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체 글518

신앙(fides)이란 무엇일까? 신앙이란 무엇일까? 믿는다는 것, 그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여러 각지 생각을 한다. 쉽지 않다. 우선 사랑을 생각한다. 사랑은 능동이며 수동이다. 아니 할 수 없는 마음에 사랑한다. 하고 싶어 생기는 마음이 아니라, 일어나는 마음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드리는 것이 사랑이다. 그러나 그렇게 받아드리는 것, 내 영혼 가운데 일어난 것을 그대로 받아드리는 것, 그것만이 사랑은 아니다. 그렇게 수동적인 것만은 아니다. 그에게 어떻게 좋음이 될지 생각한다. 나의 좋음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어떤 것이 좋음인지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으로 웃는 그의 모습에서 나의 좋음을 발견한다. 그의 웃음이 남의 웃음이 아닌 나의 웃음이 된 것이다. 그렇게 그와 더불어 있게 된다. 그럴때 사랑이 가능하다. 그에게 무엇인가.. 2019. 10. 5.
해탈... 자유...산스크리트어로 मोक्ष(mokṣa)다. 이 단어는 놓아주고 해방시켜준다는 의미의 동사 मुच्,(muc)에서 파생된 추상명사다. 이 말은 우리에게 '해탈'로 익숙하다. 해탈한다는 것도 결국은 벗어난다는 말이다. 자유롭게 된다는 말이다. 아집에서 벗어난다는 말이 결국은 해탈한다는 말이다. 아집, '홀로 좋음'에 구속되어 다른 이들은 보지 못하고 그저 홀로 좋은 것만 추구하며 결국은 그 추구의 대상에 자신의 존재가 구속되는 그 지경, 바로 그러한 지경에서 벗어나는 것이 해탈이다. 자유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음. 진리가 우리를 해탈하게 할 것이다. 음. 아집의 행복이 얼마나 거짓인지 그 진실을 알면 해탈하게 될 듯 하다. 유대칠 씀 2019. 9. 28.
'한국'은 과연 '우리'인가? 나는 나를 문제삼을 수 있을까? 나는 나를 반성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을까? 쉽지 않다. 어느 순간 합리화 속에서 나를 쉽사리 용서한다. 나는 남들과 다르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런 저런 상황이니 어쩔 수 없었다고 생각한다. 결국 남의 탓이다. 남들이 나를 힘들게 하고 남들이 부족하고 남들이 잘못한 것이다. 나는 나를 문제 삼고 어느 순간 그렇게 나는 남의 탓으로 아파하는 이가 된다. 그런데 나 역시 남에게 남이다. 나도 남이다. 나라는 남으로 인하여 아파하고 상처받는 이들이 있다. 나를 탓하며 자신의 아픔을 이해하는 이들도 있다. 나는 모른다. 나는 남이 되어 있지 않기에 말이다. 나는 나라는 틀에서 나를 문제 삼을 수 없기에 말이다. 그렇게 나는 나를 문제 삼을 수 없다. 남을 변화시킬 수도 없다. 나.. 2019. 9. 27.
성 프란치스코의 오상 앞에서- 예수는 ‘가난한’ 이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다. 성 프란치스코의 오상 앞에서- 예수는 ‘가난한’ 이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다. 예수는 대단한 사람이 아니었다. 가난했다. 잔혹한 고문을 받았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 대단하지 않았다. 기적의 능력을 가졌다지만, 가난하고 아픈 이를 위한 치유의 기적을 행할 뿐, 스스로를 위해 사용하진 않았다. 자신에게 찾아온 잔혹한 죽음의 고통을 피하지 않았다. 부유함과 권력을 얻으려 애쓰지도 않았다. 높은 곳에 올라 지배하는 권세의 기적보다 낮은 곳의 아픔을 안아주는 치유의 기적을 보였다. 예수는 많이 배우지 않았다. 명문 학교를 나온 이도 아니다. 그리스나 로마로 유학을 다녀온 수재도 아니다. 모두가 인정하는 공간에서 체계적인 신학 교육을 받은 이도 아니다. 그는 가난하고 아픈 이들의 벗으로 있을 뿐이었다. 지상에.. 2019. 9.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