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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실 101호실19

홀로 울게 하지 않는 것, 그것이 신앙이다. - 시에나의 가타리나의 또 다른 그리스도 되기 홀로 울게 하지 않는 것, 그것이 신앙이다. - 시에나의 가타리나의 '또 다른 그리스도'(alter Christus) 되기 그저 철저하게 혼자다. 옆엔 아무도 없다. 누군가와 함께 하고 싶다는 것이 간절한 마지막 희망이 된다. 그 사실이 아프다.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을 희망한다는 것이 잔혹한 절망의 이유다. 이렇게 마지막을 마주한다. 혼자 세상을 떠난다. 너무나 아픈 마지막이다. 14세기 유럽의 흑사병 이야기다. 병에 걸렸다는 것은 단순하게 신체의 한 곳이 아프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아픔이나 고통이란 단어로 담기 힘든 절망을 의미한다. 치유의 방법도 없다. 고통을 덜어낼 길도 없다. 그냥 아파해야 한다. 그리고 죽어가야한다. 흑사병은 돌림병이다. 타인에게 전염 된다. 피해야할 그 무엇이 되어 버린다.. 2020. 1. 5.
쿠사누스의 행복해지는 법, 불행해지는 법 쿠사누스의 행복해지는 법, 불행해지는 법 누구도 불행하고 싶지 않다. 불행하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 항상 어떤 식이든 행복을 추구한다. 그 행복의 모습이 저마다 다른 모양일 수 있지만 적어도 그것이 삶의 목표인 것은 분명하다. 누군가 목숨을 걸고 정의를 위하여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고 있다면, 비록 그 삶의 모습이 남들의 눈엔 고통으로 보인다고 해도, 그의 삶에선 행복을 향한 처절한 몸부림일 것이다. 누구도 불행을 추구하진 않는다. 불행하고 싶은 사람은 없다. 행복의 모양은 참으로 다양하다. 누군가는 많은 불편에도 불구하고 봉사의 삶을 살아가며 행복을 느낀다. 또 다른 누군가는 아쉬울 게 없는 멀쩡한 의사인데도, 굳이 전쟁터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이들을 치료하는데서 행복감을 느낀다. 참으로 다양하다.. 2019. 12. 19.
성 프란치스코의 오상 앞에서- 예수는 ‘가난한’ 이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다. 성 프란치스코의 오상 앞에서- 예수는 ‘가난한’ 이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다. 예수는 대단한 사람이 아니었다. 가난했다. 잔혹한 고문을 받았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 대단하지 않았다. 기적의 능력을 가졌다지만, 가난하고 아픈 이를 위한 치유의 기적을 행할 뿐, 스스로를 위해 사용하진 않았다. 자신에게 찾아온 잔혹한 죽음의 고통을 피하지 않았다. 부유함과 권력을 얻으려 애쓰지도 않았다. 높은 곳에 올라 지배하는 권세의 기적보다 낮은 곳의 아픔을 안아주는 치유의 기적을 보였다. 예수는 많이 배우지 않았다. 명문 학교를 나온 이도 아니다. 그리스나 로마로 유학을 다녀온 수재도 아니다. 모두가 인정하는 공간에서 체계적인 신학 교육을 받은 이도 아니다. 그는 가난하고 아픈 이들의 벗으로 있을 뿐이었다. 지상에.. 2019. 9. 26.
아픔 앞에 고개 돌리지마라! 다가가라! 그것이 참 회개의 시작이다.-헤르마스의 분노 아픔 앞에 고개 돌리지마라! 다가가라! 그것이 참 회개의 시작이다.-헤르마스의 분노 ‘아픔’은 책으로 알 수 없다. ‘아픔’이란 단어의 사전적 의미를 이해한다고, 참된 의미를 아는 것은 아니다. 아파봐야 안다. ‘아픔’이 되어봐야 안다. 책이 아닌 삶에서 알게 된다. 책에서 배울 순 없다. ‘번뇌시도량’(煩惱是道場)이란 말이 있다. 산스크리트어 불경을 한문으로 번역한 쿠마라지바의 말이다. 참된 깨우침은 번뇌로 가득한 이 현실의 공간에서 얻어진다는 말이다. 고통과 번뇌로 가득한 이 현실의 공간을 외면하곤 참다운 깨우침을 얻을 수 없다. 현실의 고통에서 고개 돌리고 앉아 그저 책 속에 얻은 깨우침은 살아 숨 쉬는 삶의 참된 깨우침이 아니다. 지금 눈앞에서 울고 있는 이 사람의 아픔 앞에 무력한 깨우침일 뿐이.. 2019. 9.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