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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강학회

주님의 기도 8 - 흩어지지 않게 하소서

by Daechilyus Ambrosius Magnus 2020. 10. 19.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아멘.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이 세상을 더와 덜로 나눕니다. 요즘들은 그 기준은 '돈'입니다. TV에 누군가 나오면 너무나 쉽게 말합니다. 저 사람은 얼마를 버는 '더' 성공한 사람이고, 누군가는 '덜' 버는 실패한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길가 자동차를 봐도 너무나 쉽게 돈으로 평가합니다. '더' 성공한 이의 '더' 비싼 차 라면서 말입니다. 막상 자신은 중고차를 타려 있는데 말입니다. 그러면 자신은 이미 실패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일까요? 슬픈 이야기입니다. 그런 부모들의 말에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세상을 '더'와 '덜'로 나누어 봅니다. 그리고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입니다. 점점 자신의 처지에 따라 꿈을 줄여 갑니다. 원대한 꿈은 사라지고 자신의 꿈을 지우고 지워갑니다. 마지막엔 노력해도 달라지지 않는 세상에 그냥 실패를 운명으로 살아가는 이로 자신을 판단해 버리곤 합니다. 이것이 정말 자식에게 하고 싶은 부모의 마음일까요? 

과거 어느 어린 친구의 수학 선생으로 매주 두 번 수학을 알려 주었습니다. 그런 어느 날 한 그 아이가 자신의 아버지는 거짓말로 돈을 벌고 있다 했습니다. 그렇게 많이 아픈 것도 아닌데, 지금 집에 와서 밥을 먹고 잠만 병원에서 잘 뿐인데, 심지어 친구들과 술도 마시는데, 병원에서 입원 생활을 하고 있다 했습니다. 보험금을 더 받기 위해 그렇게 입원생활을 더해간다면서 자신의 아버지에 대하여 조금은 서글프다 했습니다. 저것은 그리 도덕적으로 보이지도 않고 심지어 아버지가 그렇게 강조하던 신앙에 따른 하느님의 가르침과도 거리가 있어 보인다면서 말입니다. 사실, 더와 덜로 나누어진 세상에 더 많은 것을 벌고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기 위해 도덕이나 종교는 무시되곤 합니다. 더 많은 것을 누리는 것, 그것을 가지는 것이 답이라 가르치는 부모들이 많습니다. 아마 아이가 나이 들어 더 이상 부모가 더 좋은 것을 줄수 없고, 오히려 더 좋은 것을 향한 걸음에 방해가 된다면 부모도 버리겠지요. 그것이 도덕이든 신앙이든 상관없이 '더' 많은 것이, '더' 높은 것이' 더 좋다는 것이라는 부모의 가르침에 충실한 것이니 말입니다. 더불어 삶보다 도덕적 삶보다 더 많은 것을 위해 적당한 거짓도 위선도 문제 될 것이 없다면 말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문제 될 것이 없다면 말입니다.

그런 식으로 때론 비도덕적으로 더 많은 것을 벌면서 그 번 것으로 남들 앞에 대단한 삶의 비법이라도 아는 듯이 자랑하기도 하고 심지어 그렇게 살지 않는 선한 사람들을 세상 사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이라 무시하기도 합니다. 더와 덜로 세상을 나누고 더 많은 것을 벌기 위해 거짓과 비도덕도 아무것도 아니라는 식으로 살아가는 이의 모습은 도덕적 노력을 참으로 슬프게 만듭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 평등하자 하면 내가 교회 혹은 성당 건축에 얼마를 낸 사람이라며 부끄러움도 없이 더 많이 냈으니 더 높은 자리에 서는 것이 당연하다 말하기도 합니다. 부끄러움이 없으니 도덕이란 것을 기대하기 힘들겠지요.

이 세상을 더와 덜로 나누고 모든 것을 그렇게 판단하고, 어떤 식으로든 더 많은 것을 누리겠다며 살아가는 이들, 그 삶도 참 서글픕니다. 

하느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은 하느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그런 곳이었습니다. 그 아름다움은 시각적인 아름다움이나 화려함이 아닙니다. 하느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은 모든 것이 그저 그렇게 있어도 그것만으로 좋은 그런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좋은 것뿐인 세상을 더와 덜로 나누고 '더' 많은 것을, '더' 좋은 것을, '더' 높은 곳을 위해 나 아닌 누군가와 다투며 빼앗으려 합니다. 더불어 가짐은 없고 오직 홀로 가지려 합니다. 자신만이 홀로 가지기 위해 나 아닌 이들을 모두 나쁜 이로 만들어 버리고 그와 다투며 하느님이 창조하신 좋음으로 가득한 이 세상을 나쁜 것으로 가득한 나쁜 세상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희망이며, 우리 가운데 누군가의 울음에 더불어 울고, 우리 가운데 누군가의 웃음에 더불어 웃던 그 더불어 있음의 모습, 하나되어 하느님의 품 안에 있던 모습은 사라지고, 서로 끝없이 싸웁니다. 서로 끝없이 의심합니다. 그리고 끝없이 밀어냅니다. 더와 덜로 나누어 보는 세상을 산 부보의 아래에서 그만 더불어 사는 법을  잃어버린 것인지... 슬프게도 쉬지 않고 싸우고 싸웁니다. 주변 사람들을 이기기 위해 거짓도 일삼고 다툼도 흔한 일입니다. 그렇게 더 많이 가지게 되고 더 높아지면 자신의 삶이 답이라는 듯이 자랑을 하고 그것으로 자신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그것을 보며 누군가는 또 부러워합니다. 

과연 이러한 것이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세상일까요? 

가장 무서운 그리고 가장 나쁜 유혹은 남을 이기며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삶으로의 유혹입니다. 더 많이 가지자는 유혹이고, 더 높이 올라가자는 유혹입니다. 그 유혹으로 우린 우리로 더불어 있지 못하고 찢어집니다. 흩어져 버립니다. 하나로 아름답던 우리는 서로 흩어져 외로이 홀로 다투며 서로 미워하며 스스로를 비관하며 그렇게 삽니다. 지금 이 세상 가득한 마음의 병도 다 그러한 이유에서 나온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 유혹에 흔들린 이들에 의하여 이 세상은 찢어지고 흩어지고 조각나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부서진 세상 가운데 가장 높은 자리에 서는 것이 성공이라 믿는 서글픈 믿음은 가난하고 힘든 많은 이들을 아프게 하고 무시하게 하고 조롱하게 합니다.

이것이 과연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모습일까요?

정말 지혜 충만한 사람은 우리 가운데 나 아닌 너의 아픔에 고개돌리지 않습니다. 고개를 돌리는 바로 그 순간, 나 역시 누군가로부터 멀어져 홀로 외로운 존재가 되어 버릴 것입니다. 남을 이기며 얻는 나의 행복보다 모두가 더불어 웃는 우리의 행복을 생각하는 것, 남을 이기며 얻은 부유함이 남이 마땅히 누려야 할 것을 앗아 가진 것일지 모른다는 미안함과 걱정에 기꺼이 서로 나누며 우리의 행복을 생각하는 것, 그것이 나만이 행복하자, 나만이 더 많이 소유하자는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운 길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것이 나의 아집에 구속되지 않고 하느님과 하나 되어 내 주변 모든 벗들과 더불어 행복하게 사는 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유혹에 빠지지 말자.. 오늘도 다짐해봅니다.

유대칠 암브로시오

2020 10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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