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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실 102호실

이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닌 것은 없다.

by Daechilyus Ambrosius Magnus 2020. 11. 22.

환경을 생각하는 여러 신학적 노력들이 이어지고 있다. 교황은 2019년 이탈리아 로마에서 열린 제20회 국제형법학회(AIDP) 총회에서 환경을 파괴하는 것을 일종의 죄로 규정할 필요성을 언급한 적이 있다. 자연 파괴를 그를 생태 학살이란 표현을 사용하며 강하게 비판하였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2015년 회칙 <찬미받으소서>에서 이미 확인할 수 있는 것이었다. 사람을 하느님의 모상으로 이 세상을 지배하고 사용할 주체로 오랜 시간 여기던 종교의 생각들은 자연을 항상 타자로 여기게 만들었다. 타자 가운데도 무척이나 무력하게 사람의 사용을 기다리는 그러한 타자다. 그렇기에 종교적 자연의 무리한 사용과 파괴는 그렇게 심각하게 고민되지 못했고, 감성적으로 아파하는 정도였다. 이러한 측면에서 환경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입장은 매우 획기적이었다. 환경의 문제는 자본주의 자체에 대한 문제와도 연결된다. 결국 자연을 이렇게 무자비하게 파괴한 가장 큰 이유는 자본 때문이다. 자본의 논리에서 자연은 활용될 어떤 것이며, 그것도 무자비하게 활용되는 수동적인 어떤 것일 뿐이었다. 그렇기에 더 이상 환경을 파괴하지 말라는 외침은 단순히 환경 운동의 차원이 아닌 자본주의에 대한 새로운 대안을 위한 외침이기도 하다. 그리고 사람이란 주체만을 지구의 유일한 행위 주체이며 의무 주체라는 사고에 대한 대안을 요구하는 외침이기도 하다. 사실 2015년 <찬미받으소서>와 같은 가톨릭 교회의 움직임은 21세기 지구 전반에 일어나는 진행형 철학의 측면에서 보면 그리 빠른 것은 아니다. 이미 20세기 중반 이후 줄기차게 환경에 대한 철학적 고민은 이어져왔고 그 고민은 생물을 넘어 무생물에 이르기까지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생명 없는 것은 그저 사람에게 사용되어야 할 아무것도 아닌 것 정도로 생각한다. 즉 너무 과소비하면 환경이 파괴되거나 서로 다투게 되니 그 정도의 다툼이나 오염 없이 사용해야 할 대상으로만 생각해 왔다. 즉 무생물은 우리에게 우리가 아닌 남이며 그것도 우리의 쓸모에 따라서 평가받고 지배되고 절제되고 사용되어야 할 그러한 남이었다. 수단으로 남이었다. 과연 그런가?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 1947-)는 이러한 흔하디 흔한 생각에 반론을 제기한다. 그는 1947년 2차 세계 대전 이후 프랑스 포도주를 만드는 집안에서 태어나 1975년 성서 주해로 철학 박사를 한 인물이다. 이후 그는 상당히 도전적이고 흥미로운 철학적이고 사회학적인 작품을 내어 놓았다. 그는 과학적 지식이 만들어지는 장소인 연구실로 달려 그곳의 상황을 2년간 관찰하였다. 그리고 그는 새로운 이론을 제시한다. 연구실 안은 연구원이란 사람만이 능동적인 주체로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아닌 사물, 생명이 없는 사물도 능동적인 주체로 한몫을 하고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생명현상을 연구하는 연구실을 상상해 보자. 그 가운데 생명체이며 사람인 연구원과 생명체인 실험동물 그리고 세균뿐 아니라, 현미경과 실험관 그리고 이를 기록하는 이런저런 필기구와 컴퓨터 등이 모두 능동적인 주체로 그곳에서의 과학적 지식 생산에 한몫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린 오랜 시간 실험실 동물에 대하여 감정적 미안함을 가지고 있었을 수 있다. 사람으로 연구원이 아니면 실험실 동물 정도에 관심을 가졌을 것이고, 그것도 능동적 주체로 관심을 가진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수동적 대상으로 그들의 삶에 대한 감정적 미안함 때문에 가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라투르는 그것을 넘어 무생물인 필기구와 컴퓨터 그리고 현미경과 실험관 등에 관심을 가진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 아닌 사물들이 사람을 다른 동물들과 구분시켜 주는 무엇이라고 생각한다. 

개코원숭이를 보자. 우리는 자연 사물을 아주 아름답게 상상하는 습관이 있다. 산속 이런저런 동물들은 서로가 사이 좋게 노닐고 있고 경우에 따라선 모두가 평등한 그러한 것으로 상상하곤 한다. 그러나 사실 숲 속 동물들은 매우 치열한 서열 경쟁을 하고 있다. 개코원숭이 역시 치열하게 서열 경쟁을 한다. 그런데 그들은 시험 성적이나 이런저런 소유물 등을 통하여 경쟁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신식 무기를 가지고 있어서 더 유리한 것도 아니고, 상대방이 가지지 않은 성능 좋은 휴대폰을 가지고 있다고 경쟁에 앞서는 것도 아니다. 오직 물리적 힘이다. 힘센 개코원숭이가 서열의 앞자리를 차지하고 그 힘으로 자신의 지위를 유지한다. 그래서 개코원숭이의 사회는 항상 위태롭다. 만일 어린 개코원숭이 가운데 어느 한 개체가 더 강력한 힘을 가지고 도전하면 그 사회의 서열을 새롭게 정리된다. 동물 사회에서 이러한 현상은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힘으로 서열 상승을 이루게 되면 암수의 관계도 새롭게 설정된다. 사람으로 상상하면 강력한 새로운 남성 지배자의 등장으로 몇몇 여인들은 새로운 지배자의 것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얼마나 사회가 불안정하겠는가 말이다. 그러다 또 새로운 지배자가 등장하여 새로운 질서를 강요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그들에겐 자연이다. 신체만으로 힘을 드러내고 그 힘으로 다투어 얻는 서열과 그것으로 움직이는 사회란 이렇게 고정적이지 않으면 불안 속에 있다. 그러나 사람은 그렇지 않다. 사람은 신체뿐 아니라, 이런저런 도구와 기술 그리고 과학적 성과와 교통과 통신 수단 등으로 더욱더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한다. 이 말이 무슨 말인가? 예를 들어 보자. 과속 방지턱이다. 그것은 고속으로 달리는 차를 불편하게 한다. 주변에 학교가 있다는 표지판을 무시하고 달리다간 그 과속 방지턱으로 인하여 불편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심하면 상당히 놀라게 될 것이고, 오랜 고장 차량이라면 차에 무리가 될지 모른다. 그렇기에 빠르게 달리지 않는다. 그 순간 조심하게 하는 것은 그곳이 학생이 다니는 곳이란 인식이 아니라, 불편을 경험할 수 있는 곳이라는 인식이다. 

개코원숭이의 사회는 사람의 사회보다 작고 신체적 힘으로 유지되는 불안정한 사회다. 사회의 질서는 있지만 불안정하고 그것을 유지하는 것은 개코원숭이의 신체 정도다. 개코원숭이의 사회는 신체를 가진 개코원숭이들만의 사회다. 그러나 사람의 사회는 사람뿐 아니라, 사람이 아닌 물건들, 즉 앞선 사례에서와 같은 과속 방지턱과 같은 것이 있다. 그것은 그저 당하고 있지 않은, 즉 수동적으로만 있지 않은 어떤 것이며 사회의 당당한 능동적 주체로 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중세를 걸치면서 데카르트에 이르기까지 많은 서구의 철학자들은 사람을 심적인 것과 물적인 것으로 구분하고 심적인 것, 혹은 영적인 것을 실체적인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구분은 사람의 영역과 사람 아닌 것의 영역에 대한 명확한 구분으로 이어졌다. 온전한 사람은 심적인 것 혹은 영적인 것이며, 어쩌면 그것뿐이다. 육적이거나 물적인 것은 그와 구분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이원론적 사유는 오랜 시간 서유의 기본이 되었다. 수도 생활을 한다는 것도 영적인 것을 더 고귀한 사람의 모습으로 보는 존재론적 사유에 근거한 것이며, 심지어 우리에게도 '얼차려'라며 '얼'의 능동성만을 인정하고 '얼'이 결단하며 '몸'은 그냥 수행하는 것 정도로 생각했다. 이러한 사유는 그렇게 보면 상당히 보편적인 사유였다. 유럽과 아시아 어디에서나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한 사유는 사람의 공간은 '사회'와 사람 아닌 것의 공간인 '자연'을 구분하게 하였다. 결국 사람은 자연의 밖에 서게 된 것이다. 그러나 당장 나의 공간에서 나와서 5분이면 갈 수 있는 와룡상을 생각해 보자. 와룡산이란 자연을 오직 사람 아닌 것으로만 설명할 수 없고 그렇게 있을 수도 없다. 그리고 사회 역시 사람만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다. 어찌 보면 오랜 이러한 구분, 점점 강하게 나누어지던 그러한 구분은 처음부터 사람의 관념 속에서나 이루어지던 것일 뿐이다. 현실은 그렇게 나누어져있지 않다. 사회 속에도 사람과 사람 아닌 것이 더불어 있고, 자연 속에서 사람 아닌 것과 사람이 더불어 있다. 

심적인 것과 물적인 것을 나누는 것, 얼과 몸을 나누는 것,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을 나누는 것, 사회와 자연을 나누는 것, 이러한 나눔은 처럼부터 잘못된 나눔이다. 그러나 이러한 나눔을 당연시되어왔다. 근대 이후 일어난 대규모의 무분별한 생산은 바로 이러한 잘못된 나눔에서 나왔다. 이러한 잘못된 나눔, 즉 잘못된 존재론적 사유에서 지금 일어나는 생태 위기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근대 사람들은 이러한 나눔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라투르는 1991년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Nous n'avons jamais été modernes)에서 우린 한 번도 그렇게 나누어져 존재한 적이 없다고 한다. 그러면서 우리는 항상 사회와 자연이란 두 가지에 대한 하나의 어떤 것인 '하이브리드(hybrid)'를 만들어왔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을 무시하고 항상 심적인 것과 물적인 것, 그리고 사회와 자연을 서로 아예 다른 범주에 속하는 것이라며 서로를 나누며 이를 당연히 여겼다고 한다. 근대 사상의 단단한 법은 바로 이러한 나눔에서 근거한다. 그러나 라투르는 우리가 그러한 모습으로 살거나 존재한 적이 없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는 한편, 『자연의 정치』(Politics of Nature)에서 잘못된 나눔에 근거한 생태의 위치를 극복하기 위한 정치 생태학(political ecology)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여기에서 정치 생태학은 사회와 자연, 즉 사람으로만 이루어진 것과 사람 아닌 것으로 이루어진 것 사이의 이분법을 넘어서는 연결망을 고려하는 방식이다.

20세기 이후 서구 사상은 자신들을 돌아본다. 그리고 그 돌아봄으로 이룬 가장 큰 그들의 외침은 근대성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그 근대성은 과거의 역사적 현실이라기보다는 어쩌면 그들이 살아간 당시 자신들의 철학이 가진 한계의 총칭 일지 모른다. 그 근대성의 중심엔 이분법이 있다. 사회와 자연의 이분법, 정치와 과학의 이분법, 사람과 사람 아닌 것의 이분법, 근대와 전근대의 이분법, 그리고 나와 남의 이분법 말이다. 그러나 현실 속 정말 그렇게 강하고 엄밀한 이분법은 현실적으로 존재하였는가? 라투르는 바로 그 점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렇게 살아본 적도 없고 그렇게 있지도 않다. 오히여 이분법으로 나누어진 그 둘이 뒤섞인 하이브리드로 세상을 보아야 한다.

금호강 산책로를 따라 산책을 하면 기분이 좋아진다. 그러나 그 금호강이란 자연은 과연 사람과 무관한 것이며 사람으로부터 완전히 남으로 있는 것인가? 그것도 아니다. 그리고 금호강을 걷는 그 길, 사람이 아닌 그 길, 그 길이 나의 삶에 그저 남으로 있기만 한 그 무엇인가? 그것도 아니다. 사실 처음부터 이 둘은 구분의 대상이 아니다. 근대와 전근대가 구분의 대상이 아니고, 사람과 자연도 구분의 대상이 아니고, 사람인 것과 사람 아닌 것도 그러한 구분의 대상이 아니다.

한번 생각해보자. 과연 우리의 삶 어딘가 이 둘이 완전히 구분되는 곳이 있는지 말이다. 나는 아직 찾지 못했다. 연구실 실험관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고 필기구가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듯이 사고 방지턱이 아무것도 아니듯이 나의 서재 만년필도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며, 저기 와룡산과 금호강도 나 아닌 것, 사람 아닌 것으로 나에게 남으로 있는 어떤 것, 사용되기만을 기다리는 어떤 것은 아닌 것 같다. 

유지승

2020 11 22

금호강 산책 중 찍은 사실 (유대칠(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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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와 더불어 우는 철학과 신학

모두가 홀로 누리며 홀로 높아지려는 시대, 그 아집으로 인하여 수많은 이들이 아프고 힘든 시대, 참된 더불어 행복하게 위한 더불어 있음의 철학과 더불어 있음의 신학을 궁리해 본다. 우리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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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철학사 - 교보문고

이 책은 이 땅에서 우리말 우리글로 역사의 주체인 우리가 우리 삶과 고난에 대해 고민하고 사유한 결과물이 한국철학이라고 정의한다. 그러므로 중국의 변방에서 중국을 그리워하며 한자로 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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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한 모독자 - 교보문고

중세에서 근대 초기에 이르기까지 지성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위험한 철학자 13인이 일으킨 파문과 모독의 일대기를 다룬 『신성한 모독자』. 중세에서 이단이란 그리스도교 외부에 있는 다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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