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란 원소들이 모여 세상이란 전체를 이룬다.
나는 모든 지난 삶의 시간들을 기억하지 못한다. 큰 사건 몇몇을 기억하며 산다. 그러나 나의 기억에 남아있지 않지만 분명 그때 그 시간 혹은 순간은 있었다. 20년 전 오늘 이 시간 나는 무엇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날 나는 분명 무엇인가를 했다. 그리고 그 일은 나름 그 순간 소중한 나의 최선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나의 삶에서 나는 거의 대부분의 순간들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리고 기억하지 못하는 그 대부분의 순간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너무나 익숙해서 기억되지 않지만, 그 익숙함의 결실이 지금의 나란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오히려 기억의 큰 순간들은 나답지 않은 것들이 많다. 나답지 않아서 기억한다. 어느 정도 나의 삶에 영향을 주었지만, 그 영향 역시 삶으로 받아드려 녹아내려 일상의 순간으로 수용하여 살아가게 된 것은 바로 기억하지 못하는 더 많은 순간들이다.
지금 나의 옆에서 나와 커피 한 잔을 마시는 이 소중한 친구과 이 소중한 시간들도 어쩌면 10년 뒤는 기억하지 못할지 모른다. 일상의 작은 순간들이니 말이다. 그러나 이 순간들이 나를 정말 제대로 만드는 내 존재의 조각들이다. 이런 기억되지도 않은 일상의 조각들이 모이고 모여서 내가 된다. 나란 존재의 존재론적 원자들이다. 책상도 원자로 존재하지만 우린 책상이라 부르지 원자들이라 부르지 않는다. 원자는 보이지도 않는다. 이름도 없이 말이다. 그러나 그 원자들이 책상을 있게 한다. 나 역시 그렇다.
세상은 영웅으로 이루어진 전체가 아니다. 영웅도 어쩌면 작디 작은 몸짓들이 만들어낸 어떤 것일 뿐, 실상 이 세상은 작디 작은 조각의 평범한 사람들의 전체다. 역사책에 기억되지 못하고 되돌아봄 가운데 기억되지 못하지만 말이다.
중세의 평범한 사람에 대하여 우린 기억하지 못하지만, 어쩌면 그 평범한 사람들의 기억에 들어가고 들어가면 조금 더 진짜 중세를 알게 될지 모른다. 그들의 그 작은 일상의 모습들이 토마스 아퀴나스를 부른 것이고 둔스 스코투스와 오캄 등을 부른 것이다. 지금도 제대도 우리의 기억에 드러나지 않은 영웅 아닌 이들의 철학이 수사본으로 남아있으니 그것을 더 자세히 보는 것도 큰 도움이 되겠다. 그러나 이 역시 부족하다. 당시 치열하게 철학함에도 글로 지금까지 남아있지 않은 철학들이 더 많을 것이니 말이다.
지금 우리는 역사 속 사라질 무엇으로 스스로를 작게 본다. 그러나 지금 나의 이 사소함이 세상의 원소이고, 이 원소들이 모여 세상이 이루어진다. 나란 작은 원소 없이 세상이란 전체는 없다. 나의 앞 사소한 일상의 이웃도 마찬가지다. 이들로 인하여 세상이 존재한다. 훗날 이 시간을 기억하는 이는 나의 기억에 다가와야 한다. 그에게 주어진 능력의 범위에서 말이다.
유대칠 암브로시오 씀
2020.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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