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간유대칠

형이상학에 대한 고민 1 (일간유대칠 3호 2020년 1월 12일)

by Daechilyus Ambrosius Magnus 2020. 1. 12.

연재: 형이상학에 대한 고민 1

과연 제1철학 혹은 있는 것으로 있는 것에 대한 연구 혹은 지혜 혹은 신학이란 다양한 방식으로 정의되고 진술되는 이것은 무엇인가? 아마 눈치 빠른 이라면 이 답을 알 것이다.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이다. 형이상학은 무엇에 대한 학문인가? 처음부터 학문으로 의도되긴 할 것인가? 형이상학은 있는 것으로 있는 것에 대한 있음에 대한 학문인가? 그렇지 않으면 신에 대한 학문인가?

<형이상학> 12권의 시작을 보자.

"우리의 이론은 실체에 대한 것이다. 지금 연구되는 것은 실체들의 원리들과 원인들인 까닭이다.(Meta.XII,c.1,1069a18)"

<형이상학> 12권을 보면 형이상학은 실체에 대한 학문이다. 그리고 실체의 원리와 원인을 연구한다. 그 연구의 목적은 결국 실체를 다루기 위함이다. 즉 실체가 궁금해서 하는 학문이다. 이어서 다음을 보자.

"지혜라는 것은 첫째 원인과 원리에 관한 것이라고 누구나 생각한다."(Meta.I,c.1,981b28)

첫째 원인과 원리를 다룬다는 의미에서 형이상학은 제1철학이다.  원인과 원리는 우리의 앞에 당장 있지 않다. 일상에서도 그렇다. 배부름이란 결과는 음식섭취하는 원인이 있어서 가능하다. 지금은 배부름만을 볼 수 있다지만, 그 결과는 그 이전 더 이상 이젠 지각할 수 없는 원인이 있어서 가능했다. 제1철학가 원인과 원리를 다룬다면, 이와 같이 제1철학의 주제는 당장 우리의 앞에 일상적으로 경험되는 것이 아니다. 특히나 그것이 모든 것의 보편적 질서 속에서의 원인과 원리라면 더욱 더 그러할 것이다. 우리의 감각 경험이란 감각적인 구체적 결과만을 인식하며, 그 원인은 오랜 경험으로 만들어진 정보와 논리적 사고의 결과로 얻을 수 있다. 형이상학이 제1철학이라면 형이상학 역시 바로 이와 같다. 감각 경험으로 형이상학의 논의들을 바로 확인하고 지각하기는 힘들다. 불가능할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의 합리적 사고로 이해할 수 있다. 

수학자는 존재하는 것을 수적 측면에서 바라본다. 셀 수 있고, 잴 수 있다는 관점 말이다. 수학자가 한 사물을 바로 보는 그 관점이 수학을 다른 학문과 다른 학문으로 수학을 가능하게 한다. 사회학은 사회라는 관점에서 한 사물을 볼 것이다. 물리학은 물리 현상이란 측면에서 사물을 볼 것이다. 이들이 같은 것을 보고 있다 해도 이와 같이 서로 다른 관점으로 대상을 바라보기에 이후 정리하는 방식도 모습도 다르다. 즉 하나의 사물일지도 모두가 서로 다른 방식의 그림을 그린다. 수적 존재를 그리는 사람도 있고, 사회적 존재를 그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며, 물리적 존재를 그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두는 서로 다른 것을 보고 그린 것이 아니라, 하나의 동일한 사물을 보고 그렸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같은 것을 보고 그 봄의 방식, 즉 시선의 차이로 서로 다른 그림이 된 것이다. 형이상학자는 있는 것으로 있는 것을 본다. 수학적인 것으로 있는 것을 보는 것도 아니고, 사회적으로 것으로 있는 것을 보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물리적인 것으로 있는 것을 보는 것도 아니다. 형이상학은 있는 것을 있다는 사태, 바로 그 관점으로 본다. 있는 것으로 있는 것을 보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형이상학으로 고민하는 것이라 한다. 있는 것으로 있는 것은 생물학적으로 혹은 사회학적으로 혹은 물리학적으로 있는 것을 보는 것에 비하여 보다 더 추상적이다. 있는 것으로 있는 것, 다른 어떤 것으로 있는 것도 아닌, 오롯이 있는 것으로 있는 것, 다시 말해 순수히 있음, 즉 존재 그 자체를 다룬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실체는 스스로 있다. 다른 것에 의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 '관계'라는 범주는 서로 다른 실체들 사이의 상호 연관의 방식이다. 부부는 한 남자와 한 여자 사이의 상호 연관이다. 두 실체가 없다면, 관계는 독립적으로 있지 못한다. 한 명의 남성이나 한 명의 여성만으로 부부라는 관계가 성립될 순 없다. 양도 무엇인가의 양이다. 즉 실체의 양이다. 양 그 자체로 있을 순 없다. 성질도 마찬가지다. 무엇인가의 성질이다. 어떤 실체의 성질이다. 성질 그 자체로 존재할 순 없다. 제1실체는 어떤 다른 것에 의하여 서술된다. 즉 "유대칠은 이성적이다"라는 명제에서 개인 혹은 개체를 의미하는 주어는 '이성적'이란 보편으로 서술된다. 여기에서 이성적인 것은 실체에 대하여 서술되지만, 그 자체로 존재할 순 없다. 제2실체는 제1실체의 술어가 되는 어떤 것이다. 예를 들어, "유대칠은 사람이다"라는 명제에서 주어인 제1실체 '유대칠'은 제2실체인 '사람'에 의하여 서술된다. 제2실체란 여러 개체에 대하여 서술되어지는 술어다. 그러면서 보편이다. 보편은 여럿에 대하여 서술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보편은 제1실체와 같이 하나의 낱개가 아니다. 여럿에 대하여 서술되어지는 술어다. 여기에서 이성적인 것은 실체에 대하여 서술되지만, 그 자체로 존재할 순 없다. 그 자체로 스스로 존재하는 것은 실체, 그것도 제1실체 뿐으로 보이기도 한다. 다른 모든 것은 실체라는 원인에 의하여 존재할 수 있다. 실체가 없었다면 없었다. '유대칠'이란 제1실체가 있기에 유대칠의 양과 성질 등과 같은 범주들이 서술가능한 것이다. 말일 유대칠이 없다면, 유대칠의 성질과 양은 있을 수가 없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제1실체을 제외한 모든 것은 제1실체에 대하여 서술되어진다. 제1실체에 다른 모든 것이 의존한다. 제1실체 가운데 없다면 그것에 대한 술어가 될 수도 없다. 유대칠 가운데 유대칠의 성질이 있으며, 유대칠이 없었다면 유대칠의 성질도 없다. 그렇다면 제1실체는 가장 근본적으로 세계의 근본적 있음이다. 제1철학으로 형이상학이 다룰 가장 근본적인 것은 바로 이러한 논리에선 실체다. 실체 없이는 다른 것은 없었다. 그리고 제1실체의 술어로 있는 제2실체는 제1실체의 본질을 부여한다. "유대칠은 사람이다"에서 보편인 '사람됨'이 유대칠 가운데 있기에 유대칠은 사람이라 서술되었던 것이다.

실체는 이렇게 생각한다면 있는 것으로 있는 것, 즉 있는 것의 중심이다. 당장 보이지 않지만, 실체로 인하여 다른 모든 것이 존재한다. 유대칠이란 제1실체가 없다면, 유대칠의 성질, 양, 장소, 시간 그 모든 것도 없을 것이다. 유대칠이란 제1실체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제1실체에 본질을 부여하며 무엇이 되게 하는 제2실체 역시 중요하다. 제1실체든 제2실체든 다른 것에 의존해 있지 않은 것, 스스로 있는 것으로 있는 것을 다루는 것, 그것이 바로 '형이상학'이다.  

실체는 바로 우리에게 지각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제1의 것이다. 그것이 없이는 다른 것이 있을 수 없다. 바로 그 실체는 있는 것으로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많은 것의 존재 원인이다. 실체 없이 다른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렇게 형이상학은 실체에 대한 학문, 즉 있는 것으로 있는 것에 대한 학문, 궁극 원인과 원리에 대한 학문이 된다. 

한국철학에 한국형이상학이 요청된다면, 그 한국형이상학도 한국철학이 고민해야할 그 궁극의 실체, 참으로 있는 것, 그 참된 있음에 대하여 고민하는 것이어야 한다. 어쩌면 그 작업을 위해 우린 지금 이런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유대칠 씀

2020.01.11

 

전주에서...

 

오캄연구소는 철학을 연구하고 생산하는 작디 작은 연구소입니다. 작디작은 노력에 후원의 힘을 더해 주실 분들은 <대구은행 256 13 125574 유대칠> 혹은 <국민은행 96677343443 유대칠>으로 하시면 됩니다. 적은 금액도 오캄연구소에겐 큰 응원입니다. 작은 걸음이 위대한 걸음의 시작일 수 있습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