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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실 102호실

중세 철학의 자리는 어디인가?

by Daechilyus Ambrosius Magnus 2019. 11. 23.

중세철학의 자리는 어디인가? 과거를 돌아본다는 것, 그것이 철학이 될 수 있는가? 나의 존재론적 과거, 나의 근원적 토대, 그 출발점(arche)를 상기한다는 것은 철학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플라톤 역시 지금 여기 있는 이 존재의 존재론적 근원을 향하여 상기하는 것일 수 있으며, 그 상기 자체, 그 기억함 자체가 그의 철학에 있어 핵심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저 물리적으로 과거에 있던 일을 기억한다는 것이 철학이 될 수 있을까? 남의 나라, 남의 과거, 그 공간과 시간이 모두 남인 그들의 시간과 공간 속 철학을 그들의 남으로 있는 나란 존재가 기억하고 상기하는 것은 그냥 과거 일에 대한 기억인가 철학인가? 제대로 알지 못한 지적 호기심의 만족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일까?

과거의 중세를 기억한다는 것, 그 기억의 행위는 적어도 나에게 지금 나의 문제와 무관하지 않다.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을때, 나의 이성은 아무 것도 아니다. 그저 무엇인가를 사고할 가능성의 백지, 빈 공간, 아무 것도 쓰이지 않은 무슨 색이란 말도 사용할 수 없는 그런 무엇인가다. 있다는 생각도 어찌 보면 그 빈 공간에 쓰인 그 무엇이다. 하지만 그 생각으로 인하여 나는 생각하는 주체를 느낀다. 무엇을 생각하면 무엇을 생각하는 이성이 된다. 흔한 노래 가사 같지만, 그녀를 생각하면 나의 이성은 그녀가 된다. 아직 잊지 못한 첫사랑을 생각하면 나는 적어도 그 첫사랑에 대한 그리움 속에 그녀를 생각하는 순간, 아직도 그녀를 사랑하는 나라는 지금의 나와 과거 이젠 사라진 그녀와의 시간들이 만난다. 그 만남 속에서 그 공간과 시간은 과거도 현재도 아니고, 저기도 여기도 아니다. 이성은 그렇게 된다. 지금의 외로움, 그 외로움의 근거 혹은 아픔이라는 매우 현재적인 원인이 과거로 가게 하고, 과거는 그 현재의 원인에 한하여 현재로 달려온다.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그 어딘가를 과거도 아니고 현재도 아니다. 

중세철학사가로 나의 철학사 작업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중세철학사를 고민하는 동안 나의 중세철학는 과거의 일이 아니다. 치열하게 보편 논쟁과 지성단일성론을 고민하는 동안 나는 중세의 철학자가 된다. 나의 옆엔 나의 부름으로 다가온 토마스 아퀴나스가 있고, 둔스 스코투스가 있고 오캄이 있으며, 이븐 루시드와 이븐 시다 그리고 아베로에스와 아비케나가 있다. 물론 나의 부름에 응한 이들이 역사 속 물리적 공간 속에 살던 그들과 완전히 같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곳에서 고민하는 나, 지금 여기에서 중세철학을 하는 나, 현재와 중세도 아닌 어딘가에서 고민하는 나의 부름 속 주관적으로 어떤 것으로 다가와있다. 허구나 가상은 아니다. 나의 시선 속에서 그들의 문헌을 읽고 그 읽음으로 마주한 그들이기 때문이다. 나에게 그들은 모두 위대한 영웅이나 나에게 엄청난 철학적 가르침을 줄 누군가도 아니다. 그냥 의도된 익명화 속에서 x로 존재하는 이들 뿐이며, 그들의 문헌을 읽은 나의 부름으로 나에게 다가온 이들일 뿐이다. 이들 밖 객관적 역사 속 물리적으로 생물학적으로 살았던 그들에 대하여 크게 관심은 없다. 이들이 나의 의도된 익명화 속에서 나에게 다가오면 나와 이들이 마주하고 고민하는 그곳은 중세도 현재도 아니다. 그곳에서 나의 중세철학은 현재를 살아가는 나러눈 사람으로 거자눈 고민과 철학연구가로의 고민 속에서 이루어진 어떤 것이다. 그러니 그 고민이 만나 치열하게 다투는 그것은 중세의 누군가다. 그러나 그 중세의 누군가의 답으로 돌아가겠다는 것은 아니다. 나는 그들에게서 오랜 시간 과학의 진화를 무시하는 어떤 일을 도모하려는 것이 아니다. 

나와 다른 공간과 시간 속 그들의 그 철학'들'을 남의 입장에서 마주하면서 일면 여전히 변하지 않은 어떤 물음, 여전히 유의미한 물음 속에서 그들의 답을 구하기도 싶고, 다른 한편으로 같은 단어로 고민하지만 전혀 다른 뜻으로 전혀 다른 의무를 가진 철학의 다름을 살펴보고 싶기도 하다. 어찌 보면 중세의 철학과 현대의 철학이 가지는 철학이란 하나의 의미 속 공통점과 동시에 중세의 철학과 현대의 철학이 가지는 서로 다른 차이점, 같은 단어를 사용하지만 절대 서로 같다 할 수 없는 철학사적 기능을 가지는 것을 살펴보고자 한다. 중세 보편 논쟁은 지금의 보편 논쟁과 같은 물음에 대한 답이 아니다. 비슷하게 생긴 논쟁으로 같은 이름이 주어져도 그들은 같은 것이 아니다. 지금의 눈으로 그들을 기억한다면 큰 오해를 만들어낸다. 또 다르게 생각해 보자. 그럼에도 철학이다. 

데카르트와 아우구스티누스가 자기 인식으로 무엇인가를 하려 했다면, 같은 혹은 유사한 무엇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서로 다른 물음에 대한 답으로 만들어진 유사성이기에 그것은 생긴 외관의 유사성일 뿐 내면적 본질, 실체적 본질의 유사성은 아니다. 그러나 분명 완전히 이들을 무관하게 볼 수도 없는 무엇이 철학사 속에 흐르는 것도 사실이다. 

중세철학사를 연구하는 나는 바로 그것을 생각하고 고민한다. 그것을 고민하는 동안 나는 바로 그 고민이 된다. 그 고민은 과거형이 아닌 지금 나의 고민이고, 그 고민이 바로 나의 이성이며 나이다. 그런 의미에서 중세철학의 자리는 바로 '나'이다. 적어도 지금의 나에게 중세철학의 자리는 바로 '나'이다.

나의 기억 속 중세철학만이 나에게 유의미하다. 그리고 그 기억 속 그들은 두 가지 물음에 부응하며 나에게 기억된다.

하나는 그 시대, 지금과 너무나 다른 그 시대 물음에 대한 답으로 그 시대의 철학이다. 이것은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비슷하게 생겼어도 비슷할 뿐, 지금과 다르다. 같을 수 없는 그 시대의 고유한 모습이다. 또 다른 하나는 그 고유한 모습에 던지는 지금 나의 물음이다. 한 사람의 사유는 온전히 주관적이지만, 전자의 물음에 대한 답은 최대한 객관적인 무엇인가를 위하여 고민해야 한다. 의도된 익명성 속에서 말이다. 그러나 후자는 어쩔 수 없이 주관적이다. 어쩔 수 없다. 한마디로 철학사는 주관적이다. 지금과 다른 그 시대만의 고유한 고민을 하는 그들에게 지금의 내가 묻는다. 그리고 그 답을 주관의 사유 속 들리는 것만을 기록하여 적는 것일 뿐이다. 그러니 그 과거의 철학은 주관의 주관적 틀을 절대 벗어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철학사 그 자체는 나의 주관, 즉 철학사가의 주관, 그 주관 속 현재 주어진 철학에서 온전히 벗어날 수 없다. '철학사'란 '철학사가'란 주관의 틀 속에서 존재하는 사고 행위이며, 그 사고 행위가 이성이고, 그 이성이 바로 나인 존재의 주관적 기억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철학사란 상기의 행위, 주관적 상기 행위는 주관이나 주체의 등장 없이는 불가능한 그 무엇이겠다. 

중세철학사의 장소란 중세철학이란 상기의 행위, 그 사고의 행위가 그의 존재인 바로 그런 그 사고 행위와 존재의 주체을 벗어날 수 없다. 남이 기억을 달달 암기하는 객관적 행위는 철학적 철학사가 아닌 그냥 철학적 의미 없는 교양 상식이며, 그것이 철학의 전부가 되길 바라는 게으른 이들의 희망 속 그 무엇일 뿐이다. 철학사는 남이 정리한 철학사를 암기하고 읽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이성이 철학의 과거를 사고하고, 그 사고가 되는 것이 바로 철학사를 하는 것이다.

유대칠 씀

2019년 11월 22일 금요일 철학사 관련 메모

 

대구 성서 계명대학교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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