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간유대칠

성당, 거대함의 추구 (일간 유대칠 1호 2020.01.10)

by Daechilyus Ambrosius Magnus 2020. 1. 10.

전주 전동성당...2019년 가족여행 중

가족과 전주 전동 성당을 찾은 일이 있다. 주일이라 미사 참례를 하고 주변을 돌아 보았다. 성당이 참 아름다웠다. 대구 집 가까이 가실 성당과 다른 모습이고 평소 자주 보던 계산 성당과도 다른 모양으로 전동성당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 나는 성당에 대한 건축학적인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할 수준이 되지 못한 그 정도 수준의 말을 하는 것으로 충분할 듯 하다. 아름다웠다. 가실성당과도 다르고 계산성당과도 다르면서, 딱 한 번 찾아간 서울의 명동성당과도 다르면서 말이다.

중세 성당은 제법 유명하다. 거대하기도 하고 아름답기도 하다. 유럽의 성당은 이 땅의 성당과는 다른 또 다른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 참고로 나는 유럽을 가본 적이 없다. 사진으로 본 것이 전부다. 사진 속 성당만으로도 이미 가실성당과 다르고 계산성당과도 다르며 명동성당과 전동성당과도 다른 모습으로 아름다웠다. 더 크고 높다는 것은 곧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겠더라.

유럽의 성당이 처음부터 거대한 석조건물인 것은 아니었다. 아니, 유럽의 많은 방어용 성들도 과거엔 목조 건축물이고 요새였다, 그러나 목조 건축물로 적의 공격을 막아내는 것엔 한계가 있었다. 목재 탑은 적의 불화살 공격 앞에 무력했다. 서서히 목조 건축물들은 석조 건축물로 대체되면서 더욱 더 견고해졌다, 나무에서 돌로 공간의 모습이 변화하기 시자갰다. 카롤링거 왕조 시대인 8세기에서 10세기 교량은 과거 고대 교량과 달리 대부분 목재였다. 카롤로스 대제의 명령으로 세워진 라인강의 다리도 나무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813년 이 다리가 불에 탄다. 그러나 돌, 즉 석조 교량으로의 계획이 세워진다. 이 계획은 대제의 죽음으로 흐지부지 되었지만, 적어도 석재 건축물의 필요성을 인식시기에 충분했다. 13세기 말 대부분의 교량은 돌로 만들어지게 되었다. 다리의 아랫 부분을 단단하게 돌로 고정하면 상판이 나무라고 상관 없었다. 휩쓸려가면 상판만 다시 깔면되기 때문이다.

서서히 돌로 세워진 건출물들이 유럽에 유입되면서 성당도 돌로 세워진다. 9세기 초 수도원의 도면을 보면 수도원 성당은 돌로 세우고 다른 부속 건물들은 나무로 세운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점점 확대된다, 그러면서 돌은 값은 오르게 되고 돌을 다루는 석공이 필요하게 되었다.

석조 성당의 등장은 단단해진 그리스도교의 위상과도 무관하지 않았다. 엄청난 자본이 성당 건축에 사용되었다. 그것은 일종의 사업이었다. 처음엔 몇몇 수도자들이 세울 수 있다 해도, 이젠 그럴 수 없게 되었다. 교회와 수도원은 탁월한 건축가를 찾아야했고, 건축가는 탁월한 석공과 목공 그리고 이런 저런 인부들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기술의 탁월함에 따라 노동비를 차등 지급하였다. 그렇게 성당 건축은 하나의 거대한 사업이었다. 그 사업은 당시 권력자의 자기 이상을 눈에 보이는 무엇으로 드러내는 일을 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각 지역의 교회 권력과 정치 권력은 성당을 높이 올리기 시작했다. 목조 성당으로 할 수 없는 일을 석조 성당을 하게 해 주었다. 고딕 시대 길이가 100미터 이하의 성당은 생각 조차 할 수 없었다. 보베에서는 성당의 바닥에서 천장까지 높이가 48미터나 되었다. 스트라스부르에서는 참탑의 높이가 142미터나 되었다. 유럽의 중심이 된 그리스도교는 자신이 세상의 중심임을 보이듯이 높이 높이 성당을 올렸다. 거대함의 추구가 이루어진 것이다. 작은 교구의 성당에서도 이러한 거대함은 적용되었다. 서로 경쟁을 하며 높이 거대하게 세우기도 했다. 산타 마리아 델 마르 성당을 보자. 당시 가장 성당 건축을 두고 지고 싶지 않던 부유한 선주와 상인들은 1328년 당시 활동한 건축가 베랑게 드 몽타귀(Berenguer de Montagut)에서 청하여 세웠다. 이러한 거대함에 대한 열망은 수도원 역시 마찬가지다. 어느 수도원은 그 크기가 작은 크기의 도시라고 할 만 했다. 그렇게 거대하고 높아지자 새로 세워진 성당들은 경우에 따라선 그대로 대성당이 될 수 있을 만큼 거대해졌다. 건설가의 야망이 거대함으로 드러난 것이다. 교회뿐 아니라, 정부에서 세운 건물들도 거대함을 향했다, 예를 들어, 몰다우강의 다리를 봐도 알 수 있다.  

거대함을 가장 잘 드러내던 성당 건축은 그 자체로 거대한 사업이기에 그것을 위한 길드, 즉 조합, 지금 우리로 생각하면 기업과 같은 것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전문직 종사자들의 좋은 일터였다. 성당을 세우던 돌엔 다양한 노동자의 이름이 새겨졌다. 거대함의 열망은 과거 초기 그리스도교의 가난하고 낮은 자의 종교로 그리스도교와는 점점 멀어지게 하였다. 종교의 이상은 거대함으로 드러났다. 사람의 이상 자체가 거대함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하느님의 자리, 그 하느님을 따르는 신앙의 자리는 눈에 보이는 거대한 무엇으로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듯 하다. 지금도 가톨릭 교회의 거대한 성당과 개신교회의 거대한 교회 건축은 쉼 없이 이어진다. 그 거대함의 추구는 건축 발전과 당시 도시 노동자의 좋은 일자리가 되기도 했다. 성당과 교회 건축이 하나의 사업이 되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사람의 일이 된 것이다. 돈으로 계산되고 측량되고 눈으로 보이는 무엇인가를 세우는 일이 되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건축을 의뢰한 종교 권력자의 그 거대한 '눈에 보이는 신심'을 건축가는 온전히 받아 올리면서 건축 역사 발전을 일구어갔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그렇게 말구유 낮은 공간으로 이 땅엔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자리는 한 없이 높아지게 되고, 이상하게 그 높아짐과 세력의 확대될 수도록 그리스도의 뜻은 교회를 떠난 듯 했다. 가난한 이에겐 어울리지 않는 곳, 교회는 가난한 이의 벗이 아니라, 높디 높은 어느 곳의 존재로 느껴지게 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나는 가실 성당이 좋다. 작고 아담하다. 나를 제압하는 느낌도 없다. 그렇다고 아무 것도 아닌 듯이 무시할 만한 모습으로 있지도 않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한옥 성당이던 계산성당도 그대로 한옥으로 있었으면 하고 생각해 본다. 그리고 이젠 다시 거대함의 추구가 아닌 또 다른 추구, 낮아짐의 추구가 그리스도교가 뜻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길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거대함으로 만들어간 것은 그리스도의 뜻이 아니었다. 그냥 사람의 일이다. 이제 낮아짐으로 그리스도의 뜻을 이루어가야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본다.

2020년 1월 10일

대구에서 유대칠 암브로시오 

2019년 가실성당에서. 앞의 사내는 유대칠 암브로시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