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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실 102호실

결국 이 철학사는 고민에 대한 궁리들에 대한 풍경화다.

by Daechilyus Ambrosius Magnus 2019. 11. 21.

왜 그들은 따지고 물었나? 결국 무지의 고백으로 이어질 것을 알면서 왜! 왜 따지고 물었나?

'신의 있음'을 사람의 힘으로 증명해낼 수 있다 생각했을까? 아니다. 그들은 이미 무지의 고백이란 결과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따지고 물었다.

삼위일체는 어떠한가. 사람의 힘으로 온전히 알 수 있는가? 아니다. 처음부터 알 수 없었다.

아무리 노력하고 노력해도 사람의 앎 속에 온전히 들어오지 못하는 무지의 영역에 영구히 남아 있을 물음이다. 그런데 왜 따지고 물었는가? 왜 스스로에게 묻고 스스로에게 답했는가? 결국 답 아닌 답을 두고 다시 묻고 답하고 다툰 까닭은 무엇인가?

어쩌면 신에 대한 그 물음들은 사람을 향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신이란 이름으로 그들이 다루고 정의하고 싶었던 것은 가장 온전한 사람의 모습이었을지 모른다. 다른 이들에게 흔들리지 않으면 철저하게 홀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의 모습을 부동의 원동자라는 이름으로 불렀을지 모른다. 생각하고 사랑하고 존재하는 신의 삼위일체 속에서 그 신의 모상으로 생각하고 사랑하고 존재하는 사람의 모습을 마주하고자 했을지 모른다. 그것이 아니라도, 신에 대한 그 물음은 결국 사람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려는 물음이었을지 모른다. 결국 무지하다는 것, 알 수 없다는 것, 사람의 끝이 있다는 것, 사람의 지성이 온 힘을 향하여 달려가도 쉼없이 달려가도 그 마지막에 이르지 못하는 그곳 것이 있다는 것, 그것을 확인하려 했을지 모른다. 사람의 앎 밖의 확인 말이다. 그 밖의 확인으로 안을 조금 더 선명하게 마주하게 되었을지 모른다. 그 밖은 사람의 말과 생각의 밖이다. 그러니 말과 생각으로 담을 수 없다. 그래서 그 밖을 말과 생각으로 그럴 듯한 이야기를 했을지 모른다. 그 그럴 듯 한 이야기는 결국 나의 밖에 그려진 나의 안에 대한 자화상이었을지 모른다. 그렇게 오랜 고민들, 신에 대한 그 오랜 고민은 결국 사람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진다. 결국 신이란 주어로 시작된 그 물음의 사람이란 주어로 넘어간다. 아주 자연스럽게 말이다. 그런데 그 사람이 주어가 된 그 자리에서 신은 온전히 사라져 버리지 않는다. 신과 사람은 서로 남이 아닌 무엇으로 함께 주어가 되었다 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플라톤이 <법률>에서 보인 그 영혼 혹은 신에 대한 논의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서 신에 대한 논의와 고민들 그리고 그 이후 플로티노스의 <에네아데스>에서 보인 신에 대한 그 깊은 사유들은 중세로 넘어가 신에 대한 스케치에 소재가 된다. 그러나 그 스케치는 처음부터 사진이 될 수 없었다. 이성으로 담을 수 없는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히브리 종교의 신에 대하여 헬라스 철학이 그리도 강조한 인간 이성이란 인간 사유의 '눈', 그 눈으로 눈에 들어올 수 없는 그 신을 보고 그린 그림이니 말이다. 그럼에도 그렸다. 그냥 믿기 보다, 이성적 동물이란 사람의 뜻에 따라 생각의 눈인 그 이성으로 신을 흐리고 흐르지만 너무나 흘려서 딱 한 마디로 적어낼 수 없지만, 보며 믿고자 했기 때문이다.

내 밖의 무엇인가를 가져와 내 안에 무엇으로 만들려는 욕심일지 모른다. 그러나 결국 내 안과 밖의 그 경계 무너짐 속에서 나를 포함한 나의 안과 밖의 모두를 품고 있는 신에 대한 스케치는 존재하는 존재에 대한 풍경화가 되었고, 그 풍경화 속 나의 위치를 확인하는 나란 주체를 찾는 지도가 되었다. 에크하르트의 그림과 스피노자의 그림 그리고 오캄의 그림과 데카르트의 그림, 그 그림들이 그렇게 보인다. 

지금 하려는 것은 그 많은 그림들이 함께 그리고자 한 그 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다. 경우에 따라선 각 그림에 대한 경험담일 수 있고, 경우에 따라선 여러 그림들이 따로 그려진 퍼즐이 되는 경우에 대한 놀라움을 포함하고 있다. 하여가 지금 내가 하는 일은 대강 이렇다. 여러 철학자들이 남긴 그 많은 고민들에 대한 궁리함, 그 가운데 마주한 많은 철학적 풍경화들에 대한 역사, 그 철학의 삶, 그 삶을 다시 그리려는 내가 그리고자 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유대칠 씀

대구에서 광주 가는 길 어딘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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