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행복
유대칠 암브로시오 강의
2020년 02월 07일 서재강학회 강의록
“탐욕스러운 인간은 이윤이 남는 것 말고는 선(좋은 것)이라고 부를 줄 모릅니다.” 어쩌면 일상의 상식이 된 말이다. 그런데 암브로시오는 왜 이 말에 그렇게 분노한 것일까? 이것은 신앙도 아니고, 도덕도 아니고, 사랑도 아니다. 이것은 불행한 삶을 살기 위한 다짐이다. 이것을 교육하는 것은 불행하자는 교육이다. 이것이 신앙이란 이는 나쁜 신앙이고, 이것이 행복이라면 그것은 나쁜 행복이다.
“네 의지의 준칙(격률)이 언제나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가 될 수 있도록 행위 하라.”
칸트의 ‘정언명법’ 혹은 ‘정언명령(定言命令, Categorical Imperative)’이다. 이 말의 뜻은 도덕이란 이 세상의 행복을 얻기 위한 수단이 아니란 말이다. 무엇인가 더 많이 가지고 더 많이 이기기 위한 수단이 도덕이 아니란 말이다. “만약 행복해지려면 …하라!”는 식의 행동은 자신의 행동과 대상을 수단으로 만든다. 성당에 가는 이유는 행복해지려면 성당에 가야하기 때문인가? 그렇다면 성당에 간다는 것은 이기심의 수단이다. 옆 성당이 힘들다. 경제적으로 이런 저런 어려움이 있다고 하자. 그때 그 성당을 돕는 것이 나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그 선행도 보이기는 선행이지만, 사실 자신의 개인적인 이기심의 수단이다. 칸트는 이러한 것이 도덕이 아니라고 본다. 칸트는 도덕이란 절대적으로 따라야 하는 공리이며, 그것 자체로 무엇을 바래서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행위 그 자체가 목적일 뿐인 그러한 것이 도덕이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느님을 사랑할 때 하느님이 주실 무엇을 기대해서가 아니다. 하느님을 사랑해서 사랑하는 것이고, 그런 하느님 역시 나를 사랑해서 사랑하는 것, 그것이 가장 도덕이고 온전한 사랑이다. 서로가 서로를 수단으로 삼지 않는 것 말이다.
나의 아내와 나의 남편은 나의 삶에 있어서 수단인가? 아내와 남편은 돈을 벌어오는 수단이나 이런 저런 자신의 희망을 이루어야하는 수단인가? 만일 그렇다면, 충분한 보상금을 남기고 죽었다면, 더 이상 아내와 남편은 없어도 그만인가? 수단으로의 가치를 이미 충분히 이루었으니 말이다.
사랑은 수단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를 그로 보라는 마음이 사랑이고, 도덕이고 신앙이다.
부자는 그러지 못한다. 돈의 수단으로 누군가를 보면서 사랑이라 부른다. 그 사랑은 서로가 외롭다. 온전한 사랑을 하지 않아서 외롭고 온전한 사랑을 받지 못해서 외롭다.
온전한 사랑은 수단으로 채워지지 않는다. 목적으로 채워진다.
부자는 자기 이기심이 마지막 목적이고 다른 것은 모두 수단이다. 수단을 아무리 채워도 목적은 비워져 있다. 이기심의 크기는 무한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괴롭다. 남들의 눈엔 수단만이 보인다. 그가 가진 돈이 보이고, 그가 가진 땅이 보인다. 그러나 그가 누리고자 하는 것은 결국 그가 향하는 목적이다. 그 목적은 여전히 비워져 있다. 채우고 채워도 그 형이상학적 공간은 형이하학적 물건들로 채워지지 않는다. 오히려 수단에 집중하게 된다. 더 많이 모으고 더 많이 채우면 채워질까 더 조급함을 가지게 된다. 결국 그 마음이 수단의 종이 된다. 자기 삶이 노예의 노예가 된다.
“부자여, 모든 백성은 울부짖는데 그대 홀로 굽힐 줄 모르고 이런 성경 말씀도 듣지 않습니다. ‘형제와 친구를 위해 돈을 잃어라. 돈을 돌 밑에서 숨겨서 썩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그대가 듣지 않기에 코헬렛은 이렇게 외칩니다. ‘고통스러운 불행이 있으니 나는 그것을 태양 아래에서 보았다. 부자가 간직하던 재산이 그의 불행이 되는 것을.’” (<나붓이야기> 5장 25)
“‘돈을 사랑하는 자는 돈으로 만족하지 못한다.’ 그리고 조금 뒤에 이렇게 이어집니다. ‘이 또한 가장 나쁜 고통이다. 그가 살아온 것처럼 그는 그렇게 되돌아간다. 애써 모든 ㄱ의 재산은 한낱 바람일 뿐, 모든 나날을 어둠 속에서 지내는 그의 슬픔과 커다란 격정, 병과 분노 속에서 살아간다.’ 그러니 노예상태가 더욱 더 견딜 만합니다. 노예는 사람을 섬기지만, 부자는 죄를 섬깁니다. ‘죄를 짓는 자는 죄의 노예’입니다. 언제나 올무와 사슬에 묶여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부자는 언제나 죄악에 빠져 있기 때문에 족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죄를 섬기는 것은 얼마나 비참한 종살이입니까!” (<나붓이야기> 6장 28)
죄, 남의 것이라도 빼앗아 자신의 공간을 채우고자 한다. 남을 이긴 듯이 느껴져 행복해야하지만, 행복하지 않다. 오히려 더 불안하다. 채워지지 않는 목적을 향하여 수단을 주인 삼아 살아가는 삶이 행복하기 힘들다. 행복할 수 없다. 목적, 그 목적은 목적 그 자체로 채워진다. 수단이 아니다. 나는 왜 그를 도와주어야하는가 묻지 않고, 그냥 도와주고 그냥 그의 옆에 그와 더불어 있어야 한다. 그때 나의 비워짐의 옆에 누군가 값이 다가와 더불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가진 것이 없는 나는 어떻게 하나?’ 부자도 가진 것이 없다고 소리칩니다. 이것은 가난한 사람의 말인데도, 풍성한 소출을 거둔 자가 부족하다고 투덜거립니다. ‘수확한 것을 모아 둘 데가 없다’고 합니다. 그대는 그 부자가 ‘나는 생계를 유지할 소출이 없다고’말하는 줄로 여기겠지요. 풍요로움으로 위험에 빠진 자가 행복합니까? 자신의 이 재산으로 말미암아 그 부자는 가난한 사람보다 더 비참합니다. 가난한 사람은 그저 가난 때문에 위험할 뿐입니다. 가난한 사람은 자신의 곤경을 변명할 수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분명 불의를 겪었을 터이니 그에게는 탓이 없습니다. 그러나 부자는 자기 자신 말고는 그 누구도 비난할 수 없습니다.” (<나붓이야기> 6장 31)
힘겨운 삶을 강요당한 이들은 남의 탓으로 살게 된 힘겨운 이들이니, 그 자신의 탓이 없다. 그러나 부자는 다르다. 부자는 지금이라도 바로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자신의 가진 것으로 누군가를 아프게 한 것은 아닌지, 자신의 소유가 누군가에게 아픔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한다. 지금 당장 말이다. 가난하고 힘없는 이를 수단으로 삼은 것은 아닌지 거짓을 진실로 만들기 위해 거짓의 논리 속에서 자신의 삶을 오염시키며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부자는 스스로에게 ‘너는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탐욕스러운 인간은 이윤이 남는 것 말고는 선(좋은 것)이라고 부를 줄 모릅니다.” (<나붓이야기> 7장 36)
부자는 자기 이기심의 수단으로 세상을 본다. 그 수단을 아무리 많이 누른다 해도 결국 나쁜 행복이다. 착한 행복, 그 행복은 가난한 마음에서 너를 목적 그 자체로 마주할 때, 바로 그때 시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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