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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강학회

주님의 기도 1

by Daechilyus Ambrosius Magnus 2020. 10. 6.

1 예수님께서 어떤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다.
그분께서 기도를 마치시자 제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3 날마다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4 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루카복음. 11,1-4

철학이나 신학은 학문입니다. 특히 이들 학문은 보편적 지혜를 다릅니다. 보편적 지혜란 나이 들어 사라지지 않는 지혜를 말입니다. 그리고 어디에서나 통하는 지혜를 말합니다. 물론 그 지혜가 가장 강렬하게 생명력을 드러내는 순간은 그 지혜를 품은 시간과 공간입니다. 예를 들어, 지금 우리에겐 오랜 과거의 이야기 같지만 공자의 지혜는 그의 시대에 가장 강렬하게 그 생명력을 드러냈을 것이고 천 년 이상의 시간 동안 동아시아에선 살아있는 지혜였고, 지금도 그의 지혜를 두고 이런저런 고민을 하며 배울 것들을 궁리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지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전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가운데 죽지 않고 살아 우리에게 지혜를 전하는 것들은 많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와 오리게네스의 신학도 마찬가지입니다. 철학과 신학의 지혜는 자연학의 지식이 가지는 보편적 지식보다 더 오랜 생명력으로 우리에게 남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치료법으로 지금 우리의 몸을 고치진 않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시대의 철학은 아직 여전히 살아 우리에게 지혜를 전달하지만 그 시대의 의학이나 물리학 등의 지식은 이젠 그저 과거의 지식일 뿐입니다. 

철학이니 신학은 보편적 지혜를 다룬다고 했습니다. '보편'은 애쓰지 않으면 그저 지식이 됩니다. "사랑하며 살자"는 것은 어디에서나 통용되는 인류 보편의 지혜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시간과 공간을 넘어 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할 것입니다. 다들 알고 있다는 말입니다. 아프리카의 누군가도 아메리카의 누군가도 그리고 아시아와 유럽 그리고 오세아니아의 누군가도 이 말을 듣고는 무슨 말인지 알아듣습니다. 아마 과거도 마찬가지였을 것이고 미래도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사랑하며 살자"는 말을 어떻게 풀어낼 것인지는 철학자와 신학자에 따라서 다를 수 있습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저마다의 철학과 신학에 따라서 혹은 그들의 철학과 신학이 뿌리내린 환경에 따라서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개별적인 시선들로 인하여 다양한 시선이 있다 하여도 결국 이야기하는 마지막 말은 "사랑하며 살자"는 보편적 지혜입니다. 다양한 철학자와 신학자의 다양한 이론을 다 알아들어도 이런 보편적 지혜는 구체적 삶으로 살리려는 노력이 없으면 그저 관념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냥 관념의 조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랑하고 살자는 말은 알지만 다들 그렇게 살지 않는 것은 많은 이들이 이 보편적 지혜를 알지만 그것을 구체적인 삶으로 살려 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이란 보편이 살기 위해선 구체적 애씀들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구체적 생명으로 살아있는 그런 보편이 되는 것입니다. 구체적 노력 없는 보편은 그저 관념이 조각일 뿐이다. 

대부분의 종교는 비슷한 보편적 지혜를 가집니다. 사람을 미워말고 죽이지 말라 합니다. 그러나 왜 이런 이들이 지켜지지 않을까요? 다들 알아듣는 보편적 지혜이지만 그 보편적 지혜를 구체적 삶이 되게 하는 노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많은 이들은 철학자와 신학자에게 묻습니다. 다 좋은 말이고, 그 좋은 말을 잘 풀이했지만 결국 현실에선 무슨 소용인가 묻습니다. 그것은 철학과 신학의 보편적 지혜, 그 보편적 지혜를 설득하려는 철학자와 신학자의 노력이라기 보다는 그 철학과 신학이란 보편적 지혜를 삶으로 구체화시키려는 모두의 애씀으로 보편은 그저 관념이 아닌 살아있는 뜻이 된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철학책이나 신학 책을 아무리 읽어 많이 알아도 구체적 삶으로 살리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며, 구체적 삶으로 살리기 위한 애씀 없이는 무슨 소용일까요?

이웃을 나의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을 다양하게 풀이합니다. 아마 성경 공부를 한 사람이라면 저마다 자신의 방식으로 이 구절을 이해하고 있을 것입니다. 이런저런 성경연구 모임에서 신부님이나 목사님 혹은 수녀님이나 수사님에게 설명을 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아마 성당이나 교회를 다니는 많은 이들이 이 지혜를 알 것입니다. 이것은 보편적 지혜입니다. 이리만 된다면 이 사회의 많은 다툼은 사라질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위하듯이 남을 위하면 남을 위하고도 자랑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신이 자신을 위해 밥을 먹듯이 힘겨워하는 남에게 밥을 내어 준다면 선행으로 자랑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내가 배고파 밥을 먹는 것을 두고 자랑하지 않듯이 말입니다. 이웃을 나의 몸처럼 사랑하는 이 보편의 지혜가 살아있는 구체적 삶이 된다면, 그리스도교는 참으로 아름다운 종교가 될 것입니다. 어디 사회적 부조리나 이기심이 자리 잡을 곳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왜 그리스도교를 믿고도 이기적으로 살아가고 다툼을 즐기는 이들이 많은 것일까요? 내가 성당이나 교회 교육관 세우는데 얼마를 낸 사람이야! 나는 성당과 교회에 이런저런 봉사를 한 사람이야! 이렇게 자기를 드러내는 이들은 이웃을 나의 몸처럼 사랑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성당과 교회에 있지 않는 다른 종교를 악마로 규정하는 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웃은 나의 집에 있지 않은 사람입니다. 종교적으로 이웃은 나의 종교와 다른 종교를 믿는 이들입니다. 그들에게 독설과 저주를 일상으로 즐기는 이들이 어떻게 이웃을 나의 몸처럼 사랑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을까요? 그래도 다들 이 성경의 구절을 모르지 않을 것입니다. 다들 알지만 그저 알기만 합니다. 

네가 나에게 이런저런 것을 해주지 않았으니 나도 너에게 이런저런 것을 해주지 않을 것이라는 만남들이 일상의 상식입니다. 계산하면서 만납니다. 심지어 부부의 사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의 아픔은 부끄러워 가리고 서로의 약점을 드러내 아프게 말하고 조롱하는 것을 흔히 보곤 합니다. 친구 사이도 직장 동료 사이에서도 그러합니다. 그렇게 자기 마음만 이야기하는 것이 자유라 생각하며 남을 힘들게 합니다. 그들도 모두 이웃을 나의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단지 알고만 있는 것입니다. 구체적 삶이 되지 못한 앎은 그냥 관념의 조각일 뿐입니다. 

다시 '주님의 기도'를 읽어봅니다. 그리스도교 신자라면 가톨릭 교회의 신자이든 정교회나 성공회의 신자이든 개신교회의 신자이든 참으로 익숙한 기도입니다. 그리스도 신자에게 이 주님의 기도는 보편적 지혜입니다. 예수께 직접 기도하는 법을 묻고 직접 들은 답이기도 합니다. 이런저런 사람들의 기도 속에선 이웃을 나의 몸처럼 사랑하라는 지혜를 아무리 애써도 그만 나의 걱정과 나의 불만과 나의 욕심이 녹아들어 가 버릴 때가 많습니다. 자녀의 시험을 위해 기도하고 가정의 건강을 위해 기도합니다. 우리 모두가 사회적 부조리 가운데 아파하고 배고파하지 않도록 보이는 양식과 보이지 않는 양식을 위해 기도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저주하는 세상에서 서로가 서로를 용서하고 안아주자 기도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누군가를 나와 나의 가족이 이기길 바라는 기도에 익숙하지만 모두가 더불어 살자는 기도를 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가장 소중한 보편적 지혜입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저 미사와 예배에 사용되는 입에 익숙한 말들이거나 그저 어딘가 강론 혹은 설교 들은 관념의 조각들입니다. 구체적 삶이 되기 위해 애썼다면 그 말 한구절 한 구절을 부여잡고 그 뜻을 묻고 고민하고 그 답을 삶으로 살려 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저 그런 뜻이구나 하고 알고 있는 가장 흔한 지식의 조각일 뿐입니다. 

보편의 지혜는 구체적 삶으로 살리려는 나의 애씀이 필요합니다. 

<주님의 기도>, 그 한줄 한 줄을 고민하고 또 고민합시다. 그리고 삶이 되게 합시다. 그것을 삶이 되게 살아가는 이들이 정말 살아있는 그리스도교 신자가 아닐까 싶습니다. 예수께서 직접 알려주신 기도, 그 기도의 보편적 지혜가 삶이 된다면, 이 세상은 그리스도교라는 빛과 소금으로 지금보다 더 아름다워질 것이라 믿어 봅니다. 

2020 10 07

유대칠 암브로시오

 

[앞으로 주님의 기도를 연재하려 합니다. 오캄연구소의 길이 홀로 감이 아닌 더불어감이 되도록 후원해주길 분들은 카카오 뱅크 3333-16-5216149 (유대칠)로 함께 해주시면 됩니다. 그리고 대구에서 '교부 문헌 강좌'와 '더불어 신학' 그리고 철학 강좌를 준비합니다. 함께 하실 분들은 summalogicae@kakao.com으로 문의해 주시면 됩니다. 서로에게 고마운 만남을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유대칠.]

가실성당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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