 바로 인더스 문명이다. 그러니 얼마나 오래 전의 문명인가. 예수가 태어나기 3300년 전에 시작했으니 말이다. 인더스 문명의 시기는 청동기 시대다. 아직 철기 시대는 아니다. 그리고 지금의 인더스 강과 파키스탄 그리고 북서부 인도 사이에 있었다. 드라비다 사람에 의한 인더스 문명은 사람 사는 세상 모든 문명이 그렇듯이 영원하지 못했다. 기원전 2000년에서 기원전1500년 사이, ‘아리아 사람(Aryans)’이 인도 서북부 인더스 강 ‘펀잡 지방(Panjab)’으로 들어온다. 그리고 이 때 인도로 들어온 이들이 인도 문화 형성과 역사의 중심에 서게 된다. 지금도 다르지 않다. 지금도 인도를 지배하는 민족은 그때 들어온 ‘아리아 사람’이다. 당시 ‘드라비다 사람’과 ‘아리아 사람’은 그냥 보기에도 달라 보였다. ‘드라비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흑인계열이다. 그러나 ‘아리아 사람’은 백인계열이었다. 언어적으로 보아도 드라비다 사람들은 드라비다어족의 언어를 사용했다. 그러나 아리아 사람은 흔히 인도 유럽어족으로 불리는 언어에 기반 한 언어를 사용했다. 불교를 공부하면서 익히게 되는 산스크리트어와 팔리어는 바로 인도 유럽어족의 언어인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다. 이 언어가 아리아 사람의 언어이고, 이들이 인도 유럽어족의 언어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문법적으로도 산스크리트어와 팔리어는 헬라스어와 라틴어와 유사한 면이 있다. 그리고 철학적인 면에서도 그렇다. 아주 많이 달라 보이지만, 불교의 고민과 지중해 연안 인도 유럽어족을 사용하는 이들의 철학적 고민은 매우 유사하다. 이들 고민이 사용하고 기반 하는 언어의 유사성이 이와 무관하진 않아 보인다. 드라비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흑인이다. 그런데 우린 흑인이라면 왠지 아프리카만을 떠올린다. 그런데 사실 흑인의 거주 지역도 다양하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원주님과 스리랑카의 싱할라인(Sinhalese) 그리고 지금 소개된 ‘드라비다인’은 모두 흑인계열이다. 아리아 사람은 지금의 아프가니스탄 파미르 고원(Pamir Mountains)에 살던 이들이다. 이들이 인도로 내려온 것이다. 이제 이들이 오랜 시간 인도의 역사를 이끌던 드라비다 사람을 대신해 인도의 역사를 이끌게 된다. 이제 인더스 문명은 과거형이 되고, 새로운 문명이 시작된다. 바로 ‘아리안 문명’ 혹은 ‘브라만 문명’이다.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인도는 ‘아리아 사람’의 인도다. 그렇다면 이 때 등장한 이 ‘아리안 문명’이 바로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인도의 시작이라 할 수도 있겠다. ‘아리아 사람’의 도래는 새로운 문명을 낳았고, 또 새로운 철학과 종교를 낳았다. 바로 ‘브라만교(Brahmanism)’다. 한자어에 익숙한 세대에겐 ‘바라문교(婆羅門敎)’로 익숙하겠다. ‘브라만교’는 ‘브라만 계급’이 중심이 된 종교다. 굳이 비유한다면, ‘유다교’가 ‘유다사람’이 중심이듯이 말이다. 이 종교에서 말하는 신 혹은 우주 유일의 원리인 브라만 신이 브라만(brahman, 梵), 즉 범천(梵天)의 입에서 브라만 계급이 등장했다고 본다. 조금 과격하게 말해서, 신의 입에서 나온 신의 소리가 바로 브라만 계급의 사람인 셈이다. 그렇기에 브라만 계급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신과 가장 가깝다고 생각했다. 신에게서 나온 이들이니 말이다. 또 자신들이 사람 사는 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위치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신들의 노력이나 성과 때문이 아니다. 자기 존재의 고향이 다른 이들과 격(格)이 다르기 때문이다. 조선 시대, 양반(兩班)을 생각해보자. 그들은 그냥 양반으로 태어나 신분이 높은 것이지, 한 개인의 사회적 성과 때문이 아니다. 백정은 그가 이 사회에 필요 없는 악이라서 무시(無視) 받고 천대(賤待)받는 것이 아니다. 이런 생각은 개인의 노력을 보지 않고, 단지 그 출신으로 그의 사회적 지위를 판단하게 하는 신분제 사회의 한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인도 역시 이랬다. 아리아 사람이 유입된 인도는 사람을 나누어 보았다. 그렇게 ‘브라만(Brahmin)’, ‘크샤트리아(Kshatriya)’, ‘바이샤(Vaishya)’, ‘수드라(Shudra)’로 나누어진 ‘신분제’ 혹은 ‘위계의 사회’가 생긴다. 한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은 이 들 네 위계 가운데 하나에 속함이다. 만일 누군가가가 이런 위계 가운데 있지 않다면, 그는 아예 사회의 밖에 존재하는 것과 같다. 사회 안에 살지만, 실상 사회 밖에 살아가지 못하는 그런 존재다. 바로 불가촉천민(不可觸賤民)인 ‘파리아(Paraiyar)’ 혹은 ‘달리트(Dalit)’다. 건들려서도 안 되는 존재, 그렇게 너무나 천한 존재, 파리아 혹은 달리트 말이다.
‘브라만’이 종사하는 직업은 사제(성직자), 학자, 승려(수도자)이고, 이들은 사회 구성인의 교육과 신에 대한 종교 행위를 사회적 업무로 살아갔다. ‘크샤트리아’는 무사, 관료, 군인, 경찰에 종사하며, 사회제도를 유지하고 통치하는 것을 사회적 업무로 살아갔다. ‘바이샤’는 상인, 수공업자, 예능인 그리고 하급 관리 등에 종사하며, 생산과 관련된 일을 사회적 업무로 살아갔다. ‘수드라’는 농민과 어민 그리고 그 이외 노동에 종사하며, 육체노동을 사회적 업무로 살아갔다. 그리고 이러한 계층에 처음부터 속하지 못하는 사람, 사람과 더불어 살지만 사회 속 그들의 자리를 허락받지 못한 사람이 바로 ‘파리아’다. 이들은 사회 꼭 필요하지만, 하기 싫어하는 일 혹은 쉽지 않은 일을 담당했다. 예를 들어, ‘시체 처리’, ‘가죽 수리’, ‘길거리 청소’, ‘똥오줌 처리’, ‘소작농’, ‘농장 머슴’, ‘음식물 쓰레기 처리’ 등이다. 누구도 똥오줌을 더럽다 생각한다. 하지만 그 없이 살지 못한다. 똥오줌 없이 우린 죽게 된다. 그러나 누군가 자기 생명의 기본적인 현상으로 일어나는 그 더러움을 깨끗이 치우지만, 그에게 고마운 마음보다 그를 더럽다 소리치며 가까이 하지 못하게 한다. 심지어 더러운 족속이니 앞으로 너의 자식도 똥오줌을 치우며 살라 한다. 이 말이 되지 않는 폭력이 객관적 사실로 존재하던 시간과 공간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또 다른 방식으로 우리 가운데 있을지 모른다.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더럽고 힘든 일은 모두가 꺼리는 일이지만, 간절한 일이다. 그러나 많은 이들은 그런 일을 사람에게 필요한 사람의 일이기는 하지만 사람이 할 만한 일은 아니라 생각했다. 이상한 논리이고, 그것이 상식이 되어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을 사람이긴 하지만 사람이 아닌 이상한 신분의 사람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아무리 나쁜 제도라고 제도는 일종의 사회적 ‘질서(ordo)’다. 그러나 파리아는 그 사회 속에 살지만 그 사회적 질서 속에 살진 못하는 질서의 밖에 있는 존재들이었다. 그들과 함께 살지만, 그들과 더불어 안으며 살지 않았다. ‘파리아’는 ‘무시당하는 사람들’이란 뜻이다. ‘달리트’는 ‘억압받는 사람들’이란 뜻이다. 그 이름도 슬프다. 그 무시와 억압이 일상이고 당연한 이들이 바로 이들이다. 삶이 지옥이다. 자신들의 잘못도 아니다. 그냥 그렇게 태어나서 그럴 뿐이다. 누군가는 노력 없이 과도하고 누리고 누군가는 노력해도 과도하게 빼앗기고 살아가는 것이 신분제 사회다.
‘브라만교’는 네 가지 과정으로 변화해 간다. 첫째, 베다 시대로 초기 자연신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던 시대다. 둘째는 종교시대로 계급이 정착되면서 ‘브라만 신’을 섬기는 시대다. 브라만 신에 대한 신앙이 깊어지면서 계급 사회 역시 더욱 더 견고하게 정착되어 갔을 것이다. 셋째는 ‘우파니샤드 철학의 시대’다. 마지막 네 번째 시기는 ‘브라만 계급’의 고정된 시선에서 보면 일종의 쇠퇴기다. 오랜 시간 유지된 사회 속 여러 모순들에 대한 다양한 대안들이 모색되던 시대이기 때문이다. ‘불교’의 시작도 바로 이때 이루어진다. 즉, 불교는 그 이전 모순에 대한 대안으로 등장하였다.
앞서 아리아인은 ‘백인’이라 했다. ‘하얀 사람’이다. 사람을 나누어 생각하기 시작한 ‘사성 계급 제도’, 즉 ‘와르나(Varna) 제도’는 피부색과 관련된다. ‘Varna(와르나)’라는 말이 ‘색’과 ‘위계’란 뜻을 가진 단어다. 어떻게 하나의 단어가 ‘색’이란 뜻과 ‘위계’라는 뜻을 모두 가질 수 있는지 의문이 생길 수 있다. ‘색’이란 말과 ‘위계’라는 말은 도대체 교집합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색’에 따라 사람을 나누어 ‘위계’를 결정하여 본다는 생각에서 보면 ‘색’은 ‘위계’와 하나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그렇게 ‘와르나’라는 말은 ‘색’과 ‘위계’라는 말을 같이 뜻하는 말이 된다. ‘백인’인 ‘아리아 사람’이 상위 세 계급을 차지하고, ‘백인’이 아닌 드라비다인과 같은 이들은 하위 계급을 이루었다. 하지만 오랜 세월이 지나며 더 이상 피부색으로 나눌 수 없게 되었다. 세월이 지나며 서로 혼혈(混血)이 일어나니 말이다. 사실 지금 인도 사람을 백인과 흑인 등으로 나누어 생각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기원전 6세기와 7세기에도 마찬가지였다. 피부색에 근거한 ‘와르나’가 아닌 ‘직업’과 ‘혈연’에 기초한 ‘자티(Jati)’가 등장한다. 쉽게, 직업에 따른 구분이 바로 ‘자티’다. ‘자티’ 사이에도 ‘와르나’ 사이와 마찬가지로 ‘위계’가 존재한다. 특정 ‘자티’의 계층은 그에게 허락되는 일이 고정되어 있다. 고정된 하나의 색, 하나의 와르나를 보존하기 위해 그 와르나에 하나의 직업을 고정하고, 그 고정된 계층 사이 결혼을 금지하여 위계의 세상을 더욱 더 견고하게 하려는 것이 ‘자티’다. 결국 흐려진 ‘와르나’를 대신하여 ‘와르나’를 더욱 더 견고하게 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자티’인 셈이다. 눈에 보이는 색이 아니라, 이제 보이지 않지만, 유지되는 그 색을 더욱 더 견고히 하고, 그 보이지 않는 색에 따라 사회적 직분 역시 확실히 구분하고, 그 사이 결혼을 막아 더 이상 ‘와르나’가 흐려지는 것을 막으려 한 셈이다.
“너는 사제의 자식이니 사제다!”, “너는 왕의 자식이니 왕이다!”, “너는 상인의 자식이나 상인이다!”, “너는 농사꾼의 자식이니 농사꾼이다!” 그리고 “너는 머슴의 자식이니 머슴이다!”이런 문구들이 일상인 세상은 과연 행복한 세상일까? 저주 받은 존재로 태어난 사람은 당연히 저주 받은 삶을 살아가야 한다. 그의 잘못도 아니다. 그냥 그렇게 태어난 것이다. 그냥 그렇게 태어나서 그 저주를 일상으로 수용해야 한다. 이것이 과연 행복을 만들 수 있겠는가? 누군가는 그냥 그렇게 태어나서 고귀하고, 누군가는 그냥 그렇게 태어나서 ‘배제(排除)’와 ‘무시’가 일상이다. 이런 사회에서 ‘자유’는 무엇인가? ‘자유’는 항상 어떤 억압으로 부터의 ‘자유’다. 나의 신분은 나를 억압하고 있다. 그 억압을 일상으로 여기는 이에게 자유란 무엇인가? 해탈(解脫)이란 굴레를 벗어남이다. 해탈이란 결국 자유다. 과연 이런 억압이 일상 속에서 해탈은 무엇인가? 전생의 죄 값으로 지금 고난의 삶을 살아가며, 이 고난의 삶이란 죄 값을 치루면 다음 생에서 더 나은 삶을 살 것이라는 이상한 신비주의에 쌓인 현실에 대한 마취제 혹은 진통제가 참된 종교이고, 해탈일까? 억울한 고난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하는 종교와 그 억울한 이의 고난을 이용하는 사회의 권력, 어쩌면 이 슬픈 사회는 ‘종교’와 ‘권력’의 추한 연대가 아닐까 싶다.
아리아 사람이 남긴 브라만교의 경전인 베다 문헌은 『리그 베다(Rig-veda)』, 『사마 베다(Sama-veda)』, 『야주르 베다(Yajur-veda)』 그리고 『아타르바 베다(Atharva-veda)』가 있으며, 그 이외에도 ‘우파니샤드’ 등도 모두 넒은 의미에서 베다 문헌이라 할 수 있다. 문헌으로 고정된 브라만교의 지혜는 이후 인도의 많은 종교와 사상에 큰 영향을 주었다. 브라만교의 ‘우파니샤드’에 담긴 철학은 우주의 근원적인 원리인 ‘범(梵)’, 즉 ‘브라만(Brahman)’과 개인의 실체인 ‘아(我)’, 즉 ‘아트만(atman)’이 동일하다는 ‘범아일여(梵我一如)’ 사상을 기본으로 한다. ‘범’과 ‘아’, ‘브라만’과 ‘아트만’이 결국은 동일하단 말이다. ‘나’의 ‘밖’에 ‘신’이 있지 않고, ‘나’의 ‘안’에 있으며, ‘신’과 ‘나’는 근본적으로 하나라는 것, 이런 저런 다양한 의례보다는 만물 속에 스며들어 있는 브라만을 찾으라는 가르침, 사실 지금보아도 제법 매력적이다. 그러나 불교는 우파니샤드와 다른 길을 가면서 우리가 아는 불교, 새로운 희망으로의 불교가 된다. 브라만교는 모든 현상과 존재의 근본이 되는 하나의 실체, 우주를 운행하게 하는 하나의 근본 원리인 ‘브라만’과 개인의 실체인 ‘아트만’이 있다 믿었다. ‘범아일여’가 되기 위해선 ‘범’도 ‘아’도 있어야 한다. 그러나 불교는 바로 이러한 논리를 거부한다. 이 고민에 대한 불교의 답은 ‘무아(無我)’다. ‘나’란 존재의 근본적인 실체, ‘아트만’을 부정하는 이유는 오히려 그 ‘아트만’에 집착함으로 ‘해탈’, 즉 자유에 이르지 못한다고 본 것이다. ‘아집(我執)’을 부림으로 오히려 ‘아집’의 머슴이 되어 자유에 이르지 못한다는 말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브라만-아트만 이론으로 유지되던 브라만교의 그 탄탄한 신분제를 공격하기 위해서다. 이 땅 사람들은 참된 해탈을 위해 ‘브라만’이란 우주의 근본 원리와 하나가 되어야하고, 이를 위해선 근원 원리인 ‘브라만’이 현실로 드러난 ‘브라만 계층’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들에게 종속되어야 한다. 즉, 우주 근본 원리와 하나 된다는 제법 신비주의적이고 감성적인 표현의 이면엔 조용히 따르라는 말이 녹아들어 있는 것이다. 이렇게 신비주의 속 종교는 신분제 사회의 부조리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는 셈이다. 바로 그것이 ‘범아일여’의 사회적 역할이라 보았다. 사실 종교가 권력이 추악하게 연대할 때 이러한 논리를 사용한다. 성직자가 있고, 그 성직자는 신의 뜻을 가장 잘 알거나 신의 뜻이 구현된 존재다. 보통의 사람이 아니다. 다른 이들은 신과 하나 되기 위해 신과 하나를 이루고 있는 그들에 종속되어야 한다. 뭐 이런 논리다.
‘브라만교’는 브라만문명의 최대 기득권자이며, 작은 나라의 왕들을 좌우하였다. 왕들은 자신의 권력을 더욱 더 단단하게 하기 위해 브라만과 손을 잡았다. 종교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권력자의 손이 필요했다. 독재자의 손을 잡고 그들의 힘으로 이 세상 소유물을 누리려는 종교들을 우린 지금도 종종 보곤 한다. 그 때 인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종교와 권력의 추한 연대는 사회를 고정되게 만들어갔다. 세상은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상식으로 만들수록 그들의 힘은 더욱 더 지속되고 강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조가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 기원전 6세기다. 그리고 그 균열에서 불교가 등장하게 된다. 불교는 바로 그 균열의 공간에서 자란 싹이다.
브라만 문명 중심의 인도 사회는 점점 동남쪽으로 확대되어갔다. 겐지스 강과 야무나(Yamuna) 강 사이 비옥한 평원을 토대로 농업이 발달하면서 서서히 경제적으로 큰 성공을 이루게 되었다. 이와 동시에 사회적 안정도 누리게 된다. 새로운 성장과 안정화를 위해 새로운 제도와 질서가 요구되었다. 작은 부족 국가에서 이젠 거대한 군주 국가에 알맞은 제도와 질서가 필요했던 것이다. 경제적으로 성장한 왕족과 부유층은 기존의 계급 제도에 안주할 수 없었다. 강력해진 힘과 제력의 왕을 생각해보자. 그와 브라만이 아니기에 그 아래 계층이란 말에 왕은 쉽게 동의하였겠는가! 자기 노력으로 제법 성공한 장사꾼에게도 마찬가지다. 이들의 불만은 새로운 세상을 향한 대안에 목마르게 하였다. 이때 새로운 정신적 지도자들이 등장하게 된다. 바로 ‘사문(沙門, 산스크리트어śramaṇa, 팔리어samaṇa)’이다. 불교의 등장도 이렇게 등장한 새로운 시대에 대한 갈망에 등장한 사문의 등장과 무관하지 않다.
불교의 사문은 다른 사문들과 달랐다. 간단하게 말해서, 고타마 싯다르타(सिद्धार्थ गौतम, Siddhārtha Gautama, 팔리어Siddhattha Gotama, 한자悉達多 喬達摩)는 다른 사문들과 달랐다. 그 다름이 불교를 불교로 만들었고, 그 시대 불교를 하나의 희망으로 만들었다. 다른 사문들은 오랜 시간 유지된 기존 사회의 위계질서를 수용했다면, 싯다르타는 거부했다. 어떤 계급인지, 어떤 신분인지, 그는 문제 삼지 않았다. 싯다르타의 제자인 우팔리(Upāli)는 이발사였다. 당시 이발사는 천한 신분이었지만, 그것이 문제되지 않았다. 그는 싯다르타의 대표 제자가 되었다. ‘앙굴리말라(央掘摩羅, Ahimsaka)’를 보자. 비록 그가 사악한 ‘살인디’였지만, 그 과거가 그의 현재를 지배하지 못하게 하였다. 살인자인 그 역시 마음 돌려 출가한 이상 그를 격 없이 품어주었다. 이와 같이 신분제에 구속되지도 않고 사람을 나누어 보지도 않았다. 그렇기에 이후 많은 이민족들, 인도 사회의 외부인들이 불교에 귀의하게 된다. 그들에게 불교는 희망이었기 때문이다. 그냥 깨우침이 아닌 희망을 담은 깨우침이었기 때문이다.
불교는 당시 시대적 여러 모순들, 신분제 사회의 모순, 태어난 자기 신분에 따라서 남은 삶이 구속되고 그에 따라서 자신의 일생(一生)과 자신에 대한 다른 이들의 태도 등 모든 것이 결정되어 버리는 그 사회적 모순과 부조리에 대한 대안에서 시작한다. 그 부조리에 대한 분노와 절망에서 시작된 희망이다. 고정된 신분에 대한 집착, 나는 이러한 존재이니 이렇게 대접 받아야 한다는 그 ‘아집’은 참된 수행이 될 수 없다 확신했다. 사실 이러한 것은 가짜이고, 진짜는 바로 그 아집으로부터의 자유, 해탈에 있어야 한다고 본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불교의 그 ‘뜻’도 아프고 아픈 그 시대의 상처에서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너무나 당연히 무시당하고 배제되던 이들, 그들의 눈물이에 손수건이 된 불교, 그것이 불교의 첫 시작이다. 이런 시작은 당시 새로운 세상을 향하려는 권력자의 눈에도 제법 좋아 보였다. 고정된 사회의 수단이던 브라만교는 서서히 힘을 상실하기 시작했다. 전생이란 어찌 할 수 없는 것의 결과로 지금을 살아야 한다면, 나의 노력은 그 앞에서 무력하다. 내가 이런 신분인 것도 과거 나의 탓이란 논리 속에서 강요된다면, 나는 그저 무력할 뿐이다. 이런 무력감 속에서 신분제는 단단해지고, 자유는 약해진다. 이제, 사람의 운명이란 각자 노력 나름이며,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싯다르타의 가르침이 그 아픈 시대 더욱 더 절실한 치유제로 여겨졌다. 하층 계급과 관련된 모계혈통으로 열등감을 느끼던 마우리아 제국의 3세손 ‘아소카 왕’에게 불교는 얼마나 따스한 희망의 ‘치료제’였을까? 한번 생각해보자. 그것은 단순한 진통제를 가장한 마약도 아니고, 독약도 아닌 진짜 치료제로 여겨졌을 것이다.
흔히 ‘불교’라면 세속을 떠난 것으로 떠올린다. 잘못이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수행하는 수도자의 삶을 떠올린다. 잘못이다. 첫 불교의 걸음은 고난이 가득한 곳, 도시, 바로 세속이었다. 그 세속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치유제로 다가왔을 때, 불교는 불교가 되었다. 세속 속에서 불교의 깨우침은 가치 있는 것이 되었다. 아파하는 이들이 많은 곳에 그 아픔에 대한 치료제가 가장 절실한 것은 당연하다. ‘번뇌시도장(煩惱是道場)’, “번뇌 가운데 깨우침이 있다”는 말이 있다. 산스크리트어로 된 불경을 한문으로 번역한 쿠마라지바(Kumārajīva)의 말이다. 나의 번뇌는 나의 깨우침이 있을 자리이고, 우리의 번뇌는 우리의 깨우침이 있을 자리이다. 초기 불교는 그렇게 그 시대 그들의 아픔이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그 아픔으로 인하여 시작되었다. 그 아픔, 그 불교 이전의 아픔에 대한 대안은 바로 그 아픔에서 가능했다.
유대칠 글&사진 (오캄연구소장)
사진은 대구 동화사에서 찍은 것이다.
2020.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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