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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간유대칠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1권 1장 한국말로 옮기고 풀이 (일간유대칠4호 2020.01.12)

by Daechilyus Ambrosius Magnus 2020. 1. 13.

아우구스티누스

Augustinus

 

고백록 

Confessiones

 

유대칠 옮김

Translata a Daechilyo

 

1권

LIBER PRIMUS

1장

 

한글번역
1.1.1 주여! 위대하시며, 크게 찬미 받으실 분! 당신의 능력은 위대하시며, 당신의 슬기는 헤아리지 못하겠나이다. 그리고 당신께서 창조하신 것 가운데 한 조각인 사람이 당신은 찬양하길 원하나이다. 사람은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품고 있으며, 자신이 지은 죄의 증거 그리고 당신께서는 오만 한 이를 물리치신다는 증거를 품고 살아갑니다. 그럼에도 당신이 창조하신 것 가운데 한 조각인 사람은 당신을 찬양하길 원하나이다. 당신은 우리가 당신을 찬양하며 기뻐하도록 움직이십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우리가 당신을 향하여(ad te)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심장은 당신 가운데 쉼을 얻을 때까지 편하지 않습니다. 주여! 저에게 앎과 헤아림을 주소서! 이 가운데 어느 것이 우선인지요! 당신을 부르는 것인지, 당신을 찬양하는 것인지요? 비슷하게 당신을 앎이 먼저인지, 당신을 부른 것이 먼저인지요? 허나 당신을 모른다면, 누가 당신을 부르겠습니까? 당신을 알지 못하는 이는 당신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을 부를 것입니다. 혹은 당신을 부르는 것은 당신을 알기 위함인지요? 허나, 그들이 믿음을 가지지 않고서 어찌 당신을 부르겠습니까? 혹은 설교하는 이 없이 어찌 당신을 부르겠습니까? 그리고 주님을 구하는 이가 주님을 찬양 하리이다. 당신을 찾는 이들이 당신에 이르게 되고, 당신에게 이르게 된 이들이 당신을 찬양 하리이다. 주여! 당신을 부르며 찾고, 당신을 믿으며 부르나이다. 당신은 우리에게 알려진 까닭입니다. 주여, 당신 아들의 인성과 당신 설교자의 성직으로 나에게 불어넣어주신 내 ‘믿음’으로 당신을 부르나이다.  
라틴어 원문
1.1.1 Magnus es, Domine, et laudabilis valde. Magna virtus tua et sapientiae tuae non est numerus. Et laudare te uult homo, aliqua portio creaturae tuae, et homo circumferens mortalitatem suam, circumferens testimonium peccati sui et testimonium quia superbis resistis; et tamen laudare te uult homo, aliqua portio creaturae tuae. Tu excitas ut laudare te delectet, quia fecisti nos ad te et inquietum est cor nostrum donec requiescat in te. Da mihi, Domine, scire et intellegere utrum sit prius inuocare te an laudare te, et scire te prius sit an inuocare te. Sed quis te inuocat nesciens te? Aliud enim pro alio potest inuocare nesciens. An potius inuocaris ut sciaris? Quomodo autem inuocabunt, in quem non crediderunt? Aut quomodo credent sine praedicante? Et laudabunt Dominum qui requirunt eum: quaerentes enim inveniunt eum et invenientes laudabunt eum. Quaeram te, Domine, inuocans te et inuocem te credens in te: praedicatus enim es nobis. Inuocat te, Domine, fides mea, quam dedisti mihi, quam inspirasti mihi per humanitatem filii tui, per ministerium praedicatoris tui.

 

'안다는 것'과 '부른다는 것', '안다는 것'과 '바란다는 것', '안다는 것'과 '믿는다는 것', 이것은 아우구스티누스 신학에 있어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고백록> 1권 1장에서부터 이미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문제를 드러낸다. 그가 일상을 돌아보며 자신이 궁리하고 궁리한 바로 그 문제는 바로 이것으로 본 듯하다. 하느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제대로 부리지 못하고 제대로 원하지 못하며, 하느님이란 이름의 또 다른 무엇인가를 부르게 될 것이라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선언은 그가 생각한 우상숭배의 폭이 단순히 ‘하느님’이란 이름에 한정되지 않음을 알려준다. 하느님이라 부르고 있지만, 그에게 기도를 드리고 무엇인가 갈구하고 있지만, 제대로 하느님을 알지 못한다면, 그들의 그 신앙이 향하는 곳은 하느님이 아닌 하느님이란 이름의 또 다른 무엇이 된다는 논리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하느님을 온전히 모두 알 수 없는 하느님이 창조한 창조물의 한 조각이라 할지라도 하느님을 알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사실 아우구스티누스의 그 오랜 여정은 그가 하느님, 제대로 된 참됨, 제대로 된 참된 행복을 향한 지적 궁리함의 여정이었다. 그 여정 속에서 하느님에게 다가가 그를 부르고 그를 부름으로 그에게 이르게 되었다. 하느님에게 다가가 쉼을 얻기까지, 참된 행복 혹은 온전한 참됨(완전 진리) 가운데 머물게 되기까지 사람의 마음은 쉬지 못하고 불안하다. 그 불안을 줄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그에게 신앙이고 이성이다. 알아야했고, 믿어야했다. 아리스텔레스는 사람이란 본래 좋음을 향할 수밖에 없다 했다. 플라톤은 좋음의 이데아를 향한다고 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사람이란 하느님을 향하게 창조되었다고 한다. 하느님에게 멀어지면 불안하고 그 불안을 줄이기 위해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이성으로 치열하게 고민하여 신앙을 더욱 더 온전히 하는 여정을 살아왔다. 그 여정이 고스란히 담긴 것이 그의 <고백록>이다. 그러니 <고백록>의 처음을 이렇게 시작하는 것이다. 

온전히 알지 못하면 온전히 사랑하기 힘들다. 굳이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도 그렇다. 온전히 안다고 생각하지만, 어떻게 한 사람이 나의 머리 속에 온전히 들어오겠는가? 그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부모도 온전히 자식을 알지 못한다. 자식도 온전히 부모를 알지 못한다. 부부 사이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오랜 시간 같이 살아도 서로는 서로에게 많은 부분 여전히 모르는 미지의 영역인 경우가 많다. 사람과 사람도 그렇다. 그럼에도 그들 사이에 사랑이 있다면, 그 미지의 영역을 더욱 더 알아가야 한다. 여전히 그를 온전히 모르지만 더 많이 알고 싶어 한다. 더 많이 깊이 알면 알 수록 그에게 다가가는 것이니 말이다. 작은 부분까지도 알고 싶게 하는 것이 사랑이기도 하다. 죽을 운명으로 살아가는 유한한 사람과 죽지 않은 무한한 하느님 사이의 사랑을 더 심하다. 더 모르는 것이 많다. 하느님은 과연 이 세상에 계신지 알 수 없을때가 많다. 이렇게 많은 부조리가 있는데 하느님은 정말 계신 것일까 여러 가지 생각하게 한다. 왜일까? 신자라 하여도 여전히 하느님은 더 많은 부분 사람에겐 가르져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여전히 사람에겐 멀고 먼 곳에 있는 그런 분이시기 때문이다. 아무리 바로 옆에 있어도 사람에게 하느님은 아니 계신 듯이 계신 분이시다. 바로 옆에 있어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불안하다. 종교적으로 하느님, 존재론적으로는 참된 있음, 인식론적으로는 온전한 참됨, 윤리학적으로는 참된 좋음 혹은 참된 행복에 이르지 못하고 거짓과 참됨 사이 어지러운 현실에서 사람들은 불안하다. 그 불안을 이겨냐기 위해 하느님을 향한 여정을 떠난다, 하느님 가운데, 참된 있음 가운데, 온전한 참된 가운데 나 역시 온전히 참되게 행복하고 싶어서다. 그렇게 사람은 만들어져있다. 하느님을 향하도록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불안하도록 말이다. 

<고백록>은 바로 그 불안을 이겨내며 참된 진리, 온전한 참됨, 함된 행복을 향하여 나아갈 아우구스티누스의 여정이 담겨있다. 다양한 철학과 종교를 두고 고민하고 고민하며 그는 매우 치열하게 살아간다. 불안을 이기고 마땅히 있어야할 자신의 모습, 참된 있음과 참된 행복 가운데 자신 역시 참된 자신으로 있기 위해 말이다. 불안 없는 참된 자신말이다. '참된 나', 그 '나'는 불안하지 않고 제대로 있을 것이고, 제대로 알 것이며, 제대로 믿을 것이다. 그럼 그 여정을 조금씩 따라가 보자. 

유대칠 암브로시오 (토마스철학학교 & 오캄연구소) 라틴어에서 한글로 옮기고 풀이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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