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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쁘리아누스3

더불어 삶이 신앙의 삶입니다. “하느님의 성전과 같이 살아야 한다”고 할 때, 치쁘리아누스(Cyprisnus, 200/210?-258)는 converso(꼰베르쏘) 동사를 사용합니다. 이 동사는 그냥 '살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가 아닙니다. 같이 더불어 산다는 의미입니다. '벗'으로 더불어 살고 '부부'로 더불어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더불어' 산다는 말입니다. 홀로 가다가 더불어 돌아와 더불어 산다는 말입니다. 치쁘리아누스는 하느님의 성전과 같이 살아야 한다고 말 할 때, 그냥 '홀로 살다'가 아닌 '더불어 살다'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하느님은 단지 나만의 '나'의 하느님이 오직 '나'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그 분은 우리 모두의 하느님, 하나 되어 있는 것이 우리 자신의 원래 모습이라 치쁘리아누스는 말합니.. 2019. 12. 10.
하느님은 그의 목소리가 아니라, 그의 마음을 듣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은 그의 목소리가 아니라, 그의 마음을 듣는 분이십니다(Deus non uocis sed cordis audior est). 치쁘리아누스는 크고 요란한 기도 보다 자신의 자리에서 열심으로 하는 기도를 강조합니다. 형제자매가 하나되어 하는 기도, 누군가 더 나서는 기도가 아니라, 각자의 자리에서 서로가 서로의 아픔을 안아주면서 하나 되어 올리는 기도, 그런 기도를 강조합니다. 그러면서 혹시나 누군가 자신의 과도한 욕심으로 큰 소리를 내며 기도하는 이들을 두고 "하느님은 그의 목소리가 아니라, 그의 마음을 듣는 분이십니다"라고 합니다. 참 바른 가르침입니다. 신앙도 이와 같을 것입니다. 내가 남들보다 더 많이 봉사했으니 내가 남들보다 더 높은 자리에서 당연히 높임을 받으면서 신앙을 해야 한다는 그 마음.. 2019. 11. 24.
아프고 가난한 이의 옆에 작은 빛이 되어라! 그것이 신앙이다.- 치쁘리아누스의 분노 아프고 가난한 이의 옆에 작은 빛이 되어라! 그것이 신앙이다.- 치쁘리아누스의 분노 "돈이면 다 해결된다." 참 슬픈 상식이다. 하지만 무시할 수 없는 현실의 모습이다. 이런 슬픈 세상에서 돈 없고 권력 없는 이는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법과 권력 앞에 작기만하고, 종교의 눈길에선 멀어져 버린 가난한 우리 이웃들은 어찌 살아야하는가? 이미 오래 전부터 정의(正義)를 말하는 법은 돈과 권력을 가진 자의 논리를 대변할 뿐이었다. 가난한 이를 향한 사랑을 이야기하는 종교 역시 사리사욕(私利私慾)에 빠져 아픈 이의 울음을 듣지 않는다. 어찌 보면 법도 종교도 스스로 많은 것을 가지고 누리는 자의 자리에 있을 뿐, 아프고 힘든 가난한 자의 눈물을 보지 않았다. 더 슬픈 것은 이것이 당연한 상식이 되어 가고 있다. .. 2019. 9.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