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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실 101호실

소유에서 공유로! 교부 클레멘스의 분노

by Daechilyus Ambrosius Magnus 2019. 9. 26.
소유에서 공유로! 나눔이 신앙이다.
: 교부 클레멘스의 분노

철학은 현실을 마주하며 시작한다. 신학도 다르지 않다. 특히 그 현실이 아픔이라면 더욱 더 그러하다. 철학은 그 아픔에서 시작한다. 스승 소크라테스의 죽음이 플라톤에겐 철학의 출발점이 된다. 왜 스승은 죽어야하는가? 무엇이 죽였는가?

도대체 무엇이 현실이기에 스승은 이리 살다가 사라져야하는가? 청년 플라톤은 분노했다. 스승의 이상향이 좌절되는 현실 앞에서 플라톤은 분노했다. 그리고 그 분노, 현실을 마주한 그 분노에서 플라톤의 철학은 시작되었다.

굳이 그리스철학만이 그런 것은 아니다. 싯다르타를 보자. 왜 죽어야하는가? 왜 늙어야하며, 왜 아파야하는가? 사랑으로 기뻐해도 결국은 헤어지고 무뎌지는 것이 자연의 이치라면, 왜 이 허망한 세상을 살아야하는가? 결국 온갖 고통에 시달리다 죽어 사라져 버리는 인간 삶이란 현실 앞에서도 싯다르타를 좌절한다.

결국 자신의 왕자란 신분도 그를 행복하게 할 수 없다. ‘극한의 즐거움’이란 의미의 극락(極樂)은 현실의 욕구로도 신분으로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인간들은 그것에 매달려 산다. 이러한 허망한 삶에 그는 분노한다. 싯다르타의 차분한 분노, 그것은 불교의 문을 여는 출발점이 된다. 현실을 마주한 차분한 분노! 그 분노에서 철학과 신학이 시작되곤 한다.

21세기 대한민국의 현실을 설명하는 가장 큰 축은 자본주의다. 극단적인 자본주의다. 쉽게 말하면 그냥 ‘돈’이다. 좋은 직업을 선택하는 기준! 좋은 사람과 사랑을 시작하는 기준! 미래 삶에 대한 기준! 모든 것이 돈에서 시작되고 판단된다. 돈으로 세상을 본다. 모든 것을 돈으로 환산한다.

‘세월호’라는 언어로 담아내기 힘든 고통 앞에서도 얼마의 돈을 주면 그만이란 식의 잔혹한 생각을 하는 이들도 있다. 기쁨의 이유도 돈이고, 슬픔을 지우는 수단도 돈이라고 생각한다. 돈! 자본주의의 그 자본은 이 세상을 이해하고 살아가는 가장 중요한 선택의 기준이다. 그저 돈만 많으면 행복해야 한다. 그것이 시대적 당위가 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부자의 자살은 이해하기 힘들다. 돈이 많은데 왜 불행한지 이해하기 힘들어한다. 돈, 행복의 기준, 삶의 기준이 돈이기 때문이다. 더 많은 돈의 소유로 인한 행복을 위해 자본가는 노동자에게 임금을 적게 주면서 많은 일을 시킨다. 자기 행복의 근거인 소유를 위해 노동자의 불행은 보이지 않는다.

돈! 돈을 향한 이 욕구는 소유 지향의 세계를 만들었다. 나눔이나 공유는 행복의 토대가 되지 못한다. 소유! 소유가 가장 중요하다. 21세기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철학과 신학은 바로 이러한 한국의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 만족 모르는 소유, 소유의 공간, 소유가 행복의 근거가 되는 대한민국의 현실을 마주한 철학과 신학, 그들은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불행히도 이러한 21세기 대한민국, 바로 지금 이곳에서 힘들어하는 민중을 향해 우리의 철학과 신학은 말이 없다.

이 현실 앞에 분노하지도 울지도 않는다. 아무 말이 없다. 그러나 과거 플라톤도 싯다르타도 그리고 교부들도 그렇지 않았다. 그들이 처한 그 현실의 고통 앞에 소리쳤다. 같이 울고 분노했다.

알렉산드리누스 클레멘스(Alexandrinus Clemens 150-215)는 ‘소유’가 아닌 ‘공유’(共有)를 주장한다. 남을 것을 앗아하지 말고 스스로의 것에 만족하라고 한다. 타인의 아픔도 보라고 한다. 나누라고 한다. 그것이 구원의 방법이라고 한다. 소유가 아닌 공유가 구원의 방법이라 한다.

"발이 신발의 기준이듯이 모든 사람들의 물질적인 필요는 각자 소유하는 이가 기준이다. 과다한 것은 무엇이든지 부담이 된다. <성서>는 진정 자신의 부유함이 사람들의 영혼을 구속한다고 한다. 즉 사람들이 부유하면 자신의 부를 나눔으로 구원에 이른다." (PG.8. 609)

물질에 욕심을 내서 자신에게 허락된 것 이상의 것을 탐하는 것은 그 자체로 구원의 길을 포기하는 셈이다. 돈, 즉 욕심내는 대상이 참된 삶의 방향을 가리고 오히려 자신의 삶을 구속하는 결과를 낳는다. 그렇기에 나누라고 한다. 공유하라 한다. 그렇게 나누는 삶이 구원의 길이다.

클레멘스는 <어떤 부자가 구원을 받을 것인가>라는 책에서 부자들에게 아부하면서 자신의 부를 늘리려는 이들을 비판한다. 그들은 더 나쁘다고 한다. 왜냐하면 부자들은 그들의 아부로 인하여 더욱 더 교활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깨우치게 도와두지 못할 것이면 아부가 말인가!

가진 자에게 아부하여 자신도 가진 자가 되려는 이는 바르지 않다. 이 세상은 누군가가 독점하라 창조된 것이 아니다. 사실 신이 모든 이들을 위해 창조한 모든 것을 극히 일부가 독점하고 그것을 나누지 않는 것은 그 자체로 악이다. 그런데 아부라니 이것이 무슨 소리인가! 나누지 않는 것도 그러한 행태에 동조하는 것도 모두 나쁘다.

왜 클레멘스는 이렇게 생각했을까? 그는 요즘 이야기하는 공산주의자도 아니다. 그러나 그는 부의 독점에 대하여 매우 큰 반감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그것은 어떤 이념에 빠져 그런 것이 아니라, 당시 고통 받는 이웃을 보고 일어난 생각이다.

그가 비록 일부 스토아학파의 철학에 영향을 받았다고 하지만, 그 지식이 그의 설교 속에 지혜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그 현실, 즉 아파하는 이들의 고통이란 현실을 보았기 때문이다. 단지 그가 가진 지식은 이러한 현실에 대한 그의 철학을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스토아 철학에 따르면, 우주엔 보편이성(koinos logos)이 있다. 그리고 모든 인간은 바로 그 동일한 기원과 운명을 가지고 있다. 동일한 법 가운데 있다. 클레멘스는 신앙인이다. 신앙의 차원에서 다시 고민한다. 그러면서 보편이성을 신으로 본다.

우주의 모든 것을 신을 공유하고 있다. 그렇기에 각자의 몫에 충실해도 공유된 신의 로고스에 충실한 것이 될 수 있다. 신을 공유하고 있는 우주는 모두를 위한 모두의 것이다. 누구 한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의 소유물이 되기 위해 우주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그의 분노로 발현된다.

그의 시대에도 지금과 같이 피할 수 없는 빈곤 가운데 살아가는 노동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나눔의 대상에서 배제되어 있었다. 그는 분노했다. 노동자 역시 나눔의 대상이어여야 한다. 그것이 신앙이고 원래 우주란 그러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왜 나는 궁핍한 사람과 공유하지 못하는가! 이 말은 다르게 표현해보자. 이것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명령을 수행하란 말이다."(PG.8. 541-544)

소유와 공유의 사이에서 클레멘스는 착취를 본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불합리한 것인지 분노한다.

"그대 어리석인 욕망으로 돈을 쓰는 지출이란 것은 오히려 파멸을 가져다 줄 겁니다. 신께서는 우리에게 소유물을 가질 권한을 허락하셨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필요 한도에서 입니다. 그 가운데 사용해야만 합니다. 신은 그것들이 소유에 앞서 공유의 대상이 되길 원하십니다. 허덕이는 가난 속에서 노동하는 이들이 저리 사는데, 사치 속에 살아간다는 것은 얼마나 불합리합니까!" (PG.8.544)

클레멘스는 분노한다. 나누지 않는 이들에게 분노한다. 그는 그것이 불합리하다고 한다. 나누어야 한다. 그것이 구원의 길이며, 신의 뜻이다. 모든 것은 신에 의하여 모든 이를 위하여 만들어진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클레멘스의 분노는 여전히 유효하다. 모든 것을 돈으로 본다. 그가 돈을 얼마나 소유하고 있는가라는 것이 부러움의 이유가 된다. 공유의 삶이 아닌 소유의 삶, 지금 가진 것을 나누어 더 많은 이들이 덜 아프게 살아가는 세상을 꿈꾸는 신앙보다 더 큰 건물과 더 큰 평수와 더 큰 금액, 더 큰 자동차를 소유하기 원한다.

소유가 행위의 이유가 되는 순간, 다툼은 피할 수 없다. 그리고 가난한 이는 더욱 더 가난해 질 수 밖에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더 적게 임금을 줄때, 더 큰 소유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덜 공유할 때, 더 소유하게 되기 때문이다. 클레멘스에게 이것은 신앙도 구원의 길도 아니다.

클레멘스의 분노!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신의 명령은 결국 나눔의 삶이라는 클레멘스의 분노에 찬 외침! 공유를 크게 하고 소유를 적게 함으로 더욱 더 행복해지며, 더욱 더 구원에 가까워지는 것이 참된 신앙의 삶이라는 클레멘스의 분노 찬 외침! 그 분노 앞에 우리는 자유로운가?

세월호의 아픔도 얼마의 돈을 소유하게 하면 그만이라는 이 세상에서, 클레멘스의 분노는 여전한 듯하다.

그리고 아쉽다. 이 시대에 클레멘스는 없는가! 그의 시대 노동자의 힘겨움 앞에서 분노하고 같이 우는 철학자이며 신학자인 클레멘스, 그의 존재가 이 시대에 부러운 것도 아쉽다. 이 현실이 참으로 아쉽다.

유대칠 암브로시오 씀
가톨릭프레스에 연재한 글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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