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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간유대칠

참된 '하나 됨(보편)'이란? (일간 유대칠 2호 2020. 01. 11)

by Daechilyus Ambrosius Magnus 2020. 1. 11.
"이것은 개별 교회 혹은 개별교구의 문제가 아닙니다. 온 세상의 문제입니다."
- 치쁘리아누스, 서한 19

'개별'이란 말, '개체'라는 말, '낱개'라는 말, 이런 말은 기본적으로 흩어져있는 여럿을 표현합니다. 하지만 하나 됨이란 이러한 흩어져 있는 것 가운데 하나의 지향점을 가지고 있을 때 가능해 집니다. 즉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는 흩어져있을 수 있지만 그 지향점이 한 곳을 향하면 그것은 하나로 있는 것이 됩니다. 가톨릭교회의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우선 지금 곳곳에 참으로 다양한 나라에 다양한 교구가 있습니다. 아시아의 다른 나라에도 있고, 유럽과 아메리카대륙에도 그리고 아프리카에도 다수의 여러 교구가 있으며, 그 교구엔 또 여러 성당이 있습니다. 그 성당에 또 다수의 성도들이 있고 사제들이 있습니다. 그러니 이 모두는 눈에 보이기엔 아무리 비슷한 옷에 비슷한 모습의 전례를 보인다해도 흩어져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을 하나 되어 있다고 하는 것은 이들이 하나의 지향점을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묵주기도를 매일 참으로 열심히 한다 해도, 그의 삶이 지향하는 지향점이 그리스도교가 지향하는 지향점과 다르다면, 그는 참된 하나됨 가운데 있다기 보다는 그저 개인의 사적 욕심으로 흩어져 있는 한 조각의 그 무엇일 뿐입니다. 

하나된다는 것은 그저 같은 옷을 입고 한 자리에 있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감각적으로 아무리 같은 모습을 보인다 해도 감각적인 것은 어디까지 흩어져있습니다. 아무리 두 사람이 같은 옷차림으로 있어도 옷은 두벌이지 한 벌이 아닙니다. 그러나 서로 다른 옷차림으로 있다 해도 비참한 누군가의 삶 앞에서 하나 된 자비의 마음이 이 둘 가운데 일어나 그 하나의 자비의 마음으로 그 비참한 삶에 더불어 살기 위해 다가간다면, 그 흩어져 홀로 외로운 그의 삶에 다가가 그의 아픔 앞에 자신의 마음을 내어 놓는다면, 그런 뜻과 실천이 있다면, 그런 앎과 삶이 일치를 이룬다면, 그 가운데 하나됨은 이미 있습니다. 눈에 보이기엔 서로 다른 두벌의 옷이지만 이미 이 둘은 하나입니다.

'보편'이란 것, 그것은 눈에 보이는 무엇이 아닙니다. 눈엔 어느 주교, 어느 사제, 어느 목사, 어느 수도자, 어느 성도가 보입니다. 각각의 개별적인 누군가가 눈에 보일 뿐입니다. 그리스도교라는 하나의 보편이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기에 서로 다른 여러 흩어진 것을 하나로 존재하게 하는 힘입니다. 만일 눈에 보인다면, 말도 되지 않습니다. 같은 옷과 전례가 정말 흩어진 여럿을 하나로 만들지 못합니다.

이미 고대 교회에도 보편의 개념이 있었습니다. 보편의 개념 속에서, 과연 그 보편을 어떻게 이해하고 적용할지 다양한 고민들이 있었지만, 이미 고대교회엔 보편이란 개념이 있었습니다. 이런 저런 사람을 어떻게 그리스도교인으로 보아야하는지 고민하는 것은 이런 저런 나와 다른 그와 내가 어떻게 하나인지 고민하는 것입니다. 이미 그 고민인 하나 됨의 고민, 눈에 보이는 같음을 넘어선 어떤 보편에 대한 고민을 담고 있습니다. 치쁘리아누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우리의 아버지'라는 주님의 기도를 거론하며 우리는 하나라고 합니다. 서로 생긴 것이 달라도 한 형제자매일 수 있습니다. 서로 다른 옷차림에 서로 다른 지식이라도 상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아버지와 더불어 우리 아버지의 집에 살기 위해선 신앙적인 한 핏줄이어야겠지요. 바로 하나의 지향점, 하나의 뜻입니다. 그 하나됨의 지향점 속에서 흩어진 여럿은 하나가 됩니다. 그것을 거부하면, 자신만의 시선과 자신만의 이득을 소집하면, 그는 흩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당시 교회의 여러 안건은 그 하나됨을 어떻게 지킬 것이고, 그 하나 됨의 적은 무엇이며, 하나 됨 그 자체는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으로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암브로시오는 가난한 이의 아픔을 이용하여 살아가는 부자, 가난한 이의 사회적 악과 고난을 거름으로 웃으며 살아가는 부자, 이들 사이의 사회적 부조리를 보면서 분노합니다. 그러면서 부자에 대하여 있어야 할 곳에 있어야 한다고 분노합니다. 나누라는 것입니다. 공유하라는 것입니다. 그런 이기적 소유는 도적질이나 다음 없다며 말입니다. 같은 그리스도교 신자라면서 우리 아버지의 품 속 한 형제자매라면서 우리 가운데 너의 아픔에 다가가지 않는 나는 너는 남으로 둔 사람이며, 이런 사회는 결국 흩어진 다수의 '홀로 있음'뿐입니다. 그러나 하나 됨, 그 하나 됨의 근본은 더불어 있음입니다. 우리 가운데 너의 아픔을 남의 아픔이 아닌 나의 아픔으로 품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 됨은 그저 말이 아닌 삶이 되어야 합니다. '함'이 되어야 합니다, 실천이 되어야 합니다. 안다고 하나되는 것이 아니라, 정말 다가가 더불어 있어야하는 실천, 그러한 행위가 하나 됨의 조건이며, 하나 됨 자체가 바로 그러한 하나 됨의 행위입니다.

보편을 지향하는 삶, 그 삶이 일상이 된다면, 이 세상 외로운 사람은 덜 하겠습니다. 

유대칠 2020년 1월 11일 씀

2018년 송해공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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