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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강학회

사랑 이야기 1

by Daechilyus Ambrosius Magnus 2020. 6. 27.

악인의 길은 주님께서 역겨워하시고 의로움을 추구하는 이는 주님께서 사랑하신다. (잠언 15, 9)

나쁜 사람의 삶은 주님께서 싫어하시지만, 착한 사람의 삶은 주님께서 사랑하십니다. 착한 사람은 우리의 편에서 생각하지만, 나쁜 사람은 나의 편에서만 생각합니다. 나만 있습니다. 나만 홀로 주인이 되어야 합니다. 대화하기 보다 명령하기를 좋아합니다. 나 아닌 이들의 아픈 마음이나 마음 상함을 생각하기 보다는 그저 자기 한 사람 편함만을 생각합니다. 

나 하나의 편함을 제외하면 모두 버려야할 것으로 생각하고 버립니다.

자신의 옆에서 함께 한 벗들과의 추억도 버립니다. 성가십니다.

자신의 옆에서 함께 한 추억 없이 그저 지금만을 삽니다. 있다가 사라지고 있다고 사라지는 그 지금만을 삽니다. 그러니 허무합니다. 자신은 사라지는 존재일 뿐이니 말입니다.

나와 함께 한 그 수많은 고마움들, 그 고마움과의 추억을 돌아보면 나는 항상 누군가와 함께 울거나 웃고 있엇습니다. 그것이 나입니다. 울고 있을 때, 그 울음의 옆에 다가와 손내민 이들의 따스함도 있었습니다. 그 따스함에 울더라도 조금은 편하게 울던 것도 나였습니다. 험한 세상 모든 것이 경쟁이라지만, 나의 옆에 그 경쟁에서 지고 돌아와도 웃어주며 기운내라는 이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그 고마움과 더불어 있던 것이 나입니다.

돌아보면 작지만 사소한 그 착함들이 항상 나와 있었습니다. 나를 큰 부자로 만들지 않아도 나를 크게 드러나게 하지 않아도 말입니다.

스치듯 지나는 누군지도 모르는 이의 고마움도 생각 납니다.

갑자리 허리가 아파 일어나지 못해 버스 바닥에 앉아 당황할 때 저를 버스 밖까지 부축하며 저를 도와줄 이들이 올때까지 저의 옆에 있어준 제법 힙합스러운 차림의 두 여자분의 고마움도 생각납니다. 그저 웃으며 조심하라며 사라진 길지 않은 몇 분의 인연이지만 말입니다.

나 하나의 편함을 위해 살아가기만 한다면, 이렇게 뚱뚱한 나를 그렇게 마른 사람이 부축한다고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무런 상관도 없는 나를 위한 그 내어줌이 나에겐 크게 다가와 지금도 남아있습니다.

세상은 고마움 만으로 가득하지 않습니다. 그것도 사실입니다.

죽은 친구, 내 소중한 죽은 친구는 항상 어머니를 위해 살았습니다. 오랜 과거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하면 홀로 온갖 일을 하면 살아가신 어머니를 위해 희생하며 또 희생하면 살았습니다. 공부도 제법 했지만 보이지 않는 강압은 결국 직장을 선택하게 만들었습니다. 말로 하지 않았을 뿐, 그에게 모두가 진학하지 말라 했으니까요. 그렇게 온갖 일을 두 세 가지씩하면서 어머니를 위해 살았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둘째인 아들을 위해 살았습니다. 아들 장가 비용도 결국 친구의 몫이었습니다. 친구가 벌어준 것은 어머니를 통해 아들에게 전해졌습니다. 아들은 누나에게 고마워하기 보다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어머니에게 받았습니다. 돈번다고 유세하는 나쁜 사람이 아들에겐 나의 친구, 바로 누나였습니다. 어머니에게도 친구는 아들에게 잔소리하는 잘난 척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친구가 사고로 죽었습니다. 4-5년이 지나 친구의 보험금은 아들의 아파트 일부가 되어 있었습니다. 흔적도 없이, 그저 일만하다 제대로 친구도 없이 그렇게 살던 친구, 그 친구가 계명대학교 앞 한 커피 가게에서 한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결국 인생은 한 없이 외롭다고 말입니다. 친구는 어머니에게 외로운 기계로의 삶만을 배운 것은 아닐까요? 따스한 말과 정말 자기 삶을 살아가라는 응원이 아닌 희생과 희생... 자기 없는 희생... 

친구의 죽음 이후 그에게 착한 친구이지 못한 내가 미워졌습니다. 그저 야속한 친구의 어머니 탓만 하며 저는 그에게 고마움을 제대로 전하지 못한 채 있었습니다. 나도 참 못된 사람이었습니다. 그와 더불어 있지 못한 내가 참 야속했습니다. 내가 시간강사에서 짤리던 그 때 잡뽕 한 그릇에 탕수육을 먹으며 기운내라 하던 친구의 미소를 생각하면 그 응원을 생각하면 저는 제대로 된 위로의 말도 응원의 말도 하지 못한 듯 합니다. 두 아이의 아빠로 살아가는 삶의 바쁨, 그것이 핑개였을까요?

아직 시간 강사 시절, 저에게 학생들이 준 편지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말 교수다운 교수라는 말에서 노력하는 교수라는 말, 고마운 강의 고맙다는 말, 정말 소중한 편지들... 고맙기만 합니다. 어느 졸업생은 대학 시절을 돌아보며 기억에 남는 교수라며 저에게 연락을 해 주기도 했습니다. 그저 일주일에 한번 강의하는 시간강사이였지만, 힘 없는 시간강사였지만, 그 응원에 그 시간들을 고마움으로 남아있습니다. 

나는 그 친구에게 그런 작지만 소중한 고마움을 주었을까요? 모든 것을 그저 아들 뿐인 친구의 어머니 탓이라며 모인 벗들과 그 친구에 대한 미안함을 그저 그 어머니에게 돌려버리며 나는 죄없다 스스로에게 계속 말하던 것은 아닐까요? 결국 삶의 힘은 거대한 무엇이 아니라, 사소한 일상 속 고마움인데 말입니다. 나는 그것 하나 그에게 전해주지 않은 것은 아닐까요?

알지도 못하는 쓰러진 나에게 다가와 부축해준 두 분을 그리 고마워하면서 저는 누군가에게 고마운 사람이었을까요?

스스로를 돌아봅니다. 그리고 낙담보다는 앞으로의 삶을 생각합니다. 그래 이제 착한 사람이 되어야겠다. 이 사회 큰 빛은 아니라도 아프고 힘든 그리고 외로운 주변의 작은 홀로 있음에 다가가 그들과 더불어 있어야겠다. 

착해져야겠다. 죽은 친구에게 주지 못한 그 착함은 이런 식으로 풀어가면 그 친구도 하느님의 옆에서 웃고 있을지 모르겠다 생각합니다. 

나만 생각하며 살아가도 결국 한 번의 삶이고 

모든 것을 지우고 나 하나의 이기심만을 채우고 살아도 결국은 한 번의 삶입니다. 

외롭게 그 고마움과 그 순간을 버리고 버리고 나 하나의 이기심만을 남기기보다 

그 고마움을 기억하며 그 고마움으로 나의 존재를 채우려 합니다. 

그렇게 착하게 살아가는 삶, 주님께서도 응원해주시겠지요.

사랑하며 살아야겠습니다.

그렇게 사랑하며 살다보면 주님께서도 사랑해주시겠지요.

고마워하라 말하기 보다 고마운 사람이 되어야겠고 

사랑받기를 기다리기 보다 사랑해야겠습니다.

조금 덜 미안하기 위해 말입니다. 

 

유대칠 

2020 06 27

가실 성당에 가서... ㅎㅎ 그림 속 어설픈 사람은 나입니다. 저의 어설픈 그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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