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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실 102호실

2. 불교의 시작 (2020.03.17)

by Daechilyus Ambrosius Magnus 2020. 3. 17.

나는 결국 아무 것도 아니다.

- 유대칠의 불교 이야기

 

2. 불교의 시작

 

절망 가득한 곳에 희망에 대한 간절함은 더 강해진다. 희망에 대한 강한 간절함은 그저 관념의 조각이 아닌 현실의 희망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시대를 변화시킨다. 불교도 그렇다. 그렇게 등장했다. 산 속으로 도망가 현실을 버린 이들이 아니다. 현실의 그 지독한 부조리의 아픔에 새로운 형태의 분노가 일어난 것이다. 나의 불교는 도피가 아닌 분노에서 시작한다. 그 분노는 무엇을 가지려는 분노도, 무엇이 되어 지배하고 통치하려는 분노도 아니다. 아집에서 벗어나기 위한 분노, 아집이 만든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자신과의 싸움, 그런 분노다. 

 

기원전 5세기 싯다르타 고타마(Siddhārtha Gautama)는 불교의 바퀴를 돌렸다. 그 시대의 아픔, 그 아픔이 싯다르타를 불렀고, 어쩌면 싯다르타는 그 시대의 아픔에 청하는 부름에 고개돌리지 않은 것은 것일지 모른다. 그는 완전히 새로운 해결책으로 그 시대의 아픔을 해결하고자 했다. 그는 스스로 강자가 되어 약자의 아픔을 야기하는 강자를 죽이고 제거하는 길이 아닌 길을 선택한다. 바로 ‘내어놓음’이다. 그는 권력자의 자리에 있었고, 그렇게 살아가도 그만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자리를 내어놓았다. 그리고 사람으로 있다면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아픔, 그 고난에 대하여 궁리하기 시작했다. 강자의 자리를 내어 놓고 스스로 번뇌 가득한 수행자의 삶을 선택하여 궁리하고, 궁리하고 또 궁리하였다. 그리고 그는 깨우쳤다. 그는 한 곳에서 사람들을 기다리며 자신의 깨우침을 전한 것이 아니라, 많은 곳을 다니며 자신의 깨우침을 전했다. 그렇게 직접 깨우침을 전하면서 불교는 한 사람의 깨우침이 아닌 많은 이를 위한 깨우침, 많은 이의 깨우침이 되었다. 싯다르타는 홀로 깨우치고 홀로 알고 홀로 죽은 이가 아니다. 그는 자신의 꺠우침을 그대로 자신만의 소유물로 두지 않았다. 그런 아집조차 내려놓았다. 그는 첫 깨우침 이후 녹야원에서 다섯 비구에게 최초의 설법을 하였다. 쾌락과 고행, 그 양극단이 아닌 ‘여덟 가지 바른 길’, 싯다르타의 첫 가르침이다. 흔히 ‘팔정도(八正道)’라고 한다. 괴로움을 덜어주는 여덟 가지 길이라고 봐도 되겠다. 

 

정견(正見) - 바른 견해 - 참된 것을 바라보는 견해

정사유(正思惟) - 바른 생각 - 생각할 것과 생각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바르게 구분하는 것

정어(正語) - 바른 습관 - 거짓말 등을 가지 않는 것

정업(正業) - 바른 행위 - 살인을 하거나 도적질을 하지 않는 것

정명(正命) - 바른 생활 - 의식주 등을 정당하게 해결하는 것, 정당한 삶을 이루라는 것

정정진(正精進) - 바른 노력 - 쉼 없이 마음을 바르게 하고 닦으라는 것

정념(正念) - 바른 의식 - 올바른 마음을 잘 간직하는 것

정정(正定) - 바른 명상 - 마음을 한 곳을 집중하는 것

 

이러한 여덟 가지 길이 참다운 수행의 길이란 싯다르타의 가르침에 다섯 비구가 싯다르타의 제자가 되어 따르게 된다. 즉 승가(僧伽, Samga)가 성립되었다는 말이다. 수행자의 공동체는 불교만의 것이 아니다. 이미 그 이전 사문의 공동체는 있었다. 사문은 그 삶의 형태에 따라서 유행자(遊行者), 둔세자(遁世者), 고행자(苦行者) 등으로 있었고, 싯다르타도 한 사람의 사문이었다. 유행자였다. 이들을 산스크리트어로 ‘슈라마나(śramaṇa)’라고 불렀다. 그러니 싯다르타도 슈라마나로 불렸다. 특히 유행자는 걸식을 하면서 수행에 집중했다. 누구나 그렇듯이 생존은 중요한 일이다. 사문, 유행자에게도 마찬가지다. 싯다르타의 불교 수행자들, 승가는 ‘탁발공양(托鉢供養)’의 삶을 살았다. 그들은 노동을 하거나 생업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하고, 여기에서 얻은 소득으로 살아가지 않았다. 그들은 그들을 돕는, 그들과 더불어 있는 이들에 내어 놓은 공양물에 의존하여 살았다. 공양은 단순히 음식에 한정되지 않는다. 그 이외 여러 생활필수품들도 공양물이 된다. 하지만 중국과 한국 그리고 일본의 불교는 더 이상 싯다르타와 그의 제자들이 하듯이 그렇게 탁발공양을 실천할 수 없었다. 인도의 첫 불교는 탁발해 온 것, 그렇게 얻어진 곳은 한 자리에 더불어 먹었다. 그러나 다들 절에서 보았듯이 중국이나 한국 그리고 일본은 절에서 직접 밥을 지어서 먹는다. 노동도 한다. 싯다르타 자신은 탁발로 생계를 이어갈 뿐이며 노동을 금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더 이상 그러한 행위로 불교 본연의 가르침, 그 깨우침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중국과 한국 그리고 일본에선 이미 불교의 승가 규모가 매우 거대해졌다. 그 많은 이들이 마을에 가서 음식을 얻어와 생계를 해결할 순 없었다. 그렇다고 불교 승려가 장사꾼이 될 순 없었다. 노동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냥 노동을 해 버릴 순 없었다. 나름의 규율이 있으니 말이다. 이에 백장(百丈, 749∼814) 선사는 “일하지 않으면 먹지 말라”는 가르침을 남겼다. 그렇게 노동은 ‘선(禪)’의 하나가 되었다. 

 

싯다르타의 가르침을 듣고 따르고 고민하고, 처음엔 음식을 얻어와 한 자리에 더불어 먹으며 있던 이들, 이후 동아시아에선 노동으로 만든 음식으로 한 자리에 더불어 먹던 이들, 이렇게 유행자들은 한 자리에 모여 있게 되었고, 이에 따라서 일종의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조금 더 체계적으로 한 사람의 깨우침이 단지 한 사람의 깨우침이 아닌 더불어 있는 사람들의 깨우침이 되어갔다. 그렇게 사람들이 모이면서, 너무나 당연히 더불어 있을 ‘공간’이 요구되었다. 

 

첫 불교는 여름 우기, 일정한 기간 동안 한 자리에 모여 수행하였다. 바로 ‘안거(安居)’다. 산스크리트어로 ‘안거’는 ‘바르시카(varsika)’다. 여기에서 ‘바르사(varṣa)’는 비를 의미한다. 결국 ‘안거’는 더 이상 탁발을 할 수 없는 기간, 더 이상 음식물을 얻으려 다닐 수 없는 비 많은 우기, 그 기간 비를 피해 한 자리에 모여 수행하던 모습에서 시작되었다. 동북아시아에선 조금 달라진다. 추운 겨울과 더운 여름, 두 번, 한 자리에 모여 수해하였다. 바로 ‘동안거(冬安居)’와 ‘하안거(夏安居)’다. ‘안거’를 위해 공간, 그렇게 더불어 모여 있는 ‘공간’이 이렇게 요구되었다. 

 

‘안거’를 위하여 일시적으로 세운 초가 암자가 ‘주처(住處)’이고, 일반적으로 도시 한 복판 혹은 교외 낙원(樂園), 과수원(果樹園), 화원(花園)... 등이 있었다. 이것이 소유자에 의하여 완전히 불교 승가에 주워졌을 때, 이를 승원(僧園)이라 하였다. 이렇게 ‘주처’와 ‘원’이란 불교 공동체의 공간이 마련된다. 

 

‘안거’를 하기 위해 한 자리에 모여 살게 되면서, 혹은 동북아시아에선 더 이상 탁발하지 않고 노동하면서 더욱 더 한 자리에 모여 살게 되면서, 그렇게 공간이 요구되면서 ‘주처’와 ‘원’이 생기고, 그곳에 더불어 살기 시작하면서 ‘규정’이 만들어진다. 안거를 위하여 모인 이들은 안거의 마지막 날,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며 고백하고 서로가 서로를 훈계하였다. 이를 ‘자자(自恣)’라 한다. 또 15일과 29일 혹은 30일에 모여 서로에게 설명하고 훈계라며 범한 죄를 뇌우쳤다. 이를 ‘포살(布薩)’이라 한다. 이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훈계하고 스스로 부끄러워하던 모습은 점차 ‘계율’을 만들어갔다. 더 이상 유행자도 여기 저기 다니는 이들도 아니었다. 한 곳에서 수행하면서 자연스럽게 교리와 계율이 만들어지는 것은 사람 사는 세상의 당연한 이치겠다 싶다. 

 

초기 불교, 싯다르타의 시기 불교는 전통적인 바라문에 비하여 정통성에 그리 집착하지 않았다. 새로운 생각과 새로운 삶을 수용하는 가운데 등장한 것이 불교다. 과거와 같은 삶이라면 등장하지 않았을 것이다. 농촌은 그때 그 일을 해야 한다. 일정한 주기성에 근거한 삶을 산다. 특정 시점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정해져있다. 그러나 역동적인 도시는 다르다. 상업도 다르다. 농총보다 도시는 변화를 요구하고 그렇게 유지되어 있다. 불교는 농촌이 아닌 도시에서 시작된다. 불교라는 샐운 희망이 더 절실한 이들도 도시를 살아가는 이들이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불교를 지지하고 후원하는 이들도 도시에 있었다. 그렇기에 초기 불교의 공간은 오늘 날 한국과 같이 산속 깊은 곳이 아니다. 그 시대의 아픔, 그 시대의 고통, 그 시대의 부조리가 가장 잘 드러나 있는 곳이 바로 불교의 자리였고, 그 대표적인 자리는 바로 도시였다, 

 

싯다르타가 살아있을 떄는 그에게 가서 직접 물으면 답을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의 사후였다. 싯다르타의 죽음 이후 불교는 가장 근본적인 고민은 바로 그것이다 이제 물을 곳이 없고 답을 줄 곳이 없었다 서로 다른 싯다르타의 말에 대한 기억과 해석은 제자들 사이 문제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과연 어느 것이 싯다르타의 깨우침일까? 이러한 고민은 당장 그의 사후 바로 등장하고 바로 해결책이 마련되었다. 바로 ‘결집(結集, Saṁgīti)’이다. 

 

싯다르타의 꺠우침을 서로 다른 여러 기억 속에 둘 수 없었다. 그래서 싯다르타가 입멸한 이후 1차 결집이 이루어진다. 마가다국 아자타삿투(Ajātasattu) 왕의 후원으로 지금의 리즈가야의 칠엽굴에서 한자로 다가섭(大迦葉), 산스크리트어로 마하캇사파(Mahākassapa)의 주도 속에서 이루어졌다. 이때 싯다르타의 가르침(佛說, Buddhavacana)을 ‘경(經, sutta)’과 ‘율(律, Vinaya)’로 확정하였고, 싯다르타가 직접 한 말은 ‘경’으로 제자 아난다(Ānanda)가 기억해 내어 암송하였고, 삶의 규칙에 대한 것은 ‘율’로 이는 우팔리(Upāli)가 기억해 내어 암송하였다. 이에 다른 제자들이 모두 합송함으로 그 기억은 인정하는 식으로 이어져갔다. 이때 모임 제자의 수가 500이라, 500결집이라고 한다. 이것이 1차 결집이다. 이후 2차 결집이 있었다. 100년의 시간이 더 지나, 베살리(Vesālī) 지역의 승려가 돈을 받는 것을 계기로 계율에 대한 고민이 제기되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700명이 모였다. 그렇기에 이를 700결집이라 한다. 이때 서로 다른 생각이 등장하게 되어 불교 교단이 나누어지게 된다. 상좌부(上座部, Theravada)는 금과 같은 것을 보시로 받는 행위를 모두 ‘불가의 법(佛法)’이 아니라 하였지만, 대중부는 (大衆部, Mahāsanghika)는 이 역시 ‘불가의 법’이라 하였다. 이렇게 서로 다른 입장으로 첫 불교의 나누어짐이 일어난다. 이후 기원전 251년 3차 결집이 있었다. 상좌부의 문헌에 따르면 마우리아 왕조의 아쇼카(Aśoka) 왕에 의하여 성립되었다. 이때 1000명이 모였다. 불교의 순수성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다른 순수성에서 어긋나는 것을 추방하기에 이른다. 이 결집의 과정에서 『논사(論事, Kathāvatthu)』가 저술된다. 마지막으로 4차 결집이다. 이는 스리랑카의 알루 비하라(Alu Vihara)에서 밧타가마니 아바야(Vattagamani Abaya) 왕 시절에 이루어졌다. 4차 결집은 상좌부와 대승불교 사이 갈등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이 결집에서 처음으로 상좌부는 불교 경전을 ‘문자화’하였다. 사실 암송에서 암송으로 이어지는 것의 한계가 있기에 문자화는 매우 소중한 역사적 사건이다. 이때 모든 팔리어로 된 삼장(三藏)이 문자화되었다고 하지만, 그 정확한 문헌의 내용은 알려져 있지 않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쿠샨 왕조의 카니쉬카(Kanishka, 재위 73-103)왕에 의해, 78년 카슈미르(Kaśmīra)의 환림사(環林寺)에서 있었다 한다. 파르슈바(Pārśvā, 협존자(脇尊者))와 바수미트라(Vasumitra, 세우존자(世友尊者)) 등이 왕의 후원으로 삼장에 정통한 500명과 더불어 『아비달마대비바사론(阿毘達磨大毘婆沙論)』 등을 12년에 걸쳐 결집하였다 한다.

 

싯다르타의 말을 아함(阿含, Āgama)이라 한다. 이를 기억해 내어 적은 것이 ‘경’이다. 그리고 그 ‘경’에 대하여 후대 싯다르타의 제자와 불자들이 해설한 것을 ‘논(論, Sāstra)’이라 한다. 그리고 불교의 여러 규칙과 의식에 대한 것을 ‘율’이라 하고, ‘경’, ‘율’, ‘논’이 셋을 ‘삼장(三藏, Tripitaka)’이라 한다. 싯다르타가 첫 불교의 바퀴를 돌리고, 이제 이후 많은 제자들은 오랜 시간 ‘경’을 궁리하고 고민하며 자신의 ‘론’을 만들어왔다. 상황에 따라 다른 모양이라 하여도 항상 ‘율’을 지키며 말이다. 

 

이렇게 불교는 싯다르타 팔정도를 다섯 비구에게 설법하고, 이후 그들에 제자가 되어 처음 승가를 만든 이후 안거 등의 상황에서 한 곳에 모여 더불어 살아갈 장소를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이렇게 눈에 보이는 공간이 마련되었다. 이제 한 사람의 깨우침이 아닌 더불어 함께하는 모두의 깨우침이 되었다. 정신적으로도 갈 ‘삼장’이란 깨우침이 생기고, 물리적으로 갈 ‘사찰’이 생기게 된다. 싯다르타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그 기억한 것을 두고 싯다르타와 대화하며 이후 불교는 오랜 시간 이어져 갔다. ‘경’을 읽고 그 ‘경’ 속 싯다르타와 대화하며 자신의 길인 ‘론’을 일군 것이다. 

 

유대칠 (오캄연구소) 글 & 사진

2020.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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