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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존재론과 이응노

역사의 주인공은 더불어 있음의 거대한 흐름이었다. (이응노의 군상 1986년 작)

by Daechilyus Ambrosius Magnus 2020. 11. 6.

이응노라면 나에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작품은 1986년 작품인 <군상>이다. 심지어 나의 작은 휴대 아이패드의 화면이 바로 이 작품이라면 내가 얼마나 이 작품을 아끼고 가까이 두고 싶어 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상황이 그러하지 않지만, 복재 그림이라도 하나 나의 방에 걸어두고 싶다. 이응노의 삶에 대해선 굳이 이야기하지 않겠다. 그의 삶은 한국 현대사의 슬픈 비극의 한 모습이다. 독재로부터 거부당한 예술인으로 그의 삶은 쉽지 않았다. 그 쉽지 않은 고난의 시간들은 구세주를 찾게 된다. 그 고난은 비록 그가 직접 그 공간에 있지 않았지만 광주의 비극에서 극대화된다. 얼마나 아프고 힘들었을까... 그는 비록 그 공간과 그 시간에 더불어 있지 않았지만 그는 광주의 비극에 더불어 있었고 그 이후 그의 작품은 항상 그 광주의 아픔을 품으로 남이 아닌 우리로 더불어 있었다.

동학의 비극은 최제우로 시작되어 전봉준으로 이어지는 몇몇 영웅의 홀로 있음의 힘으로 가능했을까? 3.1혁명은 민족대표들의 홀로 있음의 힘으로 가능했을까? 반독재의 시간은 몇몇 투사들의 홀로 있음으로 가능했을까? 동학 농민 혁명을 그린다면 최제우나 전봉준이란 인물을 하나 그리면 그만일까? 3.1 혁명이라면 민족대표들의 회의 모습을 그리면 그것이 전부일까? 아니다. 그렇지 않다. 우리의 역사는 그들 영웅을 활용하였지만 그저 그들 몇몇 영웅의 홀로 있음이 주인공이 될 순 없다. 이미 서학과 동학으로 시작된 민중의 주체 의식, 내 역사는 내가 지고 간다는 그 역사 주체 의식은 단지 홀로 거대한 힘을 가진 영웅에 의존하지 않게 되었다. 그들을 쓰지만 그들에게 끌려가진 않는다. 참된 이 땅 역사의 주체는 그런 홀로 있음의 힘이 아닌 더불어 있음의 거대한 흐름이다. 오직 그 더불어 있음의 거대한 흐름만이 역사의 주체가 될 수 있음을 우리는 깨우쳐가고 있다. 

동학농민혁명도 3.1혁명도 몇몇 홀로 있음의 영웅만을 보면 실패한 역사다. 그러나 더불어 있음의 거대한 흐름에서 보면 그 혁명들은 우리 역사의 뜻을 일구었고, 흩어진 여럿을 우리로 불러 모았다. 그 힘은 독립운동과 반독재 운동의 토대가 되었다. 탄탄한 이론으로 무장한 사회 사상가가 아니라도, 굳이 독재에 대한 이론적 대안으로 분노하지 않아도 된다. 그 홀로 있음으로 홀로 잘 삶에 분노하는 더불어 있음의 지혜가 이 땅 역사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마음이면 충분하다. 전봉준은 한 명의 이름이 아닌 조선 그 부조리의 공간에 분노한 이 땅 힘없고 아픈 군상의 이름이다. 역사의 변두리에서 양반에게 이용당하고 버려진 이 땅 아픈 민초들의 억울함에 모이고 모인 더불어 있음의 이름이다. 윤동주는 한 명의 이름이 아닌 시대의 부조리 앞에서 부끄러워한 우리 나약한 군상의 이름이다. 그 시대를 부끄러워한 더불어 있음의 이름이다. 전태일은 한 명의 이름이 아닌 이 땅 부조리에 대항해 싸우며 배고파 죽어간 수많은 노동자들의 군상, 그 군상의 이름이다.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분노의 더불어 있음의 이름이다. 광주, 광주의 비극 역시 몇몇 홀로 있는 영웅으로 그려질 수 없다. 설령 그려진다해도 결국 그 이름으로 그려지는 것은 그 시대 분노한 아픈 하지만 참지 못한 군상의 더불어 있음이다.

이응노는 감정적 만족을 위해 그리지 않았다. 카타르시스, 마음 속에 쌓인 불안, 우울, 긴장 등 응어리진 마음을 풀어 정화하기 위해 그리지 않았다. 그의 그림은 오히려 그 응어리짐으로 시작하여 기억하고 잊힐지 모든 그 역사의 그 순간, 바로 그 순간의 주체, 그 역사의 주체, 그 역사의 무거운 짐을 지고 힘겹게 분노하며 살아가는 그 주체를 그렸다.  아프고 힘들지만 치열하게 싸우는 그 주체, 홀로 영웅을 기다리기보다 스스로 나약한 힘이지만 군인 앞에 나서는 그 더불어 있음의 거대한 역사의 흐름을 그렸다. 독재자들이 지우고 가리지만 결코 외롭지 않은 그 역사의 주체, 그 더불어 있음의 장면을 그렸다. 다시 이응노의 1986년 작 <군상>을 본다. 한지에 먹으려 그려진 저 수많은 몸짓을 본다. 이 땅에 그려진 그 수많은 몸짓의 더불어 있음을 본다. 정말 어느 하나 더 나서지 않고 덜 나서지 않는 저 거대한 더불어 있음을 본다. 바로 그 더불어 있음의 거대한 힘으로 우리의 역사는 흘러가고 있다. 때론 힘겹고 때론 실수도 하고 때론 울고 웃으며 그렇게 우리의 역사를 우리가 모두가 더불어 있음의 주체가 되어 살아가고 있다.

유대칠

2020 11 05

https://g.co/arts/PejrCgS5jvNEoFcv9

 

군상 - 이응노 - Google Arts & Culture

군상은 1979년부터 작고하기 전까지 이응노가 집중적으로 다루었던 소재이다. 처음에는 군무(群舞)의 형태로 나타났지만 1980년대에 들어가면서 격렬한 집단적 힘의 분출로서 수백 명 혹은 수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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