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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강학회

주님의 기도 7 - 죄를 잊지 않는 삶

by Daechilyus Ambrosius Magnus 2020. 10. 18.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아멘.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갑자기 '기도'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 봅니다.

'기도', 기도를 하게 되면 참 많은 것을 청하게 됩니다. 저만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너무 이기적인 기도인 것 같아서, 나 아닌 나의 벗들을 위해 그들의 아픔과 이런저런 어려움을 위하여 기도하기도 하지만 결국은 이런저런 것을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이것을 주시고 저것도 주시고 무엇이 힘들면 그 힘겨움을 덜어주시고 무엇이 보기 싫으면 보지 않게 해 주시고... 결국 모두 무엇인가를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무한한 힘을 가진 분이니 못할 것이 없으니 이것도 도와주시고 저것은 채워주시고 나는 부족함 없는 존재로 만들어 달라 기도합니다. 저만 그런가요? 기도의 삶은 그렇게 쉼 없이 하느님에게 떼쓰는 삶일까요? 

'기도',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가만히 기도의 삶에 대하여 생각해 봅니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대화라는 말을 종종 듣습니다. 그런데 그 대화는 어떤 것일까요? 사실 내가 기도를 해도 하느님에게 들려오는 소리는 없습니다. 사실 저의 경우 기도의 대부분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나의 벗을 위한 기도도 거의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아픔으로 힘든 친구는 하늘나라로 가 버렸고, 평생 폭력에 시달리며 살던 친구는 여전히 마음의 병으로 치료를 받으며 쉽지 않은 삶을 살아갑니다. 저의 가난은 하나도 해결되지 않고 오히려 문제는 점점 더 복잡해집니다. 이런저런 노력으로 벗어나려 해도 상황은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2020년, 올해는 좀 다르겠다 생각했는데. 이런저런 강연들과 강의들이 준비되어 있었지만 막상 시작하기 두 주 전에 이 땅에 찾아온 코로나 19는 그 모든 것을 앗아갔습니다. 달라 달라 기도해도 결국 이루어진 것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기도', 이제까지 기도는 대화가 아닌 저의 하소연이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하면 그런 것 같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묵상하고 깊이 생각하며 나는 내 삶으로 답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삶으로 하느님에게 묻고 그러면 하느님께서도 깊은 생각 속에서 저의 그 물음에 답을 하는 그러한 것이었습니다. 깊은 신학적 담론은 뒤로 두고 저에겐 그러한 것이 기도가 아닌가 싶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깊어지는 것, 하느님에게 깊어지며 예수의 십자가를 피하지 못하고 마주합니다 이런저런 결핍을 채워달라 바라는 바라는 그 마음은 남의 아픔을 아파하기보다 나의 아픔이 더 크게 보이는 까닭에 등장하는 것 같습니다. 남의 아픔을 위해 기도한다 해도 그것 역시 어찌 보면 내가 하느님 말씀 잘 따른다는 것을 보여주기 식으로 하는 것은 아닌가 돌아보게 됩니다. 친구를 위해 기도한다면서 아픈 누군가를 위해 기도한다면서 막상 나는 돈이 없다는 이유로 이런저런 여유가 없다는 이유로 등 돌리고 살거나 기도 하며 그 미안함을 스스로 달랜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 생각하니 나는 더 나쁜 놈입니다. 그래서 이제 듣기로 했습니다. 해결할 힘이 없지만 힘든 친구들 아픔을 듣습니다. 그냥 듣고 있는 것도 눈물의 손수건이 되는 것을 이제야 조금 알 듯합니다. 듣고 있으면 때론 그 친구의 아픈 마음에 내 마음도 많이 아파져 이런저런 일을 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듣습니다. 나에게 아픔이 전해졌다고 친구의 아픔이 덜어지거나 해결되지 않았지만, 적어도 홀로 외롭게 아프진 않아도 되니 말입니다.

하느님과의 대화에서 십자가를 마주하고 그 십자가 앞에서 그분께서 건네는 그 말씀을 듣게 됩니다. 그러면 저는 그 십자가의 사랑, 우리 모두를 위하여 아픔을 이겨낸 그 더불어 있음의 사랑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더불어 있음의 사랑에 대한 하느님의 말씀에 저의 삶으로 답을 합니다. 아픈 친구에게 다가가 그의 눈물에 손수건이 되어 줍니다. 죄 중에 홀로 있던 우리에게 더불어 다가와주신 예수와 같이 아픔 중에 홀로 아파하는 그에게 더불어 다가가 손수건이 되어 줍니다. 그렇게 하느님이 건네신 말씀에 저는 저의 방식으로 답합니다. 

'기도'는 그렇게 듣고 답하고 듣고 답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느님에게 우린 우리를 용서해 달라 청합니다. 살아오면서 하느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얼마나 아픈 곳으로 만들었나 생각해봅니다. 하느님은 돈이 되어 이 땅의 무엇인가를 창조하신 것도 아니고, 예수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린 모든 것을 돈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며, 더와 덜로 이 세상을 나눕니다. 누군가를 생각하면 나 보다 돈이 더 많은가 덜 많은가로 생각하고 그들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두고 판단합니다. 금은 돈이 더 되어 가치 있고 돌은 돈이 되지 않아 쓸데없다 하는 생각은 사실 하느님이 창조하신 이 아름다운 세상을 아름답지 않다 하는 말입니다. 하느님은 그 작은 돌 하나도 아름답다 하셨고, 참으로 그분의 창조물입니다. 그런데 우린 이 세상을 돈과 권력을 중심에 두고 더와 덜로 세상을 나눕니다. 그리고 더 좋은 것을 더 많이 가지기 위해 거짓을 일삼고 서로 싸웁니다. 이 마음들이 결국 하느님이 창조하신 이 아름다운 세상을 더럽히는 일입니다. 우린 하느님 세상의 오염물이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에게 용서를 청해 그 벌이 덜했다 하여도 우리가 지은 죄의 흔적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벌을 면해 주었다 해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악행, 우리의 죄는 남아 있으며 그 죄로 이 세상은 여전히 더와 덜로 나누어진 세상으로 있으며 벌을 면한 우린 또 벌을 면했다는 것 하나만 기억할 뿐, 우리의 죄로 만들어진 이 세상의 힘겨움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때론 벌을 용서받고도 다시 그 세상에서 죄를 지으며 살아가기도 합니다. 벌을 용서받아도 그 죄를 기억하고 다시 그 죄로 인하여 이 아름다운 세상이 더 더럽혀지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 어쩌면 그것이 우리에게 의무일지 모르겠습니다. 나에게 더와 덜로 판단되어 비교되고 무시되던 이들에게 미안해하고, 나를 더와 덜로 판단하며 나를 무시하던 이들을 용서해도 죄는 남습니다. 남은 죄를 기억하고 다시는 그 죄를 저지르지 말아야 합니다. 더와 덜로 나누는 생각에서 결국 서로 싸우고 미워하고 하느님의 이 아름다운 세상을 더럽히니 더욱더 치열하게 이 세상을 더와 덜로 나누지 말고 그로 인하여 일어난 서로 간의 미움과 다툼도 이젠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리 되면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더욱더 따스하게 용서해 주시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십지가로 우리에게 말씀을 건넨 하느님이십니다. 그 십자가의 사랑 앞에 모든 이들이 용서를 받았습니다. 지금도 그 십자가 앞에서 나는 나를 돌아보고 하느님에게 내 죄를 고백하며 그 죄로 인한 벌을 조금 덜어달라 합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합니다. 여전히 나로 인하여 만들어진 그 죄, 그 악행은 사라지지 않고 나의 삶 누군가의 아픔이 되기도 하고, 때론 나 자신의 아픔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하느님께서 벌을 덜어 주셨다 하지만 여전히 남은 그 죄, 그 죄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그 죄에 들어서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하느님과의 대화입니다. 하느님이 용서로 말씀 건네시면 우린 다시 같은 죄를 또 짓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답을 해야 합니다. 벌을 덜게 되었다 좋아할 것만이 아니란 말입니다. 더욱더 깊이 스스로를 돌아보며 같은 죄로 또 큰 많은 이를 아프게 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하니다. 

나를 더와 덜로 나누어 조롱하던 이들에 대한 용서, 그러나 나도 누군가에게 그러한 아픔의 이유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죄로 아파하는 내가 그에게 미워하는 마음을 덜어내고 그를 향한 벌을 덜어 준다 하여도 그만큼 중요한 것은 그 죄로 아픔 나는 또 그와 유사한 죄로 누군가를 아프게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느님 역시 우리에게 그렇게 더불어 있어 주실 것입니다. 

유대칠 암브로시오

2020 10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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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보리암 가는 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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